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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날짜 : 2010.05.2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성경본문 : 다니엘 3장 8-18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00523.wmv

선생님이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워싱톤 D.C.요.”
“D.C.는 무슨 뜻입니까?”
“닷컴?”

닷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D.C.시대에 살고 있다면 우리 부모들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을까요?
사실 DC시대가 열리기 전에 AB시대가 먼저 열렸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DC시대 전을 AB와 BB시대로 나눕니다. AB는 After Book곧 책이 발간되기 시작한 이후와 BB 곧 Before Book책이 발간되기 이전시대가 있었습니다. 1400년도 경 금속활자가 발명됨과 함께 AB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AB시대가 열림과 함께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 가게 된 것입니다. 약 600년간 AB시대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한편 요즘은 AB에서 DC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iPad의 등장과 함께 정말로 책이 필요 없어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쿰란출판사 사장님을 종종 만나면 컴퓨터 때문에 책이 덜 팔린다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곤 하였는데, iPad의 등장과 함께 그분의 고민은 더욱 현실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쿰란출판사 사장님의 고민이 아니라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저처럼 DC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최신 정보를 접하기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iPad으로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곧 나오게 될 줄 압니다.
이러한 복잡한 문화적 소용돌이 가운데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자녀들을 위한 견신예식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사적으로 보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곧 성령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시대에 거하고 있지만 다른 두 문화가 만나고 있습니다. 다른 두 문화가 만나서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두문화의 이름은 AB(After Book)과 DC(Dot Com). 그러면 이 두 문화는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어서 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문화가 다르니 우리는 결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AB와 DC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다니엘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주인공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 금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절을 하지 않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자리 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중요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왕이 세 사람을 불러서 말합니다. 왕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줍니다. 15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이에 세 친구가 대답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 다음 이야기는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세 친구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고 다시 살아서 나옵니다. 왕은 도리어 세 친구를 전 보다 더 높은 지위로 올립니다.

그러나 세 친구가 전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간 것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친구는 AB 와 DC시대에 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참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의 표현에서 강렬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굳은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굳은 의지의 사람들입니다. 이 표현은 느부갓네살 왕의 가슴에 깊이 박혔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고백을 듣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이 박혔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문화와 시대와 인종을 뛰어 넘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언어의 장벽도 사회계층의 장벽도 전혀 장벽이 아닙니다. 장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입니다. 장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장벽을 타고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수 있는 자들입니다. 곧 우리가 AB에 속하던 DC에 속하던 이 고백만 할수 있다면 우리는 한 하나님께 놀라운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 친구는 DC는 물론이거니와 AB시대에 산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BB시대에 산 자들입니다. BB(Before Book)시대입니다. BB시대에 살고 있지만 AB와 DC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위대한 신앙의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신앙의 고백은 BB를 거쳐 AB, 이제는 DC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위대한 신앙은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런 고백을 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때 우리 자녀들은 어떤 장벽도 극복하는 위대한 신앙인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그것은 BB시대니까 가능했지 요즘처럼 DC 시대에도 가능할까?’ 물론 이런 질문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동안 컴퓨터가 인간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이 있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입장에 서 있으신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컴퓨터가 우리들 자녀의 인성 개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됨은 두말할 나위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DC시대에 사는 자녀들은 다니엘의 친구들의 위대한 고백을 하는 찬스가 더욱 적어질까요?

크리스챤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어느 분이 어느 날 2학년된 자녀를 학교에서 픽업하였습니다. 차를 탄 후 묻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벌에 대해서 배웠어요.”
“벌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이 가르치시길 하나님께서 벌을 만드셨고, 침(stinger)은 악마가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좋은 쪽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때로 나쁜데로 사용될 때는 악마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십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이 좋아하는 컴퓨터도 악마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리챠드 에반즈 (Richard Abanes)라는 분이 ‘비디오게임 (Video Game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소개합니다. 한국이 게임왕국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35%의 국민들이 컴퓨터 게임을 한다고 합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수 시간 어떤 사람들은 수 일간 쉬지 않고 게임을 한다고 합니다. 2005년도에 이미 게임 중독자가 만명에 달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명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한 사람은 50시간 계속 게임을 하였고 또 한 사람은 85시간 게임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피해를 본 가족에게는 당연히 컴퓨터는 악마가 만든 작품일줄 압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이런 통계를 가지고 많은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특히 게임이 너무 폭력적이기에 많은 폭력을 조장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Abanes씨는 다음과 같은 통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96년부터 게임판매량이 계속 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 전체의 폭력은 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93년에서 2004년 사이 청소년 폭력은 도리어 줄었다고 합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게임 자체로 인해서 더 나빠진 것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게임이 주는 좋은 효과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요즘 ADD(Attention Deficit Disorder)환자가 많은데 어느 의사는 치료방법으로 비디오게임 테라피 (video-game therapy)를 처방한다고 합니다. 집중력이 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게임이 눈과 손의 coordination (조화)을 개발시키고 뇌에 자극을 주어서 뇌 기능을 개발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락으로는 아주 좋은 효과가 있어서 심신이 피곤할 때 도리어 좋은 쉼을 주기도 하고, 성취감마저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분의 책을 읽으면서 게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오락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오락을 넘어서 어떤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사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크리스챤적인 내용이 담긴 게임들이 많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게임 안에서 우정이 싹트기도 하고 자기를 알아가기도 하고 세상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들어가보지 못했고 언제 들어가게 될지 못할지 알지 못하지만 하여튼 닷컴의 세계는 AB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음을 이 분의 책을 읽으면서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분의 책을 읽기 전에는 컴퓨터는 우리들의 인성에 도움 보다는 해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잠시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이란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쁜 책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책벌레’라고 하면 좋은 의미로 먼저 생각이 드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책벌레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쁜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악마가 만들어 낸 책벌레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이지 책과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AB시대의 사람들은 책을 통하여 멋진 세상을 만났듯이 DC시대의 자녀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멋진 세계를 만나고 또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책과 컴퓨터 앞에 있는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서 컴퓨터와 책의 역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의 컴퓨터를 두 세개 부순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컴퓨터 때문에 자녀가 망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던진 부모 때문에 컴퓨터가 망가집니다. 그것을 던진 부모 때문에 자녀가 망가집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고백하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컴퓨터가 이런 고백을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방해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자녀와 또한 그 부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떤 자녀들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고백하는 자녀가 될까요? 세 친구들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는 한 가지 또렷한 사실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왕께 대답하고 있습니다. 곧 이들은 최고의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세 친구라는 놀라운 축복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혼자서 과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여튼 이들은 이 고백을 하였기에 풀무불 속에 던져집니다. 풀무불 속에서 이들은 최고의 우정을 나눕니다. 불 가운데서 서로 타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서로를 향하여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던 열매를 함께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책이 앞에 놓였든지 컴퓨터가 놓였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그러면 이 세 친구는 어떻게 이처럼 우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위해서 한 가지 제가 추측한 것을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이것을 부모님들에게 배웠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 세 친구의 부모님들은 모두 각자 세 친구를 소유한 부모님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신앙의 친구들을 통하여 늘 서로 격려를 하면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친구들을 보면서 이들도 그러한 친구들을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신앙의 동지가 없을 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백의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는 이러한 고백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고백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우리들의 자녀들도 이 고백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말씀을 거둡니다. 이해인 수녀가 암투병 후 ‘희망은 깨어 있네’라는 시집을 내었습니다. 그 시집에 당신의 친구 두 분을 소개합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입니다. 세 친구가 모두 암이 걸렸고 그 중 이해인 수녀만 남아서 두 분을 애도하는 시를 쓴 것입니다. 한 친구는 김전선이라는 화가이고 또 다른 친구는 제가 종종 인용했던 장영희 교수입니다. ‘김점선에게’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우정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장영희 김점선 이해인
셋이 다 암에 걸린 건
어쩌면 축복이라 말했던 점선

하늘나라에서도
나란히 한 반 하자더니
이제는 둘 다 떠나고
나만 남았네요.”

이해인 수녀가 암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을 일치 않고 도리어 ‘희망은 깨어 있네’ 아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친구들과의 만남이었지 않았을까요? 오늘 견신을 받는 우리들의 자녀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자녀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십시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를 통해서 배울 것입니다.
세 친구의 외침을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그리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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