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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으로

날짜 : 2011.04.1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영문 밖으로
성경본문 : 히브리서 13장 8-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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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에 큰 부자가 으리으리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어찌나 유명했던지 구경꾼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집에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집주인은 출타 중이어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즉시 달려가 현장을 본 주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의 가장 큰 보물이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막내 아들이 달려와 말합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제 그 집을 팔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집을 팔라고 하도 졸라대서 그만 팔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집에 못지않은 다른 집도 계약했고요.”
부자는 눈물을 멈추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막내아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우리가 그 집을 팔기로는 했지만 거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산 사람이 아직 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자가 불을 질렀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버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이 여전히 그의 집이어서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 때 집을 산 사람이 마차를 타고 나타나 말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소.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오. 내가 그 집을 사기로 했다면 이미 그 집은 산 것이오. 계약금을 걸지는 않았지만 일단 계약을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이제 나의 집이 불탄 것이오.”
그러자 갑자기 부자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치고 웃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고 서로 서로 놀리곤 하였는데, 실상 이 노래는 어린 아이들의 노래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른들도 하루에 열 두번 웃었다 울었다 하는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뿐이지 매한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우리들의 인생을 살펴보면 집 한 채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우는 삶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전부일까요? 그렇다면 정말로 인생은 초라하다는 생각 밖에 다른 생각이 들 수 없습니다. 그동안 사순절을 지켜왔는데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가 가급적이면 조금 울고 많이 웃게 해달라고 지키는 것일까요? 오늘은 종려/고난주일로 지키고 금주를 고난주간으로 지키는데 이렇게 지키는 이유가 이번 일주일간 실컷 울어서 남은 일 년은 웃으면서 지내게 해달라고 지키는 것일까요? 물론 웃어야죠. 그런데 무엇 때문에 웃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이번 사순절을 지내면서 깨닫는 것은, 저도 많은 경우 세상 일로 인해서 울다가 웃고 또 웃다가 우는 저 자신의 깊은 속 사람을 느껴 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보이는 우주 공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은 매여 있으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창조한 시간인데 거기에 매여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곧 하나님이 시간 안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도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시간 안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으신 주님께서 2000년 전에 현재라는 시간 안에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면서 시간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몸소 현재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현재 안에 거하시지만 또한 현재라는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은 영원한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중한 시간 속에 거하시면서 2000년 전에 나귀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삶을 2000년 전의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의 사건이자, 또한 내일의 사건이자 영원한 사건으로 연결시켜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시간을 초월한 사건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죄 모세의 죄 바울의 죄 오늘은 우리들의 죄까지도 사하실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시간 안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한편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자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러면 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9절 말씀입니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마음은 음식으로 가꾸면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기자는 갑자기 음식에 대해서 운운하고 있을까요? 아마 이런 생각을 갖고 이 말씀을 하셨을줄 압니다. 현재의 삶에 매여 있을 때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이 음식입니다.
우리는 1년 후 어떤 음식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1년 후는 커녕 내일 무슨 음식을 먹을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죠.
결혼식 초대장에는 종종 3달 후 있을 리셉션에서 무슨 음식을 들 것이냐고 질문을 해오곤 합니다. 저는 늘 저의 집사람하고 같이 가니깐, 한 사람은 고기 또 한 사람은 생선을 주문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날 가서 기분에 맞는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음식은 현재의 삶에 매여 있게 합니다. 아니 음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끊어 놓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늘 현재에 매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에 매여 있는 삶은 곧 현재만을 위한 삶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 놓고 사는 삶이 바로 현재만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니 좀 더 말씀드리면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영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삶입니다.
사실 저자는 지금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신 것처럼 우리 인간의 삶도 그의 못지않게 시간을 초월한 삶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의 삶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현재에 매여 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나의 삶이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과거는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의 삶에도 영향을 줍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과거의 삶도 변하 되어 갑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고 회개하면 과거의 삶은 멋진 간증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오늘의 삶은 시간을 초월해서 미래에도 영향을 주고 과거에도 영향을 줍니다. 영원한 삶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 소중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그러니 우리는 은혜의 음식을 먹여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의 음식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음식에 대해서 10절 이하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레위기에 보면 두 가지 제사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와 제물을 먹을 수 없는 제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로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반면 속죄를 위한 속죄제사의 제물은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본문에 나오는 제사는 속죄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레위기 4:21절에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 번 수송아지를 사람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속죄제를 드릴 때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지고 나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영문 밖에서 불살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문 밖에서 불사른 짐승의 고기가 은혜의 음식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은혜의 음식을 먹기 위하여 예배시간마다 짐승을 태우고 그것을 영문밖에 나가서 먹어야 하나요?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기자는 우리가 먹어야할 은혜의 음식에 대해서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문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곧 골고다로 나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살을 태우셨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골고다의 주님이 바로 은혜의 음식입니다. 우리가 영문밖으로 나아갈 때 바로 은혜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영문밖으로 나아가면 언제나 은혜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년간 심리학자들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 성공하는가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4살 난 아이들에게 마쉬멜로(marshmallow)를 주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2년 후에 결과를 보았습니다. 4살 난 아이들에게 2개의 마쉬멜로를 놓아둡니다. 학자는 그것을 놓고 잠시 다른 일로 20분 자리를 비운다고 말합니다. 만일 20분간 그것을 안 먹고 있으면 20분 후에 돌아와서 두개를 더해서 네 개를 준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부류의 아이들이 생기는데 한 아이들은 금방 집어 먹습니다. 다른 부류의 아이들은 눈을 손으로 가리던가 잠을 자던가 하면서 마쉬멜로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끝내 20분을 기다립니다. 12년 후 결과를 보니 20분을 기다리고 참는 아이들이 훨씬 자기의 주어진 일들을 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마쉬멜로를 참고 기다리는 어린이들에게 이런 축복이 따르는데 은혜의 음식을 먹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비교할 수 없는 복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은혜의 음식을 먹게 되면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먼저 자신의 과거가 새롭게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어떤 실수도 후회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미래의 어떤 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맞이하게 됩니다. 곧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됩니다. 마음 속에 기쁨과 자신감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은혜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 삶이 바로 은혜의 음식을 먹은 자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오늘의 삶은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는 놀라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백투더퓨쳐(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주인공이 30년 전 과거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의 부모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총각 처녀시절로 돌아간 것입니다. 장차 어머니가 될 처녀와 잠시 사귀게 됩니다. 장차 자기 어머니가 될 처녀와 사귄다니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다시 장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귀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 두 분의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가져온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시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옵니다. 부모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 새롭고 즐거운 가정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현재의 삶이 과거의 삶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상상을 갖고 이 이야기를 만든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은혜의 음식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은혜의 음식을 먹을 때 과거와 미래까지도 새로워 집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 올 때 우리의 전 삶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은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삶은 나의 과거와 미래만 영향을 주는지 아니면 인류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은혜의 음식을 먹은 자들은 자기 혼자서 기쁨과 자신감의 삶을 사는 것인지 이 기쁨과 자신감의 삶이 인류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만일 자기 자신의 삶으로만 그친다면 그처럼 이기주의적인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는 은혜로운 음식은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인류 공동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은혜로운 음식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 음식을 먹는 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공동체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이를 14절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은혜의 음식을 먹는 자들은 영구한 도성을 그리워합니다. 기다립니다. 그런데 영구한 도성에 혼자 들어가나요? 영원한 공동체가 바로 영구한 도성입니다. 은혜의 음식을 먹는 자들은 공동체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바로 영구한 도성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곧 은혜의 음식을 먹은 자들에게는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집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사이좋게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아직 최고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계속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는 에너지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이 그림의 물감은 기쁨과 자신감입니다. 이 두 가지 물감으로 멋진 그림을 그려가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가게 될 줄입니다.
한편 은혜의 음식을 먹는 자들은 자신의 삶이 놀라운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또 다른 차원의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저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목사일까요? 당회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이러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한편 자신의 삶이 이토록 중요함을 아는 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집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질수록 더욱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현재’라는 삶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나’라는 삶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으로 인해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통일시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멋진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멋진 삶은 놀라운 공동체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도성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고 끝내 대제사장에게 붙들려서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몸을 태우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은혜의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함께 영문 밖으로 나아 가십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상상의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사도 요한이 십자가 아래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동정과 사랑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컸던 까닭에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의 못을 뽑고 주님을 조심스레 땅에 누였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입술이 바싹 마른 걸 보고 물을 한 컵 가져오려고 잠시 자리를 떴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 왔을 때 주님은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습니다. 그는 다시 못을 뽑고 주님을 땅바닥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요한은 주님을 덮어 드릴 담요를 가져오려고 잠시 자리를 떴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주님은 또다시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그분을 쳐다보며 요한이 물었습니다.
“주님, 어찌해서 제가 돌아올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비워 둘 수 없는 게 십자가의 법칙이다. 이것이 내가 계속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이유다.”
두 분은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가슴으로 말했습니다. 요한은 드디어 주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주님 대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때 이래 주님은 당신 십자가에 되돌아가지 못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들의 몸에 채우십시다. 주님께서 마음껏 d nfl의 삶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음껏 새로워진 우리의 삶으로 온 세상을 밝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영문밖으로 나아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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