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11.1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경본문 : 로마서 1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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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돌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어느 분이 소개했습니다. 어느날 신문 광고에 아버지를 판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광고에는 아버지는 지금 노령이고 몸이 편치 않아서 일금 일십 만원이면 아버지를 팔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광고를 바라보고 혀를 끌끌차며 “세상이 말세다” 라고 하는 이도 있었고, 다 늙은 할아버지를 누가 사겠냐고 쑥덕거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 광고를 보고 부모 없는 설움을 지녔던 한 부부가 새벽같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대문 앞에서 옷차림을 가다듬은 부부는 심호흡을 머금고 초인종을 누릅니다. 넓은 정원에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던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습니다. 부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문광고를 보고 달려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할아버지가 웃음을 지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합니다. 그곳은 아주 부잣집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파시겠다는 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또박또박 뚜렷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음을 지으시더니 “내가 잘 아는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 할아버지를 왜 사려고…” 젊은 부부는 모두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다 결혼했기 때문에 부모 없는 설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아프거나 집안이 어렵지 않은 가정이라면 누가 아버지를 팔겠다고 광고를 내겠느냐고…. 비록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적은 가운데서도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들에게도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싶어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이들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달라고 합니다. 젊은 부부는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담은 흰 봉투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내어 놓습니다. 할아버지는 돈 봉투를 받아들고 나서 그 할아버지도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일주일 후에 다시 이곳을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젊은 부부는 다시금 그 집을 찾아 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어서 오게나, 나의 아들과 며느리야” 하시면서 “사실 내가 너희에게 팔렸으니응당 내가 너희들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너희가 이 집으로 식구를 데려 오너라”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란 부부는 양자를 데려오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이 돈만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저희에게 아버지로 팔렸으면 저희를 따라 가셔야지요, 비록 저희들은 넉넉하게 살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있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진정 흐뭇한 마음으로 “너희는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다. 너희가 부모를 섬기러 왔으니 진정 내 아들이다. 그러하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곧 너희 것이며 너희는 나로 인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복을 불러들인 것이다” 하시고는 기뻐하시면서 자식들의 절을 받았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현 세대를 통감하면서 어느 분이 만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픽션이던 논픽션이던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팝니다”라는 광고 안에 놀라운 축복이 있음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우스운 광고 안에 놀라운 축복을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지혜로운 자들이 될까요?
오늘은 부부청년부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부부청년부 회원뿐 아니라 전 교우님들이 이러한 삶을 사시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러한 지혜로운 삶의 길은 어떤 길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지혜로운 삶의 가장 큰 원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크리스챤의 삶 전체가 하나의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이 한 시간의 예배가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삶 전체가 하나의 영적 예배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보게 하는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사실 이 편지를 처음 받는 로마 교인들에게는 쇼킹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으로 예배는 다 마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아니 매시간 시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성전은 단 한 곳 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만 참 예배와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온 땅이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는 금과 은으로 된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게 됩니다. 요즘은 흙으로 된 성전에 거하고 있는 차이뿐입니다. 그런데 흙으로 된 성전 안에서 우리는 금과 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지혜로운 삶을 산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가 바로 제단에 바쳐지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성전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는 산 제물로 살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산 제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영적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은 어떤 삶인가요?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절 말씀을 뒤로부터 거꾸로 해석해 올라가 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기본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일까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드리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2절 말씀 다시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의 현상이 아닙니다. 변화의 열매입니다. ‘나는 지난 일 년동안 변화된 경험이 없다’ 생각되시면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변화의 경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저희 장모님이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지난주에 장모님께서 간증문을 쓰셔서 한국으로 보내셨는데 저도 읽게 해주셔서 아주 은혜롭게 읽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주일예배 수요일밤 예배, 새벽기도, 금식기도 등, 교회생활을 존중하였고,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되어, 나 혼자 결정해서 지키게 된 하나님의 뜻은 양심이 명하는 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엄격하고 무서운 여성이 되었다. 한편, 완전할 수 없다는 죄책감에 노이로제 환자같이 늘 시달리며 지냈다. 이대 학생 때 함석헌 선생님이 “왜 늘 꾸부리고 다녀? 죄책감은 없어야 해.” 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이해가 안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착한 기독교인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나름 착한 삶을 추구하며 1/4후퇴 때죽음의 행렬에 끼어 탈북한 친척들을 돕느라고 내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지 못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중략합니다. 그 후 기회가 되어서 성경을 열심히 읽게 되셨는데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다음 날 1973년 1월31일 오후 3시경 로마서 3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인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이라고 늘 가볍게 지나가던 곳인데 그 날은 이상했다. 내 마음 깊은 곳, 어두운 진흙탕 같은 구석에 그 모든 죄들이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류의 무리 속에 내가 있었다. 지금껏 나는 그들과 관계가 전혀 없는 유아독존이었는데! 그리고 23, 24절까지 왔을 때 갑자기 빛이 비추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바로 이 날 장인어른께서 퇴근하시면서 하신 첫 마디가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레이트 트랜스포메이션(Great transformation).” 뭔가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변화되는 체험 없이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만 변화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맡아놓은 당상인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변화는 처음으로 말씀 안에서 복음을 접했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바로 저의 장모님이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번만 일어나면 됩니다. 두 번째 변화가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변화에 대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는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첫 번째 변화는 말씀 앞에서 단번에 이뤄집니다. 그러나 두 번째 변화는 세상과의 싸움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첫 변화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변화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계속 변화하여야 합니다. 계속 변화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어느 젊은 교우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 교우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 교우님은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부유한 타운에 사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부유한 타운에 사는 한 애로점을 들었는데,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쉬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많은 애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유대인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려면 주일을 자주 빠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이 젊은 교우님도 자녀를 두신 분인데 그 말을 듣고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주일을 빠질 수 밖에 없게 되는 환경에서는 안 살리라.”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부유한 곳에서 안 살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실까요? 이러한 자들은 늘 변화를 받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의 열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들은 무릎 꿇고 기도만 하면 그 때 그 때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광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삶입니다. 지혜로운 삶입니다. 영적 예배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혼자서 감당하려다가 이 세상 파도에 쉽게 휩싸이곤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할까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어느 마을에 토네이도(tornado) 가 들이닥쳤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어린 학생들이 있는 학교에 들이닥쳤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손에 손을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토네이도로 인해 학교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들려 올려지는 곳에 가 섭니다. 그곳이 내려 안습니다. 또 다른 구석이 들려 올려지려고 합니다. 함께 그 구석으로 몰려가 섭니다. 다시 내려 앉습니다. 1시간 그 싸움을 한 후 무사히 전 학생들이 학교와 함께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힘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는 몰려오는 이 세대에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세대라는 거대한 토네이도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는 자들이 함께 손에 손을 잡을 때 능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혼자서 이 세대를 이긴다 생각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그 분이야말로 전형적인 이 세대의 희생자입니다. 개인주의라는 이세대의 거대한 토네이도의 희생자입니다.
그러기에 청년부부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역이 있고 최근에는 성인성경공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혼자서 성경을 아무리 깨달으려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대를 이기는 힘은 공동체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부부청년부 회원 여러분,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이 세대라는 토네이도를 이기십시다. 토네이도를 이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지혜를 깨달을 것입니다. 체험할 것입니다.
오늘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리는 만큼 다음의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거두겠습니다.
폴리네시아 섬에서는 결혼을 할 때 전통적으로 신랑이 신부 부모에게 선물을 보낸다고 합니다. 대개 돼지나 닭, 앵무새나 작은 동물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에게 장가가려면 집안에서 가장 아끼는 소를 보내야 합니다. 그 섬에 혼기가 꼭 찬 여성이 있었습니다. 딱히 내세울 게 없었기에 선물이라고 해봐야 거위나 닭 한 마리 정도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구혼자가 나타나더니 소 열 마리를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온 동네가 뒤집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아주 멍청하거나 돈이 무척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취한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힘을 발휘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그 여자는 ‘황소 열 마리짜리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습니다. 그 덕에 그녀는 ‘나는 황소 열 마리짜리 여자’라는 으쓱함에 자신 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그 지위에 맞게 말과 행동에 조신하고 옷차림까지 신경썼습니다. 별 볼일 없던 섬 처녀가 우아한 여성이 된 것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여성을 아내로 맞은 남자를 부러워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자신을 귀하게 여겨 준 것을 감사하며 그에게 보답했습니다. 상대방이 그녀를 높여주고 존중해 준 만큼 자신을 세워 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황소 열 마리 짜리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 청년은 세상을 본받지 않은 청년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헌신 예배를 드리는 청년부부 여러분, 이런 멋진 부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데서 시작됩니다. 거기에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