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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라

날짜 : 2010.07.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축복하라
성경본문 : 로마서 12장 14-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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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070410
제목: 축복하라
본문: 로마서 12: 14-21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 소, 붉은 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 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 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 하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 소와 검은 소에게 가서 또 말합니다.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편이 정말 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 먹었습니다.
함께 힘을 합했을 때는 사자를 이기던 소들이 서로를 믿지 못했을 때 도리어 사자 밥이 되어 가고만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세 마리의 소는 어쩌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되는 것 까지도 괜찮은데 그로 인해 모두가 비참한 운명에 처합니다. 그러면 이 세 마리의 소는 어떻게 하면 사자의 속임수에 안 넘어 갈수 있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납니다. 사자보다 더 똑똑하면 됩니다. 늘 자기들을 잡아먹으려던 사자가 어느 날 친한 척하면서 와서 부드럽게 말을 건넵니다. 이것을 보고 수상히 여겼다면 달리 말해서 소들이 똑똑했다면 잡아먹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쉽지 소는 소이죠. 소가 하루 아침에 IQ가 세 자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 소가 힘을 합해서 머리를 짜내서 이번은 겨우 통과했다고 가정하십시다. 두 번 세 번 계속 사자의 책략을 잡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늘 사자의 책략을 잡아내려고 촉각을 곤두 세워야 합니다. 아주 피곤해집니다. 사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18절 말씀입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럴수록 번뇌와 근심이 많아진다고 고백합니다. 사자보다 더 지혜로와지는 것은 그만큼 번뇌와 근심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보스톤에 살고 있는데 보스톤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 보다 번뇌와 근심이 많습니다. 더 지혜로와지려 하고 더 지식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번뇌와 근심을 더하지 않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최고의 메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축복하라.”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경우를 들어 말씀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처해서도 축복하는 자가 되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축복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과학적으로 머리를 써서 인간을 분석하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심리적으로 인간을 분석하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선언합니다. “축복하라.” 그러면 누구를 축복하라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설명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즐거워 하는 자들과는 함께 즐거워함으로 축복하고 우는 자들과는 함께 움으로 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지 말라.”
지난번 총회에 갔을 때 어느 목사님이 ‘삼척동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삼척동자’가 많다고 하면서 ‘삼척동자’는 ‘아는척, 있는 척, 잘난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삼척동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이웃을 축복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인 것 같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선한 일의 시작이 바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지혜로운 판단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곧 미련한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화목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지식의 평준화입니까? 모두 아는 것이 같아지면 화목할까요? 물론 화목하게 되겠죠, 지식의 평준화가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영적인 체험의 평준화일까요? 영적인 체험이 같을수가 있을까요? 지식의 평준화 없이 영적 체험의 평준화 없이 화목할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축복하라.”

요셉 듀어포스(Joseph Durepos)라는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자기 부인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술을 많이 마시는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감옥에도 여러 차례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또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는 너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남에게 베풀기도 잘 했습니다. 물론 정신이 맑을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목사님 부인은 이 친구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이 왜 이러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목사님 부인은 알게 됩니다.
어릴 때 강도가 집에 들어 왔는데 강도가 이 친구의 부모님을 모두 총으로 쏴 살해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어릴 때의 이 충격이 이 친구로 하여금 술중독이 되게 하였고 감옥생활을 하게 하였고 미혼모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이 여인을 대한 다면 누구나 이 여인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술주정뱅이, 아빠를 모르는 아이의 엄마, 빨간줄(감옥)의 여인 이런 여인과 누가 가까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이력서를 써 가지고 다녀야 할까요? ‘나는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슴.’ 그리고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그 것을 건네주어야 하나요?
우리들의 최고의 이력서가 있습니다. ‘축복’의 이력서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됩니다. 끝으로 사도바울은 최고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9절 이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교우 여러분, 우리들 사이에 원수가 왜 생겨납니까? 첫번째 우화가 우리들에게 귀중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소들이 왜 싸우기 시작했습니까? 사자의 이간질 때문이 아닙니까? 사자가 잡아먹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이에 성공하였습니다. 만일 소들이 사자의 이간질에 속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하면 속지 않았을까요? 다시 그 장면을 소개해 드립니다.
“하루는 사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만일 얼룩소가 다음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얼룩소의 진짜 원수는 사자였습니다. 붉은 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꾼다면 우리들의 진짜 원수는 사탄입니다. 사자가 아니라 사탄입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들의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로 보일뿐입니다. 잠시 원수로 판단될 뿐입니다. 원수로 보이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장본인이 따로 있습니다. 진짜 원수는 사탄입니다. 진짜 원수에게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행한 것은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축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탄의 이간질에 속고 있는 사람들은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진짜 원수는 아닙니다. 사탄은 아닙니다. 잠시 사탄의 속임수에 속을 수는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간질의 시작이 아닙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신 분 계실줄 압니다. “저 사람은 이간질하는 사람이야.” 만일 그 분이 말하는 저 사람이 정말 이간질을 하였다면, 두 사람이 사탄에게 사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분이 말하는 ‘저 사람.’ 또 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을 판단하는 ‘그 분.’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이간질의 사람은 아닙니다. 잠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 간 것뿐입니다.
그러면 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지혜를 짜내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과연 이간질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또 다른 번뇌와 근심을 가져다 줍니다. 단지 “축복하라.”

한편 축복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바뀌어 진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충고와 경고와 협박을 통해서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통해서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곧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어느 아이리쉬 여인이 수양회에 참석하였었는데 축복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어느 청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대화가 점점 재미있게 전개되어서 정거장에 내려서 계속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청년의 친구가 손을 흔들면서 맞은 편 벤치에 앉습니다. 잠시 후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지갑이 없어졌습니다. 두 번째 청년이 슬쩍한 것입니다. 순간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그 날 들은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축복이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 축복이나 해주지.” 몇 초간 축복을 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 청년이 손지갑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 여인은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머리를 짜내서 어떻게든 그 청년을 체포하도록 애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제일 좋은 방법을 택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축복은 IQ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많은 에너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 마음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최근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사를 읽어 가면서 저의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르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소개해 드릴까요? 많은 청년들이 이 노래를 좋아할 줄 압니다. 제목은 “나만 바라봐.” 제목은 어떻게 보면 복음송가 제목이 될 만합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마 Baby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마 Lady
가끔 내가 연락이 없고 술을 마셔도
혹시 내가 다른 어떤 여자와
잠시 눈을 맞춰도 넌 나만 바라봐
내가 이기적이란 걸 난 너무 잘 알아
난 매일 무의미한 시간 속에
이렇게 더럽혀지지만 BABY
너만은 언제나 순수하게 남길 바래
이게 내 진심인걸 널 향한 믿음인걸
죽어도 날 떠나지마.“

어떻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습니다만, 자기가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라는 메세지의 노래입니다. 진짜 차원 높은 노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한편 삼사십년 전 제가 청년시절에는 어떤 노래를 불렀나 생각해 보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은희의 ‘사랑해 당신을.’ 한번 가사를 소개해드릴까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너무 밋밋하죠. 우리 집사람은 태양(가수 이름)이 부른 ‘나만 바라봐’의 가사를 보더니 역정을 내더라구요.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는데,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한국의 어느 큰 교회를 다닌다면서 교회다니는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와서 작사자의 삶의 이력서를 보자 그러겠습니까? 해당 교회 담임 목사님께 문의하겠습니까?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축복하라.’

요즘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재미있는 합창단이 있습니다. ‘불평 합창단’(Choir of Complaints)입니다. 6년 전에 핀란드에 사는 예술가 부부가 생각해 낸 것인데, 이들은 사람들은 많은 불만을 갖고 사는데 이 불만을 좀 더 승화시켜서 좋은 데로 사용할 수 없을까 하는데 착안을 하고 예술가들인 만큼 합창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첫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25개의 합창단이 있습니다.
동경에 까지 합창단이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각자 나라의 해당하는 불평의 제목들을 가지고 가사를 만듭니다. 불평의 마음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얼마나 불평에 굶주렸던지 6년이 못 되어서 전세계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하여튼 각 지역마다 불평의 제목이 다릅니다. 동경 신문에 이 합창단이 소개되었었는데, 일본 사람들의 불평의 가사들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나는 휴일에 일가는 것에 ‘노’를 못한다.” “나의 보스는 자기의 실수를 나의 것으로 만든다.” “나는 삼 개월마다 겁에 질린다. 왜냐하면 나는 삼 개월 계약직원이라서.”
시카고 사람들은 공중 교통 시설에 대한 불평의 가사가 많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좀 철학적인데 “왜 우리는 언제나 불만을 가져야 하는가?” “왜 우리는 사랑은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 계속 사랑하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 불평 합창단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불평을 함께 합창하다 보면 즐거운 마음을 되찾고 웃으며 귀가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을 합니다.
이들 불평 합창단원들이 현재는 아주 만족한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10년, 20년 후 이들의 개인의 삶 가정의 삶 자녀의 삶이 어떻게 될지 연구해 볼만한 것 같습니다.
저는 불평 합창단 웹싸이트를 보다가 그러면 축복 합창단 웹싸이트가 있나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Complaints Choir는 있지만 Blessing Choir는 찾지 못했습니다.
왜 불평 합창단은 있지만 축복 합창단은 없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나름대로 쉽게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들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만을 합창으로 토해내니 아주 시원합니다. 즉시 효과가 있습니다. 직효입니다. 반면 축복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에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축복을 가끔해 보았는데 직효는 커녕 하나마나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점점 그나마 하던 축복도 사라집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자녀를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녀를 한 두 번 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점점 식어 갑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자녀를 축복하기 위해 두 달에 한번 쉐마의 밤을 갖지 않습니까? 만일 쉐마의 밤에 와서 축복할 때마다 자녀들에게 큰 변화가 있는 것을 보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일 예배 보다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반면 불평은 어떻습니까? 불평을 털어 놓았다고 합시다. 얼마나 시원합니까? 계속 불평을 합니다. 불평 합창단을 능가하는 솔리스트가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 한국의 유명한 코메디언인 신상훈 씨의 “유머가 이긴다”라는 책을 보았는데, 사실 요즘 모든 분야에서 유머의 중요성이 각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은 모두가 유머를 잘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유머를 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고 연습해 보라. 아무리 웃기는 얘기도 처음할 때는 불안하다. 자꾸 연습해야 한다. ‘개그 콘서트’에 방송되는 코너들은 적어도 나흘 동안 80번 이상 똑 같이 반복해서 연습한 뒤에 녹화를 한다. 당신이 개그맨도 아닌데, 그들보다 더 연습해야 할 것이 아닌가. 100번씩 연습해라.”
불평보다 유머가 훨씬 어렵지 않습니까? 하물며 축복은 어떻겠습니까? 불평 합창단이 전 세계를 뒤덮기 전에 축복 합창단이 먼저 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축복은 직효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큰 변화를 불러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중 한 사람은 얼룩소 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붉은 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검은 소입니다. 때로는 사자가 와서 우리를 이간질합니다. 거기에 속지 맙시다. 속지 않는 길은 어떤 말을 들어도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축복 합창단이 되어 가십시다. 교회 구석구석을 축복의 노래로 채워 가십시다. 이 축복합창단은 어떤 재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결단만 필요합니다. 그 누구도 축복하겠다는 결단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Yes’하는 자들만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십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우연히 크리스챤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 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표현이 눈에 띄였습니다. ‘킹 오바마 (King Obama).’ 저는 지독한 민주당원이구나 생각하면서 그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지독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공화당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정치적인 관점을 다 피력한 후 자기는 오바마가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총선 결과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기에 이제 자기는 오바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겠노라 선언함으로 글을 마칩니다. 아니 그냥 마치는 것이 아니라, ‘King Obama.’
이 분은 선거 과정에서 여러 후보들이 서로를 향하여 하는 말들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많이 속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간질은 도리어 놀라운 고백 가운데 쓰레기가 되어 버려짐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축복할 때 모든 속임의 말들은 쓰레기가 되어 버려집니다. 사탄의 책략은 쓰레기가 되어 버립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의 책략을 우리의 지성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적 분별력으로도 구분을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있습니다. ‘축복’입니다.
축복을 연습하십시다. 개그맨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십시다. 하루에 백번 축복하십시다. 우리 함께 축복의 합창단원이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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