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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대사

날짜 : 2010.10.3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스도의 대사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6-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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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어령 교수님에 대해서 한번 소개해 드렸었습니다. 그분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펴 내셨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제목의 글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무지개의 빛깔은 몇개인가?’
교우 여러분도 한번 이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지개의 빛깔은 몇개인가?’ 이에 대해 이 교수님은 역사적으로 무지개 빛깔이 몇 개였는지 설명합니다. 요약해드리면, 희랍의 철학가 크세노폰과 천하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색깔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세네카는 다섯 색깔이라고 보았고, 한동안 서양 문화권에서는 대체로 6색으로 생각되어왔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의 가수 패티김은 “오색 무지개”라는 노래를 불렀고, 아프리카의 어느 민족에게는 모든 색을 청색계와 황색계의 둘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곧 이 어령 교수님의 주장은 무지개의 색깔은 우리가 생각하는 7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7개라고 교육 받아 온 것뿐입니다. 그러면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해서 7개 색깔로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이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당신의 생각을 펼쳐 갑니다.
“뉴턴이 처음으로 스펙트럼을 통해 무지개 색깔이 나타나자 일곱 색으로 분절하여 이름을 붙여 발표한데서 7색으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조수에게 “나는 일곱 색으로 보이는데 너는 어떻게 보이는가”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자의적으로 붙여진 색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인데도 뉴턴의 말을 과학이라고 믿고 오늘날 세계의 어린이들은 과학시간에 스펙트럼 실험을 하면서도 무지개는 7개 색이라고 외우고 있지요.”
당시 최고의 과학자 뉴턴이 7개라고 해서 7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또 생깁니다. 왜 뉴턴은 7개로 보았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바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7일 만에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도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일곱 요일로 나뉘어져 있고 음도 도레미파솔 라 시의 칠 음계로 분할되어 있어요.”
이어령 교수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문화의 틀 안에서 모든 사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이라는 숫자가 어느덧 문화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종교 개혁은 한 마디로 진리를 진리의 자리에 다시 서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문화 가운데서 오염되어 있다면 다시 진리와 문화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문화는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두가 지가 늘 혼합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문화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혼동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진리와 문화를 구분하면서 진리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을 따라’라는 표현이 두 번씩이나 나옵니다. 이 ‘육신을 따라’를 ‘내가 속한 문화를 따라’로 바꾸면 더 문장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도 내가 속한 문화에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내가 속한 문화에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이 속한 문화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화의 껍질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곧 종교개혁의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대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진리와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것을 잘 구분하는데서 종교개혁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도 우리의 문화에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한편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자신이 개혁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향해서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보게 됩니다.
얼마 전 인터넷뉴스에 보니, 아마존 열대림에서 지난 10년간 1,200개의 새로운 동식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3일에 한 피조물 종자가 탄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주에도 최소한 두 종자가 아마존에서 탄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존 열대림에서만…. 그러면 아마존이 아닌 다른 곳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새로운 종자가 탄생되겠습니까? 얼마나 경이스럽습니까?
왜 아마존은 이처럼 수많은 새로운 피조물을 탄생시키고 있겠습니까? 아마존은 어떤 문화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넓게 열려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문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이스러운 일들이 매주 펼쳐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존은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문화에 매여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없이 교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교우 여러분, 참 종교개혁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이웃을 새로운 피조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웃 안에 펼쳐질 수많은 아름다운 것을 보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이웃을 새로운 피조물로 보기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요? 18절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웃을 새로운 피조물로 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이웃과 화목하게 되어집니다. 곧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습니다. 19절 말씀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집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지당한 말씀입니다. 문제는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참고 화목의 말씀을 전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화목의 말씀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본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까요?”
사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잘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의 죄를 고발하곤 하였던 것이 고린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 파가 있었습니다. 1:12절에 네 파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게바파 -게바는 베드로의 본명입니다-곧 베드로파, 마지막으로 바울파. 초대교회 시절에 이처럼 네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각 파마다 자기네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문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상한 문화로 인해서 진리가 고난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보다 자기들의 문화가 더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지개 색깔이 7개 6개 5개 4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파가 되어 싸우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무지개 색깔이 몇개인지 모른다는 사람과는 화목할 수 있지만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화목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한편 다음의 이야기가 고린도 교회의 일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진리와 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합니다.

레오날드 스윗(Leonard Sweet)이라는 드류(Drew) 대학교 교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비행장 어느 가게에서 프레츨을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버터를 바르지 않고 그냥 프레츨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점원이 하는 말,
“미안합니다만, 우리는 버터를 바르지 않는 프레츨은 팔지 않습니다.” 교수는 말합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오븐에서 꺼낸 프레츨을 그냥 주세요. 버터에 담그지는 마세요. 돈은 다 낼 테니까요.” 종업원은 대답합니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버터를 바르지 않는 프레츨은 팔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보다 좋은 곳에서도 버터 없는 프레츨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투지 맙시다. 이렇게 합시다. 자, 여기 5달러를 드릴게요. 거의 세 배의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거스름돈은 가지세요. 그냥 버터 바르지 않은 프레츨 하나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되겠죠?”
“미안합니다. 우리는 버터 없는 프레츨은 팔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버터 없는 부드러운 프레츨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그렇게는 팔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해 봅시다. 내가 버터에 담그지 않은 프레츨을 원하기 때문에 그 가격의 세 배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는데도 그까짓 프레츨 하나를 못 팔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버터 없는 프레츨은 팔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교수님은 프레츨을 사지 못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버터를 바르지 않은 프레츨은 상상할 수 없는 종업원으로 인해 세배에 돈을 낸데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비행기에 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21세기 교회에도 일어납니다. 내 식으로 하지 않으면 참 신앙인의 삶이 아니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파가 갈라집니다. 이것이 예배형식일수도 있고 교육 선교프로그램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선교 때문에 교회가 갈라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파가 갈린 교우들에게, 서로서로 무지개 색깔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할까요?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어떻게 보면 우문 현답 같습니다. 아니 현문우답 같습니다. 문제가 무언지 파악해서 빨리 고쳐나가야 하는데, 무지개의 색깔이 여러 가지가 되는 이유를 잘 성명하여야 하는데, 사도바울은 도리어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씀합니다.
저 같으면 ‘너희 그리스도파의 문제는 이거야 이것을 고쳐. 아볼로파 너희의 문제는 이거야 이것을 고쳐, 너희의 문제는 문화적 편견이야….’ 이렇게 각 파의 문제를 고쳐 나가야 하는데 각파의 문제는 두리뭉실 모른척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왜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도바울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파가 생긴 것은 문제이죠. 그러나 각 파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안에서 숨겨진 좋은 것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문화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 분석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츨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스윗 교수님은 프레츨을 파는 종업원을 한심하게 보았습니다. 자기의 문화 속에 빠져서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사도바울은 다르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프레츨에 버터를 바르지 않고는 팔수 없다는 사고방식에서 위대한 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멋지지 않습니까? 세 배를 주고 남은 거스름돈을 그냥 준데도 “No, No. 프렛츨에는 버터를 바르지 않고는 못 팝니다.” 이 사람은 전형적인 자기 문화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4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모습 안에서 또 멋진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위대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시키지만 그래도 자기의 문화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도 위대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다르게 표현하면 “너희 안에 있는 멋진 모습 내가 존경하노라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다면 더 멋진 꽃이 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화적 편견 안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곧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가르켜 주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각기 문화에 대한 애착을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Let us begin anew again.”(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가 문화에 많이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그동안 쌓아왔던 문화적인 편견은 다 벗어 버리고 진리만 남기고 그 진리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진리로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그동안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더 멋진 꽃이 필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진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네 파로 안 갈라진 것 보다 더 멋진 결과를 가져 올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진리를 다시 마음 속 깊이 받아드리면 기가 막힌 피조물이 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 종교개혁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문화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를수록 우리는 자주자주 한 가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함께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삶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길만이 복잡한 문화 속에서 진리를 고수하는 길입니다. 이 때 우리는 새로와질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먼저 각자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시작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어령 교수는 ‘무지개의 빛깔은 몇 개인가?’라는 글을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내가 그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은 다른 종교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와 유교는 어렸을 때부터 내 몸안에 배어 있는 혈액형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다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내 가족 내 민족 내 국가를 뛰어넘는 이웃의 사랑,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에게는 결핍되어 있었기에 비로서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이 없는 죄인이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인됨이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파를 나뉘게 하는 죄인됨이 또한 진리를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지 않을까요? 결국 그는 파를 나누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과 화목하세요” 말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는 21세기의 종교개혁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사도바울의 고백을 하십시다. 그리고 최고의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십시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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