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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날짜 : 2010.08.2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성경본문 : 로마서 14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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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 위나라에 애태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못생긴 추남이었으나 웬일인지 두터운 인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를 만나기만 하면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게 되고, 또 여자들까지도 애태타를 보기만 하면 금방 반해 버려 그에게 시집 가기를 애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추남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삶의 철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봄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봄처럼 삶을 산다는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봄이 주는 즐거움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누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봄이 지나 가면 막연히 일 년 후에 올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한 여름철에도 봄의 즐거움을 안고 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가을, 겨울도 물론이고요.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그의 삶이 비록 추남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도 봄의 즐거움으로 아침의 문을 연다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에도 봄의 즐거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포근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따뜻한 봄의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이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야말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문턱에 와 있습니다. 아직은 괜찮지만 잠시 후면 싸늘한 가을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단풍이 저희를 잠시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겨울의 찬 바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보스톤의 그 화려한 봄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가 애태타의 삶의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바로 이 때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도 흔들지 않았던 애태타의 삶의 지혜가 꽃피는 때가 아닐까요? 이 때가 바로 봄의 철학을 소유한 자들의 삶이 화려하게 꽃이 피는 시절이 아니겠습니까? 추우면 추울수록 봄의 철학의 소유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사실 그래서 추남 애태타는 최고의 미남이 되어 간 것 같습니다.
애태타가 이처럼 봄의 즐거움을 안고 살았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부요함을 선사하여주었는데, 우리 크리스챤은 더 멋진 봄의 즐거움을 안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시사철 봄의 즐거움을 소유한 삶은 어떤 삶인지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봄의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1절말씀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사도바울은 봄의 즐거움 무엇인지 소개하기 전에 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것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봄의 즐거움을 잃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입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의견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서 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것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비판’에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한 마디로 신앙의 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간접으로 본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처럼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비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위대한 서신 로마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이 말씀을 읽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렇지 이제는 연약한 자들을 받고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는 결코 비판하지 않아.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이제는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돌립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대부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는 꼭 비판할 것만 비판하지 절대로 이유없이 비판하지 않아.” 아마 이 편지를 직접 읽는 초대교우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2절 3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초대교인들의 급소를 찌르고 있습니다. 소위 믿음이 좋은 초대교인들은 채소만을 먹는 자들을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가만히 있지만 뒤에 가서는 킥킥 웃으면서 말합니다. “저들은 아직도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야 율법에 매여 있어. 그래서 이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해. 아직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의 권능을 알지 못해.”
사도바울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바로 비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근거해서 비판하였는데 그것도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충격 가운데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데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첫 번째 표현이 가슴을 찌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런데 그 남이 누구지요? 하나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하인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율법에 매여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자유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실 텐데 그들을 향하여 이러쿵 저러쿵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인이니 하나님께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기 전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율법에 매여서 생활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의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율법에 매여 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도움이 되니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의 존재를 깨닫고 그들의 행함을 보면 비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로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에 매여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제야 봄의 즐거움을 되찾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사람을 비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무릎을 치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맞았어. 나는 채소를 먹는 사람을 결코 비판하지 않았어, 내가 정말로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거야.” 사실 먹는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있는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이웃을 비판하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날짜를 가지고 이웃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신앙이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더 깊게 체험한 사람들은 안식일 다음날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매여 있는 자들을 늘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매여 있는 자들을 신앙이 없는 자라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사도바울은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왜 일격을 가할까요? 비판, 그것은 신앙의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먹는 것 또 하나는 날짜.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곤 하였습니다. 그로인해 봄의 즐거움을 잃곤 하였습니다.
요즘 현대 교인들에게도 이러한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웃의 신앙을 평가 내지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몇 가지는 쉽게 생각이 나실 줄 압니다. 여러분, 스스로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보고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비판이 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갑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As soon as I get away from people the Presence of God invades me. (사람들에게서 멀어질수록 하나님의 존재는 나에게 깊게 쳐들어 온다.)”
저는 다음과 같이 의역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멀리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는 나에게 더욱 가까워진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존재를 가깝게 느끼기 원하십니까?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비판을 멀리하십시요.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을 침입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웃을 비판하고저 하는 우리들의 본성도 큰 축복입니다. 그 본성을 사용할 때는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본성을 사용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만나십니다. 봄의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남을 비판하지 않고 살고 있는데 왜 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나 궁금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명쾌한 답변을 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비판을 넘어서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침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침입을 당한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물론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모습입니다. ‘오, 나 오늘 아무도 비판 안 했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구나’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판할 시간이 없도록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남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은 이웃도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비록 먹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다를지라도 어떤 날을 더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좀 이상해 보일지라도 그들도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두 주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존재의 침입을 받은 곧 봄의 즐거움 가운데 사는 사람의 노래입니다.
남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아울러 남들도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들은 봄의 즐거움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책을 접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Cat & Dog Theology(고야이와 개의 신학)’책의 저자는 집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모두 키우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고양이와 강아지의 모습을 통해서 크리스챤의 모습을 재미있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재지(Jazzy)라는 강아지가 있는데 이 강아지는 언제나 꼬리를 열심히 흔듭니다. 금방 강아지의 기분을 알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쓰다듬어주면 정신을 확 잃으면서 꼬리가 빠질 듯이 흔들어댑니다. 반면 심바(Simba)라는 고양이가 있는데 정반대입니다. 고양이는 주인을 본 후 슬며시 와서 얼굴로 다리를 문지릅니다. 아울러 주인이 앉아 있는 의자의 다리에도 문지릅니다. 사람이 와도 절대로 꼬리를 흔드는 적이 없습니다.
재지는 밖에 나가고 싶으면 부엌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짖어댑니다. 문이 열리면 강아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당으로 뛰어 나갑니다. 반면 심바는 나가고 싶으면 문 옆 창가에 서있습니다. 나가길 원하는 것을 보고 문을 열면 고양이는 언제 자기가 나간다고 했느냐는 식으로 자기 자리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밖에만 쳐다봅니다. 잠시 밖을 쳐다보다가는 또 안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자기의 손을 핥습니다. 전혀 안 나갈듯하다가 조용히 천천히 밖으로 나갑니다. 어쩔 수 없이 나간다는듯이….
이처럼 강아지와 고양이를 경험한 후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Dogs have masters, but cats have staff(servants).” 강아지는 주인이 섬기고 있지만 고양이는 하인을 거느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강아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쓰다듬어주고 먹여주고 잠을 재워줍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줍니다.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반면 고양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쓰다듬어 주고 먹여 주고 잠을 재워 줍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줍니다. 나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저자는 Dog theology, Cat theology를 만들어냈습니다. 강아지 신학을 소유한 자들은 말합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사랑해줍니다. 나를 놀랍게 축복합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고양이 신학을 소유한 사람은 말합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놀랍게 축복합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god)입니다.”
한 마디로 강아지 신학과 고양이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강아지는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합니다. 반면 고양이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길 원합니다. 이 둘은 겉으로는 너무 비슷합니다. 찬양도 어떻게 보면 거의 똑 같습니다. 실제로 처음은 똑 같습니다. “당신은 나를 쓰다듬어주고 먹여주고 잠을 재워줍니다. 나를 사랑해줍니다.” 똑 같은 찬양입니다. 마지막에 고양이신자는 이렇게 끝냅니다. “나는 하나님입니다.” 강아지신자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 마음 속 깊숙히 숨겨져 있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봄의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원하십니까? 강아지의 고백을 하십시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드려놓고 나니깐 좀 모순이 되네요. 봄의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서 강아지의 고백을 한다면 그것도 고양이심보가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봄의 즐거움을 원한다면 그것이 바로 고양이 심보가 아니겠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결코 강아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제 아무리 외쳐도 혼자 뒤돌아서서는 “그래도 내가 하나님이지” 중얼거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말 강아지 신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사도바울은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니 가능합니다. 고양이 신자인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다보면 종종 고양이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니 우리 안에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더 힘이 셀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또 함께 계십니다.
저는 저의 모습을 비롯해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은 고양이와 강아지가 이상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발은 고양이 발 꼬리는 강아지 꼬리, 어떤 사람은 발은 강아지 발이지만 꼬리는 고양이 꼬리. 우리 모두의 모습은 제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강아지 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양이 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요? 자기의 발은 강아지 발이긴해도 꼬리는 고양이 꼬리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어진 우리 모습을 안고 주님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온전히 강아지의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이끄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고양이 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웃 안에서도 주님은 끝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고양이처럼 보여도 그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 누구와도 함께 고백할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씀을 거둡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붙들려서 수용소 생활을 하였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가 있습니다. 평화를 찾은지 오랜 시간 후에 어느분이 코리 여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이젠 꾀 나이가 들었을 때였습니다. 코리 여사가 큰 여행 가방을 새로 구입하였습니다. 왜 여행가방을 샀느냐고 물었더니 여사가 대답하기를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앞으로 10년 이상 더 살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여행가방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후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더니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원에서 큰 고통 중에 있는데 다시 그 분이 코리 여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사는 두 번째 천사의 방문을 받은 후였습니다. 두 번째 천사의 말을 전합니다.
천사는 지금의 고통은 감해지지 않고 결국은 이 고통을 안고 소천하게 될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여사는 반항을 하였습니다. 5년이 아직 더 남아 있지 않냐고 반항하였습니다. 천사가 대답하기를 하나님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천사를 보내서 하나님은 여사를 일찍 천국으로 오게하실 의향이 있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사는 큰 결단을 하여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주님 품에 빨리 안기느냐 아니면 심한 고통 가운데 5년을 더 사느냐? 이 때 여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천사에게 하였습니다.
“어느 것이 나의 아버지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나요? 아버지 품에 지금 안기는 것인가요, 5년간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인가요?” 천사는 대답합니다. “5년간 더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여사는 말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합니다.
코리 여사는 고양이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강아지 신자였습니다. 끝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고백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봄의 즐거움은 하늘에서 맛보기로 미룬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봄의 즐거움도 하늘나라 갈 때까지 미루십시다. 주님을 위하여 사십시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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