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9.1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성경본문 : 요한 1서 4장 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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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라는 분의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나의 교회여, 얼마나 내가 당신을 비난했는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당신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괴롭혔는지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당신에게 빚도 많이졌는지!
나는 얼마나 당신이 망하길 바랬는지
그러나 얼마나 당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는지!
나에게 많은 중상모략을 안겨 주었는지
그러나 나에게 거룩함을 알게하였는지!
수없이 많이 나의 영혼이 당신에게 거절당했는지
그러나 그날 밤이면 언제나 나는 그대 품에 안겨 자길 기도하였는지!“
초신자분들에게는 좀 소화하시기 어려운 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에게는 많은 도전과 아울러 공감 내지 감탄을 자아내는 글일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말로 표현될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말로 표현될수 있다는 사실에 깊게 감탄하셨을줄 압니다. 다시 한번 읽어 드릴까요?
“나의 교회여, 얼마나 내가 당신을 비난했는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당신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괴롭혔는지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당신에게 빚도 많이졌는지!
나는 얼마나 당신이 망하길 바랬는지
그러나 얼마나 당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는지!
나에게 많은 중상모략을 안겨 주었는지
그러나 나에게 거룩함을 알게하였는지!
수없이 많이 나의 영혼이 당신에게 거절당했는지
그러나 그날 밤이면 언제나 나는 그대 품에 안겨 자길 기도하였는지!“
오늘 제직 안수 및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저는 오늘 안수 받으시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제직이 되신 분들 아니 언젠가 제직이 되실 모든 분들이 카레토의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교회를 잘 이끌어서 시험에 들지 않는 교회가 되게 하셔야지. 시험 들게 하신 후 카레토의 기도를 하라고만 하시면 됩니까?”
물론 목회자로서 최선을 다해야죠. 그러나 사도요한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제직으로서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사도요한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교회의 상황을 대략 알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의 형제는 교우님을 말합니다. 지금 요한은- 신학자들은 ‘요한 공동체’라고 표현합니다만, 요즘 식으로 하면 교회입니다- 당신이 양육하였거나 양육하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인데도 많은 불협화음이 있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이미 많은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것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입니다. 초대교회에 사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움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신학자들이 생각하기를 두 가지를 크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인종 및 문화적 갈등의 문제입니다. 곧 유대인 크리스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의 인종적 문화적 갈등입니다. 요즘 한국 뉴스를 봐도 한국에 온 이민자들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쉽게 접하게 됩니다. 미국은 물론이구요. 두 번째는 막 초대교회가 시작된만큼 교리로 인해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부터 많은 의심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확신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현대 교회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양상은 다르지만 어쨌건 그 나름대로 많은 갈등을 안고 있었습니다. 교리가 좀 다르거나 인종과 문화가 다르기에 많은 갈등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 교회 같으면 벌써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위대한 힘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인종과 문화의 벽을 넘을뿐더러 교리의 차이도 메꾸어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인종과 문화의 벽 그리고 교리의 차이가 있는 곳에는 늘 아픔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물론 요한 공동체 교회 보다는 인종이나 문화 교리적 차이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차이를 우리는 또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쩔수 없이 비난과 중상모략과 버림당함이 늘 상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 많이 상존하고 있는 교회를 어떻게 섬길까요? 18절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 공동체 교우님들에게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난과 중상모략과 버림당함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이겨내었을까요? 요한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이 당시 사랑하는 자들은 바로 처음 소개해 드린 카레토의 고백의 주인공들이 되었을 줄 압니다. 카레토의 고백이 바로 이웃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수없이 많이 나의 영혼이 당신에게 거절당했는지,
그러나 그날 밤이면 언제나 나는 그대 품에 안겨 자길 기도하였는지!”
정말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 위대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들이 이러한 고백을 할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교회 안에서 카레토의 고백을 하는 것 정말로 중요합니다. 위대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미 그 누구보다 먼저 카레토의 고백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카레토의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비난과 중상모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놀래지 마십시요. ‘교회는 비난과 중상모략과 거절당함이 있는 곳이다. 아울러 이를 극복하고도 남는 사랑이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보스톤 노인대학에서 저에게 강의를 부탁하시면서 아주 어려운 주제를 주셨습니다. 제목은 “예수는 누구인가?” 보스톤 노인분들이 거의 교회 내지 성당을 다니시는데 물론 불교신자도 좀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늘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왔던 분들에게 한 시간 동안 이 주제로 말씀하라고 할 때는 꼭 목사인 저를 시험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못한다고 할 수는 없죠. 예수가 누군지 모르면서 어떻게 매 주일 예수님을 전합니까? 일단 하겠다고 답변을 해 놓고는 혼자서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어떻게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핵심을 전할수 있을 것인가? 저에게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강의가 시작하자마자 저는 한 마디로 예수가 누구인지 피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슴도치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하면 어린 양 아니면 선한 목자로 연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고슴도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그 말을 듣고 한 분도 자리를 뛰쳐나가신 분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 목사가 무슨 소리하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셨습니다. 사실 신학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교회가 많은 시험과 아픔을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슴도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강의를 즐겨 들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곧 고슴도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슴도치를 사랑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저희 집 앞 집에 18살 난 고양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 집 주인이 장모님께 오시더니 당신 집 고양이에 대해 조심하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자기 고양이에 물려서 두 번이나 병원에 입원하셨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다른 집 고양이를 베이비싵(babysit)해 주었는데 다른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확 물어서 입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고양이와 함께 계속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양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쩌면 그 할머니에게 놀라운 삶의 즐거움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물었고 또 언제 물지 모르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이 위대해 보이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 당시 요한 공동체는 교리와 인종과 문화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비난과 중상모략이 범람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비난과 중상모략이 심할수록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사랑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을 뒤흔드는 교회가 되어 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주위에서는 요한 공동체를 조롱하였을지 모릅니다. “너희가 교회라고 너희 자신을 보아 너희 안에 그토록 비난과 안 좋은 일들이 많은데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그러한 말이 들리면 드릴수록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교우님들에게 사랑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곧 세상을 뒤흔드는 힘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시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카레토의 고백입니다.
당신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괴롭혔는지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당신에게 빚도 많이졌는지!
나에게 많은 중상모략을 안겨 주었는지
그러나 나에게 거룩함을 알게 하였는지!
수없이 많은 나의 영혼이 당신에게 거절당했는지
그러나 그날 밤이면 언제나 나는 구대 품에 안겨 자길 기도하였는지!
한편 카레토는 자신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집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디로 가나?
또다른 교회를 세울까?
그러나 나는 흠이 없는 교회를 세울수 없지. 왜냐하면 그 흠은 바로 나의 흠이니.
만일 내가 교회를 다시 세운다면 그 것은 나의 교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지.
안되지, 나는 이젠 알게 되었지
나의 허물을 그리고 주님을….
카레토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으로 자신의 고백을 마칩니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지. 나의 허물을 그리고 주님을….” 교회의 허물을 통해서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었고 끝내 주님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카레토가 깨달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동안 자기를 비난하는 교우님들이 문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를 향해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자신의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비난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중상모략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난과 자신의 허물이 만났을 때 비로서 비난은 비난이 되어서 자기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비난을 비난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의 허물인 것입니다.
반면 자신의 허물을 본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비난도 사랑으로 받아 드리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비난을 비난으로 보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안수를 받으시는 제직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이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한국의 어느분이 23세의 나이에 군대에서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 한 손을 잃은 처지라 여자 친구에게 쉽게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여자 친구는 한 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여자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
여자 친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병원 근처로 이사를 해서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챙겨주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였습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찾아온 것입니다.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버지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한쪽 팔 없는 남자와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집 나가 재혼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했어요’하며 곁에 있어주기를 원하세요?”
대답이 궁색해진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청년의 마음 속에는 큰 감동이 밀려 왔고,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 주겠다!”
입원해 있는 동안 영문학과로 진학을 결심하고 편입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문장을 세 번 정도 읽기만 해도 외워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 즉 사랑이 강한 집중력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저는 사랑의 위대한 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이처럼 놀라운 기적이 쫓아온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비난과 중상모략을 도리어 사랑으로 갚아 줄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여성 기독교 자가 가운데 조이스 메이어(Joyce Mey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무척 유능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대개 유능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상대적으로 허물이 많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이스 마이어의 남편도 아내가 워낙 똑똑하니까 제대로 기를 못 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마이어가 주로 하는 일이 남편에게 변화되라고 요구하고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비교하니 언제나 답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남편이 변화되었겠습니까? 전혀 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렇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그냥 남편을 누리자.’
그때부터 남편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누리기로 했습니다. 이상한 모습으로 잠을 잘 때도 ‘이렇게도 잘 수 있구나’라고 이해해주고, 코를 골면 ‘박자도 잘 맞추네’라는 식으로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편이 점점 재밌게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이어가 남편을 변화시키지 않으려고 했더니, 오히려 남편이 스스로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다음부터 조이스 마이어는 인생의 모든 것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마이어의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의 허물을 먼저 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 허물을 깨달았을 때 그는 진정 남편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을 진정 사랑했을 때 남편도 변하고 자신은 더욱 큰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앞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때로는 예기치 않게 곤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비난과 중상모략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때 카레토의 고백을 하십시다. 자기를 물어 입원시키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 교우님들을 사랑하십시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것입니다. 서로가 변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상치 못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