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내 영혼이 갈급하나이다

날짜 : 2011.05.1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 영혼이 갈급하나이다
성경본문 : 시편 42편 1-5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video_master/Sermon_20110515.wmv

피핀 페라스(Pipin Ferras) 라는 잠수부가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더 깊게 잠수하길 원하는 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10, 20 feet 물 아래 들어 가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40, 50 feet (약 50미터) 잠수하길 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핀은 달랐습니다. 피핀은 531 feet(160미터) 밑에 내려가 보았습니다. 물론 아무 장비도 없이 산소통도 없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잠수를 하기 위해서 그는 8.2리터의 공기를 들이켰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되는 호흡량입니다. 물속에 빨리 잠수하기 위하여 무릎에 무거운 알루미늄을 부착하였습니다. 숨 한번 쉬고 160미터에 내려갔다가 온 것입니다. 물에 잠수한 시간은 3분12초였습니다. 그는 성공리에 531 feet 바닷속을 내려갔다가 온 것입니다. 3분12초 만에. 산소통도 없이…, 그런데 이것으로 만족하였을까요? 그는 아직도 더 깊이 내려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피핀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공감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물론 피핀처럼 산소통도 없이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분들은 더 공감을 하게 될줄 압니다만, 바닷물속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엔가 깊게 들어가고픈 욕구가 있습니다. 바다와 반대 되는 곳이 산인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이 그들의 욕구입니다. 사람만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자동차 범퍼에 ‘I climbed Mt. Washington’이라고 쓴 것을 보는데 자동차도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우리 사람은 깊은 곳에 잠기길 원하던가 높은 곳에 오르길 원하던가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피핀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남들보다 제일 깊은 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내려가려는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느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느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릴 때는 그러한 갈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깊고도 높고도 넓은 곳을 향하고 있는 시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고백과 더불어 함께 최고의 것을 향하는 삶은 어떤 삶인지 살펴보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갈망을 되찾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참고로 오늘의 시인은 바벨론 포로 가운데 시를 쓴 것으로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인은 지금 최고의 예술가의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술가는 누구인가? 깊은 곳을 그리워하는 자, 높은 곳을 그리워 하는 자, 넓은 곳을 그리워하는 자들입니다. 무엇인가 최고의 것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바로 예술가들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슴의 아픔이 있습니다.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는 아픔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분의 책 중에 하나가 ‘Finding Water’(물을 찾는 갈급함)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예술가로서 예술가의 삶을 소개한 책입니다. 곧 예술가의 삶을 물을 찾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큰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I must get tiny in order to be connected to the larger order.) 종종 잠이 안 오는 밤에 나는 기도합니다. ‘Help me, God.’ 그리고 조용히 눕습니다. 그 때 저는 압니다. 지금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 모습이 바로 시인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작아진 자들이 무엇인가 갈망합니다. 그리고 갈망하는 자들만이 큰 존재를 만납니다. 그런데 갈망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잠시 소유했던 갈망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갈망은 사슴의 아픔을 요구합니다. 사슴의 아픔이 없는 갈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갈망만이 진정한 예술적 삶을 살게 합니다. 이 아픔 가운데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이 갈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인냥 느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갈망과 체념이 시인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갈망이라는 생각이 드는가봅니다. 그 이유가 3절 말씀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주위 사람들이 와서 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각 지역 마다 하나님이 다 다르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곧 주위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는 바벨론의 신에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벨론에는 마덕(Marduk)이라는 신이 있는데 곧 이 신만 존재하고 있으니 다른 기도는 하나마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어 갔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도 자신을 힘들게 하는데, 시인을 힘들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과 함께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덧 마덕(Marduk)이라는 신을 섬기는 문화 가운데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많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삶은 예술이자 종교가 아닙니까?
예를 들어 우리 한국인들도 처음에는 무속 종교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후 불교가 들어와서는 불교문화 가운데 살았습니다. 유교가 들어와서는 유교 문화 가운데 살았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기독교가 들어 온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빠져 들고 있는 바벨론 문화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감하면서 눈물 가운데서 시인은 고향 생각에 잠깁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리들을 이끌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던 기억에 잠깁니다.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찬양대를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벨론에 와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찬양대는 고사하고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하라는 일을 하면서 한탄과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마음에 상한 상처를 안고 들로 나가 보았습니다. 사슴이 눈에 띄였습니다. 여기저기 물을 찾아 헤메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바벨론 사람들로 인하여 또한 바벨론 문화에 젖은 동포들로 인하여 잠시 체념에 빠졌었지만 사슴을 보면서 새롭게 힘을 얻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당신의 본래의 모습인 찬양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성전에서 찬양을 하던 시인이 이제는 바벨론 한 복판에서 Marduk신을 섬기는 자들 속에서 외로이 여호와를 찬양을 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새로운 예술가로 변신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시인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지 않습니까? 시인의 도전을 두 가지 질문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나에게 사슴의 아픔이 있는가?’

시인의 삶 앞에서 우리들의 삶을 비교하면 정말 초라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는 자유로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고작 누가 가장 깊은 곳에 한 숨에 들어갔다가 나오나? 누가 처음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나? 이 정도가 아닙니까? 물론 그 것도 못하기에 우리는 피핀이나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정복한 힐러리(Hillary)경을 존경하고 있습니다만은, 실제로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자들에게 물에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이것이 최고의 예술가적 삶인가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시간이 갈수록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사실 올림픽은 누가 더 높이 뛰나 누가 더 깊이 잠기나 아닙니까? 이것에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특별히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신체적 조건이 타고나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 최고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는 올림픽이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골이 되십니다. 목표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높이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최고의 예술가적 삶입니다. 이 예술가적 삶은 그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예술적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나요? 어릴 때 신동이라는 말을 안 들어 본사람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요즘도 손주 자랑하시는 분들 보면 제각기 당신 손주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신동인냥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손주가 20세가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손주 자랑이 왜 그리 쉽게 사라지나요?
손주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예술가적 삶을 잃어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높은 것과 깊은 것을 쉽게 체념하는 현실주의자들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인은 바벨론이라는 문화 가운데서 잠시 예술가적 삶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슴을 보면서 다시금 예술적 삶을 되살립니다. 다시 사슴의 아픔을 되찾아 갑니다. 바벨론 문화가 잠시 시인에게서 사슴의 아픔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나에게 사슴의 아픔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부요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21세기 바벨론 문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삶 그 안에 무서운 바벨론이 있지 않을까요?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께 대한 갈망까지 죽이는 바벨론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사는 이 바벨론 문화는 이스라엘 민족이 살았던 바벨론문화와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운 문화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예술가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바벨론은 그 갈망조차 빼앗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어느 분이 우리가 사는 바벨론 문화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글을 접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바벨론 문화를 “카운트다운(Countdown)”문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Vacation(휴가)으로 향해서 카운트다운하면서 살아갑니다. 학생들은 졸업을 향해 카운트다운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른들은 월급날을 카운트다운하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분들은 weekend(주말)를 향해 살아갑니다. 목사인 저는 늘 주일을 향해서 카운트다운하며 살아갑니다. 콩쿨에 나가는 사람은 콩쿨을 향해, 연주하는 사람은 연주일을 향해, 사업하시는 분들은 payment day, 모게지, 사원월급 주는 날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는 카운트다운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카운트다움을 하다 보니 깊이를 잃어 갑니다. 높은 곳을 볼 틈이 없어졌습니다. 자연을 보는 눈을 잃었습니다. 사슴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깊은 곳과 높은 곳을 볼 틈이 없어지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예술가가 깊은 곳과 높은 곳을 향하여 가야 하는데, 늘 시간에 쫓겨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니 비정상적인 일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깊은 곳과 높은 곳을 추구해야 하는 삶이 이상하게 표출이 되지 않겠습니까? 비정상적으로 깊은 곳 비정상적으로 높은 곳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곧 존재하지도 않은 허상의 것들을 만들어 놓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카운트다운문화에다가 한 가지 문화를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복권(lottery)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졸업을 하기 전에 뭔가 lottery가 하나 터지길 바랍니다. 공부는 제대로 안 했지만 남들이 전혀 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논문이 나오길 바랍니다. 우리 자녀가 실력 보다 더 훨씬 좋은 학교에 입학하길 원합니다. 연구는 적당히 해도 노벨상을 받게 되길 원합니다. 사업을 해서 졸지에 부자가 되길 원합니다.
저의 이야기도 해야겠죠. 설교 준비는 적당히 해도 전무 후무의 최고의 설교를 만들기 원합니다. 이것이 lottery(복권)문화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평생 한번도 제 손으로 복권을 사 본적 없습니다. 그 흔한 카지노에 가서 빠찡꼬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복권문화와 상관이 없나요? 사실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누구보다도 카운트다운 문화와 복권 문화에 젖어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이를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높이를 잃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서운 바벨론 문화 안에 갇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우님은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매번 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는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성자 그레고리(St. Gregory the Great)가 성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성경은 양들이 놀 수 있는 물가도 되고 코끼리가 수영할 수 있는 강물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물가가 되어서 양들이 때로는 뛰어 놀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강물이 되어서 코끼리가 수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바벨론 문화는 우리를 얕은 물가에만 놀게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거기에 만족하게 합니다. 깊은 강물로 향하게 하는 것을 막습니다. 깊은 강물로 향하노라면 갑자기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하나, 둘….’ 하는 카운트다운에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물가에 머뭅니다. 물가에 있지만 언젠가 복권이 터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복권은 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만든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바벨론 문화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얕은 물가에 찾아와 물을 마시는 사슴을 보십시다. 물을 찾고 찾고 찾다가 드디어 물을 찾은 사슴의 모습을 보십시다. 물을 찾아 수 십리를 걸어 온 사슴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사슴의 아픔이 있는가 살펴보십시다.
사슴의 아픔이 없으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사슴의 아픔을 소유합니다. 왜냐하면 카운트다운의 소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Lottery의 소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소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슴의 아픔을 소유한 자들이 되십시다. 최고의 것을 바라는 참 예술가가 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모해야하는 최고의 분이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목사님이 한 행복한 여인을 당신 책에 소개합니다. 뇌수술을 받고 한쪽 안면신경에 장애가 왔습니다. 그래서 웃으면 언제나 한쪽으로 얼굴이 이그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신의 남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는 나를 전혀 이상하게 추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나의 외모에 대해서는 조롱을 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저와는 다른 눈을 소유한듯 합니다. 내가 거울을 통해 나의 얼굴 안에 흉한 모습을 보아도, 나의 남편은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아름다운 것만 보는 자, 이 사람이야 말로 최고의 예술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이 될까요? 최고의 분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슴의 아픔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찬송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자들입니다. 아니 이들로 인하여 세상은 아름답게 새로이 태어납니다.
교우 여러분, 사슴에게서 배웁시다. 사슴의 아픔을 소유한 채 하나님을 사모하십시다. 영원토록 사모하십시다. 시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151 아름다운 발 admin 2011.07.24
150 무화과의 때? admin 2011.07.10
149 바울 할아버지 admin 2011.07.03
148 나를 축복하소서 admin 2011.06.19
147 첫 열매 admin 2011.06.12
146 소중한 한 사람 admin 2011.06.05
145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admin 2011.05.22
144 내 영혼이 갈급하나이다 admin 2011.05.15
143 사랑의 줄 admin 2011.05.08
142 큰 기쁨의 달음질 admin 2011.04.24
< Prev ... 1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