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1.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2): 승리의 빛
성경본문 : 이사야 60:1절, 로마서 8:31-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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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사막을 건너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의 모래 언덕만 나올 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모래 바람은 쉬지 않고 계속 불어왔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젊은이의 발걸음은 천근과도 같았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젊은이의 몸과 마음은 마른 낙타풀처럼 바짝 말라 갔습니다.
“아, 엄마가 보고 싶구나.”
젊은이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래 언덕에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낙타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젊은이 앞에 무릎을 굽히며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힘을 내서 일어나 내 등에 타게.”
젊은이는 낙타 등에 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낙타 등에 탈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일어나 한 걸음 내딛다가 그대로 쓰러질 뿐이었습니다.
“젊은이여, 저기 멀지 않는 곳에 오아시스가 있네. 거기로 가게.”
젊은이는 눈을 들어 낙타가 말한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낙타의 말대로 정말 멀리 푸른 숲이 보이고 사람인 듯 검은 점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젊은이는 그곳을 향해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거의 기어가다시피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다가가면 갈수록 그곳은 오아시스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젊은이는 이제 살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젊은이의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이 사막 한복판에 오아시스가 있을까. 낙타가 괜히 한 말이 아니었을까. 이 황막한 사막 어디에 샘이 있고 숲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분명 내가 신기루를 보고 있는 걸 거야.’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젊은이는 다시 뜨거운 모래밭에 쓰러져 한 발자국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자 젊은이는 혹시 자기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혹시 진짜 오아시스인지도 몰라. 낙타가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겠어. 아마 내가 잘못 생각한 걸 거야. 빨리 일어나서 가야 해.’
젊은이는 비록 기진맥진한 몸이었지만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다시 그곳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요. 드디어 커다란 야자수 잎과 푸른 풀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샘도 보였습니다. 낙타가 말한 오아시스가 바로 눈앞의 현실 속에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마음속에 한번 일기 시작한 의구심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에 어떻게 맑은 샘물이 솟아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분명 환상이야. 빨리 이 환상에서 깨어나야 해.’
젊은이는 환상에서 깨어나려고 머리를 뒤흔들고 눈을 비볐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맑고 시원한 물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아, 이번에는 환청까지!’
젊은이는 환청의 물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귀를 틀어 막았습니다. 그래도 물소리는 계속 들려왔습니다. 젊은이는 아예 자신의 머리를 모래 구덩이 속에 힘껏 쳐박아 버렸습니다. 그 뒤 낙타를 끌고 온 두 명의 상인이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샘터에 왔다가 양손을 샘가에 축 늘어뜨린 채 죽어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이 젊은이가 왜 여기에 와서 죽어 있나? 여기까지 와서 목이 말라 죽어 있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상인 중 한 명이 참으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의 상인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그건 말이야, 이 젊은이가 현대인이기 때문이야.”
한국의 시인 정호승씨의 ‘현대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오아시스에 왔어도 오아시스가 보여도 오아시스의 물소리가 들려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의구심은 결국 오아시스 앞에서 오아시스의 물도 맛보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했습니다.
오늘 저희는 2011년의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2011이라는 오아시스에서 두 번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아시스의 모든 축복을 맛보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어떤 분들은 오아시스 앞에서 눈도 가리고 귀도 가리고 “2011은 신기루에 불과해” 생각하시면서 예배를 드리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드신 2011 년인데, 하나님께서 오아시스로 당연히 만드시지 않으셨을까요? 현대인이 되지 마십시다. 그리고 2011 년이라는 오아시스를 마음껏 누리십시다. 그러면 어떤 분들이 올 해도 축복된 오아시스를 누리시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루를 살아도 오아시스로 산 사도바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올 해도 우리를 위해 오아시스를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라는 뜻의 말씀인줄 압니다. 이것이 올 한 해를 오아시스로 누리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일줄 압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오아시스를 그 누구도 빼앗아 갈수 없다는 확신의 소유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2011이라는 오아시스를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오아시스에 막 들어 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시는 2011이라는 오아시스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들어 와 있는 오아시스2011은…?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첫 번째로 이 오아시스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여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1년간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새해 벽두에 먼저 1년간 언제나 함께 하실 예수님을 상상하십시다. 그리고 미리 주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주님은 기쁨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여주시면서 또한 이 세상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또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간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보십시다. 우리 앞에 펼쳐진 2011이라는 오아시스를 보십시다. 결코 신기루가 아닙니다. 이 오아시스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현대인들은 눈앞의 오아시스를 보지 못할까요? 아니 왜 안 보려고 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이 이해가 갑니다. 눈을 비비며 눈앞의 오아시스를 보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시카고의 성폭행 방지상담소에서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병원 원목이 조사를 해보니 성폭행을 당해 입원한 중증 환자들의 상당수가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원목이 좀 더 세심하게 조사를 해보니 놀랍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내가 성폭행 같은 고통을 당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폭행을 당해도 기독교인들이 더 중증 환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보고였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과연 눈앞에 보이는 오아시스를 볼 수 있었을까요?
반면 사도바울이 오아시스를 체험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사도바울은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오아시스에서는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음성은 바로 ‘너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것이 2011년도라는 오아시스에서 들리는 놀라운 축복의 음성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너희는 의로운 자가 되었으니 마음껏 오아시스 2011을 누려라.”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시대에도 이를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들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귀에 안 들리는데 당신의 귀에만 들린다는 말이요. 당신 환청을 듣는 것 아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환청이 아닌 것을 주장합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면 오아시스 2011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리해 볼까요? 세 가지는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필요한 것들이 채워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너는 의롭다”하시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외에 또 없을까요? 35, 36절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오아시스2011에 위의 세 가지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려운 일도 함께 일어 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겪기 원하지 않으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빨리 천국행하는 길뿐입니다. 그러나 천국행 안해도 괜찮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어떠한 일도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2011년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통쾌하게 이길 것입니다. 얼마 전 정주영씨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오아시스2011을 맞이하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무작정 가출하여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 강을 만났습니다. 강 한가운데 배는 있었지만 배삯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두어 시간 망설이다가 무작정 배를 탔습니다. 당연히 사공에게 혼이 났습니다. 따귀를 몇 대 올려붙인 뱃사공이 얼얼해진 뺨을 문지르고 있는 소년 정주영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저지른 행동이 후회되지?”
“네.”
“후회될 짓을 왜 해. 이놈아!”
“뺨 맞은 게 후회되는 게 아니고요. 뺨 한 대에 배 한번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진작 탈 걸, 두 시간 동안이나 허비한 게 아까워서 그래요.”
뺨 한대가 현대그룹을 만든 것입니다.
오아시스 2011 안에 어려운 일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없습니다. 한편 넉넉히 이김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을 축복의 오아시스 2011에 마음껏 던지십시다. 넉넉히 이기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가끔 뺨 한대 맞으십시다.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뺨을 맞을 때 그것을 보신 후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늘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때다 하시고 더 큰 축복으로 나려주십니다. 그러니 함께 웃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축복을 누리십시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오아시스2011을 소유하게될 줄 압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오아시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저희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마련된 오아시스2011은 무엇일까요? 지난주 설교 말씀을 통해 저희 교회 올해 표어를 말씀드렸습니다. 곧 저희 교회 오아시스2011의 표어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 시간 다시 자세히 반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빛을 주셨습니다. 특히 ECC 완공과 더불어 자녀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함께 말씀을 나눌 때 우리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빛으로 어디를 비추어야 할까요? 어디에 비추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ECC를 허락하셨겠습니까? ECC는 그야말로 Education Community Center가 아닙니까? 우리의 빛이 Brookline Community에 비쳐져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해외선교를 잘 해 왔고 계속 잘해야 합니다. 부족했던 것은 국내선교입니다. 이러한 빛을 비추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건물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성경공부를 통해 말씀으로 불이 붙은 후 그 불로 Brookline을 불붙이십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ECC를 허락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ECC를 주셨습니다. ECC는 신기루가 아닙니다. 우리들 앞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ECC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산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제 ECC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Brookline 주민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에 말씀으로 받은 빛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ECC를 통해서 브루크라인 주민들에게 전하십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B40.’ Brookline주민의 40%가 복음을 믿게 되는 때까지 주민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꿈인 ‘B40’가 이뤄지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 여러 부서를 통해서 이 일이 진행될텐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서 KCB오아시스 2011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빛을 부르크라인에 발하십시다. 우리는 부르크라인의 오아시스가 되어 갈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주 말씀 중에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말씀을 들고 본국으로 향하는 에스라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였었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들고 본국으로 향할 때 일어난 놀라운 일이 에스라서 7장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에스라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 페르샤의 왕 아닥사스다왕이 에스라의 본국으로 향하는 일을 돕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포로가 귀환하는데 왕이 돕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기 나라에서 은과 금을 가져가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게 합니다. 재정적으로 에스라를 도운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땅 근처에 있는 모든 창고지기에게 명령하여 에스라가 구하는 모든 것을 신속히 하라고 합니다. 또한 에스라의 가르침에 모두가 순종할 것까지 명령합니다.
에스라는 오아시스를 체험한 것입니다. 페르샤 왕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앞장서서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고 가는 에스라를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수요여성성경공부에서 함께 나눈 내용이었는데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Brookline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무엇을 동원해서도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왕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채워진 후에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그래서 한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반면 에스라가 체험한 것은 복음을 전하려 하니 하나님께서 페르샤 왕을 사용하셔서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ECC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때로는 세상왕들을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KCB오아시스2011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 저기 어려움이 올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주영소년이 뺨 맞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각자 개인의 오아시스2011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KCB오아시스2011을 함께 누리십시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