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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

날짜 : 2011.04.0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의 소망
성경본문 : 예레미야 애가 3: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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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백살이 된 왕에게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왕은 죽음의 사자에게 애걸합니다.
“저는 아직 삶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온갖 잡다한 나랏일에 파묻혀 언젠가 육신을 떠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정말 하루도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데려간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제 대신 아들 한 명을 데려가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들이 100명이나 있습니다.”
“좋다. 그럼 네 아들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100명의 아들 중엔 이미 여든 살이나 먹은 자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교활했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열여섯 살 된 아들은 달랐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음의 사자를 따라 가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승사자도 그의 나이를 알고는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백년을 산 아버지도 인생을 여태껏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의 아이가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아이를 어떻게 데려 갈 수 있단 말인가?
“너는 모른다. 너무 순진하다. 아흔 아홉 형제 모두가 거절하였다. 그들은 이미 여든이나 일흔 다섯 살로 살만큼 산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네가….?”
“아버지는 백 년을 살고도 삶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하는데, 전들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그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통해 다른 차원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육체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결국 죽음의 사자는 그를 데려 간 대신 왕에게 백 년의 삶을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백 년 후 사자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왕은 또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백년이라는 세월은 길다고 생각하며 별 걱정 없이 지냈는데…, 사실은 이번에도 저는 제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막 계획을 세워 살아보려고 했는데 벌써 오시다니 이건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후 이런 일이 아홉 번 더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한 명씩 아들을 대신 데려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년을 살았을 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은 어떤가? 다시 다른 아들을 데려갈까?”
“아닙니다. 삶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언제나 미래와 과거에 가 있음으로써 그것을 놓쳐버렸습니다. 저는 삶을 낭비하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저를 데려가십시오.”
왕은 자신의 생각을 신하들에게 받아 적게 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기라고 당부했습니다. “나는 천 년을 살았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미래와 과거에 가 있음으러써 ‘지금, 여기’ 서 살아보지 못했다.”

많은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왕은 그토록 최고의 삶을 살았지만 삶의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면서 기회를 구하고 또 구하며 산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최고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런 삶은 없을까요? 한 번 산 다음에는 아무 미련 없이 저승사자의 요청에 응하게 되는 삶 말입니다. 한 번 산 후에 정말 만족한 삶을 살았다 생각하며 하나님 품에 안기는 삶 말입니다. 곧 후회가 없는 삶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같은 삶을 산 사람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많은 고난을 겪은 슬픔의 선지자입니다. 슬픔 가운데서 기록한 글들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아마 후회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번 같이 살펴가 보겠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난을 주님께 아뢰이고 있습니다. 그냥 아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보고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할까요? 마치 하나님은 자기의 고난을 기억 못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난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처럼 극도로 심한 고난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고난을 기억하실지 안하실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는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 안하시는 것 같으니 자기라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억할 때마다 낙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는 비관의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만 비관적인 사람일까요? 우리 인간은 비관적인 동물이 아닐까요? 저는 지난주 수요여성 공부시간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나이 많으신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어릴 때 기억은 잘 됩니다. 최근 기억은 생각이 잘 안납니다. 그런데 그중에 좋은 것보다 좋지 않은 일들이 더 잘 기억납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분이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니 사람은 자꾸 비관적이 될수밖에요.”
두 분의 대화 가운데서 인생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느껴볼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았던 것보다 좋지 않았던 일들이 더 잘 기억이 나니 얼마나 인생은 슬픈 것입니까? 사람은 비관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비관적인 사람들이 모여 함께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느낄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웃과의 일도, 이웃에게 도움 받았던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 이웃에게 상처를 받은 것은 오래 기억에 남게 되어 있는 비관적 존재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워싱톤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고트먼 교수는 인간이 걸린 이 비관의 병의 일부를 연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금실이 좋은 부부와 그렇지 못한 부부의 차이를 연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금실이 좋은 부부는 나쁜 말 한번을 하면 좋은 말 다섯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가 magic number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1:5라고 하지만 어떤 학자는 1:9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홉번 긍정적인 말을 들어야지 한번의 부정적인 말을 상쇄시킨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병자들끼리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예레미야는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인생의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자신이 걸린 비관의 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알면 그것이 행복의 시작이 되는 거죠. 병이 걸린 것을 알면 치료가 시작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시작을 맛보게 되는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저는 이병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 병에 걸려 있습니다. 다행히 이 병에 걸려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비관의 병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병을 더 독종으로 만드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받는 것은 나쁜 것만 기억하지만 남에게 해준 것은 좋은 것만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남에게 잘 못해 준것은 잊어버립니다. 잘 해준 것만 기억합니다. 이것은 더 큰 병이죠. 더 고치기 어려운 병이죠. 어떻게 보면 신비스러운 병입니다. 신비스러운 병일수록 고칠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 두가지 병이 엉켜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희망이…. 알아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hopeless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희망이 없나요? 이 병에 걸려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실 예레미야도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료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저는 요즘 개정개역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개역성경은 좀더 멋지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개역성경은 멋지긴 해도 의역입니다. 개정개역판이 좀더 본문에 가깝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is’가 나옵니다. ‘이것을’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죠? 고초와 재난일까요? 고초와 재난은 이미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낙심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봐서 고초와 재난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한국의 삼행시가 있는데 삼행시란 첫 세 글자를 따라서 시를 쓰는 것 아닙니까? 이예레미야애가서는 삼행시는 아니지만 약간 비슷합니다. 알파벳을 따라서 쓴 글입니다. 곧 19절 20절 21절은 가령 S로 시작하고 있다면 그 다음 세 절은 T로 시작하고 그 다음은 U로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저자는 S로 시작해야 하는데 도저히 찾고 찾다 못 찾아서 ‘이것을’로 시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곧 ‘이것은’을 글자를 맞추기 위해 그냥 넣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개역성경 번역자가 “중심에 회상한즉”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저자의 치료법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아니면 “중심에 회상한즉” 이 둘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묘약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묘약을 쓰니깐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적인 상황에 이 묘약을 쓰니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망으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저자는 무척 신비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에 들어 갔다가 나왔더니 절망적 상황이 소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치료법이 무엇이었는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요, 계속 저자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그는 무궁무진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체험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아침마다 새롭게 체험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recipe로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신비스러운 맛을 가지고 찾아 오십니다.
Yellowstone park에 Teton Mountain이라고 있는데 그 산을 찍는 사진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Teton Mountain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계신데 하물며 우리들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혼을 매일 새로운 축복으로 채우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능히 매일 새로운 것을 주실수 있도록 무궁무진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실히 지키십니다. 결국 저자는 ‘지금 여기’의 삶의 축복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심한 절망 가운데 있던 저자가 ‘지금 여기’의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저자의 특별한 치료법이 무엇이었을까요? 저자가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무엇일까요?
분명히 신비한 치료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병이 워낙 신비하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병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한 것은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을 9배나 더 잘 기억하고 나의 것은 잘한 것을 9배나 잘 기억하는 신비한 병에 걸린 우리들을 치료하려면 정말로 신비한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신비한 치료법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한 치료법에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그 때 절망으로 이르는 병은 사라지고 소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체험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비관의 병은 사라지고야만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누렸던 신비한 치료법은 약 600년후 예수님의 십자가였음이 밝혀집니다. 십자가의 능력임이 밝혀집니다. 예레미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600년전에 이 신비한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치료했던 놀라운 능력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었음을 600년 후에 비로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올 해 사순절 설교 말씀을 통하여 저는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특별히 Julian of Norwich의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어 왔습니다. Julian은 십자가를 통하여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체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십자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십자가는 보지 못했지만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 체험을 통하여 그는 비관의 병에서 해방되고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그의 기쁨과 자신감 앞에서는 무력한 안개가 되었습니다.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비관의 병은 사라졌습니다. 비관의 병은 기쁨과 자신감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십자가를 보지도 못했지만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았읍니다. 그러니 더욱 마음껏 이 신비한 능력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기쁨과 자신감이 없이 산 사람은 순수히 저 세상으로 따라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최고의 축복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삶의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기쁨과 자신감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살고 또 살고 또 살고 싶어합니다. 한번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최고의 삶을 누린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만 누릴수가 없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찾아 갑니다. 상처난 자들을 위로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모든 일이 기쁘고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순절 넷째 주일로 지킵니다. 사순절은 십자가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절망의 질병을 치료받는 절기입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가는 절기입니다. 먼저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들의 고질적인 병을 고치십시다. 왜 우리는 열번쯤 좋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한두번 실망하면 실망 가운데 늘 젖어있습니까? 왜 우리는 이웃에게 못해준 것은 기억안 하고 잘 해준 것만 기억하면 절망 가운데 살아 갑니까? 이웃에게 당한 고초와 재난이 생각이 나면 십자가 앞에 나아오십시다. 내가 이웃에게 잘 해준 것만 기억이 나면 십자가 앞에 나아 오십시다. 놀라운 체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두려움과 걱정 가장 연약한 모습을 십자가의 주님께 내려 놓으십니다. 우리들의 비관의 병을 내려 놓으십시다.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은 9번 나쁜 소리를 들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나쁜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자신감의 사람이 됩니다. 본인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신비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한 마디 말로도 절망에 치달았지만 이젠 어떤 말을 들어도 소망으로 치닫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 노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미시간 어느 도시에 Huizinga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행사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왔는데 집은 다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이웃들은 함께 모여서 잿더미 속에서 무엇을 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잿더미 속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만족: 만족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금 여기의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을 이미 마련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이 멧세지를 가슴에 받고 다시금 일어섭니다. 그런데 아무나 종이 한 장에 쓰여 있다고 믿고 일어설수 있나요?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들의 병이 나음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일어섭니다.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더 큰 소망을 가지고….

교우 여러분,
우리도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십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보내신 종이를 꼭 가슴에 간직하십시다.
“만족: 만족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금 여기의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을 이미 마련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들은 늘 만족한 삶을 살아 갑니다. 기쁨과 자신감의 사람만이 이웃을 위해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족한 마음으로 이 쪽지를 가지고 절망중에 있는 분들을 찾아가십시다.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십시다.
우리가 찾아간 이웃과 함께 시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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