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0.02.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우물가의 나그네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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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련이라는 한국의 어느 연예인이 쓴 일기를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2016년 12월 5일,
LA에 있는 한 스튜디오 분장실. ‘똑똑’ 하고 누군가 내 분장실 문을 두드렸다. 매니저가 문을 열자마자 우렁차고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Welcome, 혜련 조!”
오 마이 갓! 몰라보게 날씬해진 오프라윈프리가 나를 덥석 끌어안아 주는게 아닌가. 그리고 이곳 LA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며 아직 따끈따끈한 커피를 내게 건넸다. 세상에, 방송 들어가기 전에 대선배인 오프라가 먼저 인사를 하기 위해 직접 내 분장실까지 찾아와 준 거였다. 나는 그녀가 너무도 고맙고 놀랍고 기뻐서 지금 내가 출연하고 있는 미국 시트콤 ‘포유’에서 유행이 된 엉덩이 춤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오프라가 웃으며 자지러졌다. 아차! 부랴부랴 한국에서 가져온 트렁크를 열어 호박고구마를 꺼냈다. 오프라가 다이어트에 대해 고민한다는 보아의 귀띔이 있었다. 다이어트하면 또 호박고구마 아닌가! 소박한 선물에도 아이처럼 좋아하는 오프라가 이게 한국말로 뭐냐고 묻길래 “호박고구마”하고 하자 “호박고구마 너무 좋아요!” 라며 한바탕 춤을 췄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베푸는 것만큼 보람된 것도 없다는 걸 새삼 또 느꼈다. 오프라가 세계 최고의 진행자가 된 데에는 그녀 특유의 마음 씀씀이와 따뜻한 배려가 큰 몫을 했을 거다. 오프라가 진행하는 쇼에 오늘 내가 드디어 출연을 했다.
오늘 출연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86년에 시작해 오늘로 30주년이 되는 오프라쇼에 함께하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출연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 출연이 된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2008년 12월 5일 그러니까 8년 전에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농담 삼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갈 거라고 얘기했던 것이….
조혜련씨가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인 오프라 쇼에 참석한 날 일기를 쓴 것입니다. 대단한 한국인입니다.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는 오프라 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뭐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 연예계를 잘 모르긴 해도 오프라 쇼에 나갈 만한 사람들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분이 오프라 쇼에 출연을 했습니다. 김연아 선수 정도면 당연히 출연해도 남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눈치 채신 분은 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두 군데서 이 일기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날짜입니다. ‘2016년 12월 5일.’ 두 번째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참 신기하게도 2008년 12월 5일 그러니까 8년 전에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농담 삼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갈 거라고 얘기했던 것이….” 2008년에서 8년이 이미 지난 것입니다.
이번 한국 방문 중에 책방에 들렀는데 재미있는 책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조혜련의 미래 일기.’ 이분은 지난 일을 일기에 쓰는 것 이 아니라 앞으로 될 일을 일기를 쓰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여러 가지 서적을 읽고 난 후 미래를 꿈꾸는 자들에게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한 방편으로 미래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을 통해 자신의 삶에 많은 변화를 체험하고는 과감하게 자기의 일기를 책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그 중 한 일기의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오프라윈프리 쇼에 출연하다.’ 2016년 12월 5일이 오프라 쇼의 3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6년하고 몇 개월이 남았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쇼에 누가 출연할지 두고 보십시다. 여러분도 출연하고 싶으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미래일기를 쓰십시요.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또 다른 조혜련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분도 미래 일기를 썼던 분 같습니다. 미래 일기를 쓰지 않고는 이런 축복을 받을리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미래일기를 썼던 분인지 함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나그네가 등장합니다. 예수라는 한 청년입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라는 청년이 사마리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서로 상종을 하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길이 지름길이라 그런지 사마리아를 지나갑니다. 이곳을 지나가다가 한 미래 일기를 쓰는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이 우물가에 혼자 앉으셨고 때는 정오가 되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청년이 떠날 때까지 기다릴 텐데 이 여인은 바빴던 모양입니다. 여인은 청년이 앉아 있는 우물가로 갑니다. 물만 급히 길어서 총총히 집으로 다시 향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은 말합니다.
“물을 좀 달라.” 갑작스런 요청에 당황한 여인은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에 청년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동문서답입니다. 자기에게는 생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떨결에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다르게 표현하면, “당신은 나그네로서 물 길을 그릇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생수를 주겠다는 겁니까?” 여인의 눈에 비친 청년의 모습은 그냥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서 우물에 온 청년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이기에 물 길을 그릇도 없읍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도리어 생수를 준다고 합니다. 생각할수록 청년이 괘씸합니다. 계속 쏘아 붙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여인은 은연 중 자기도 야곱의 자손임을 말합니다. 청년도 지지 않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당돌한 청년은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엄청난 말을 합니다. 야곱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지만 자기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매직 워터(마술의 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의 평생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물가에 오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우물 없이 사는 삶에 젖여 있습니다. 저도 평생 우물을 길어 보지 않고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물물을 늘 길러야만 했던 여인들은 이것이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사마리아 여인은 더 우물을 길으러 오기 싫은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남들이 우물에 오지 않는 대낮에 올리가 없습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우물을 길으러 올 때마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아니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혹시나 이 청년이 자기로 하여금 우물에 오지 않게 하는 마술의 물을 줄수 있지 않나 기대한 것입니다. 이 때 청년은 말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엉겹결에 대답합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우물을 길으러 오기 싫은 그 깊은 이유까지 꿰뚫고 보는 분이었습니다. 여인은 현재 여 섯번째 남자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배우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좀 심합니다. 이 여인은 같은 사마리아 인에게도 경멸을 받고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물에 오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여인은 대답합니다.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것을 보면 분명 선지자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갑자기 선지자가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혼자서 우두커니 물도 마실수 없어서 앉아 있는 유대인 청년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눈 앞에 나타났으면 제일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남편이 여섯이나 있는 또 언제 남편을 바꿀지 모르는 여인이 제일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내 남편은 어떤 남편일까요?” 20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도 놀랐을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예배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궁극적 관심은 예배였습니다. 자기도 언젠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분은 예배에 관한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눕니다. 다음과 같이 신학적 대화가 끝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청년은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때와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참 예배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줍니다. 사마리아인의 아픈 문제를 해결받은 것입니다. 이에 여인은 마지막 자신의 확신을 말합니다. 25, 26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사실 이 여인은 더 큰 관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니 이 여인은 메시야만 오시면 구태여 예루살렘에까지 내려 갈 필요가 없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 속해 있지만 메시야는 자기를 포함한 사마리아 인을 위해서도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놀라운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꿈의 여인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당신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미래 일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에는 조혜련씨 처럼 미래일기를 썼던 사람이 소개되어 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도 미래일기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미래 일기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메시야를 만나는 날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예수님을 만난 날 집에 가서 자기가 쓴 미래일기를 꺼내서 보았을지 모릅니다. 아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지 않았을까요?
날짜는, 이때는 서기를 쓰지 않았을테니, 히브리 연도로 제가 대충 계산을 해 보았는데 약 3795년쯤 됩니다. 곧 어느날 쓴 미래일기는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날짜; 3795년 2월(Shevat) 28일
제목; 메시야를 만나다.
그리고 이 여인은 조혜련씨가 오프라를 만나는 것처럼 메시야를 만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써 내려갔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썼던 그 미래일기가 이뤄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루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미래일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나는 꿈은 이루어졌지만 자기가 일기에 썼던 그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일기에 기록된 메시야의 모습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단7:1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또 12:5절에 보면 세마포를 입으신 분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여인은 세마포를 입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메시야를 만나는 이야기를 일기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눈앞에 나타나신 메시야는 초라한 나그네였습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어서 처음 보는 여인에게 그것도 자기들이 증오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애처럽게 말하는 나그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는 자신의 모든 마음의 상처를 뚫어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초라한 나그네는 우주보다 더 넓은 마음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동안 어느 남자에게도 느끼지 못한 우주보다 더 넓고 포근한 마음을 처음 만난 나그네를 통해 느껴봅니다.
한편 그동안 미래일기를 써 왔던 것을 크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미래일기 덕분에 메시야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단지 자기가 생각했던 메시야가 아니었을 뿐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축복의 메시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 말씀하시는 나그네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세마포를 입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메시야의 모습은 잘못된 것일까요? 미래 일기를 잘못 썼나요? 요즘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말에는 대강절을 지킵니다. 사순절에 생각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대강절에 생각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다른 것 같습니다. 대강절에는 우리는 구름타고 다시 오실 세마포 입으신 메시야를 생각합니다. 반면 사순절은 초라한 나그네가 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생각합니다.
이 여인의 미래 일기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세마포를 입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있기까지는 나그네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남편을 여섯이나 둔 여인에게까지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사람들을 나그네로 찾아 오셔서 만나시기 원하십니다. 아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생수를 주시기 원하는 자에게 나그네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당신의 생수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이것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기 위하여 목마른 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물을 좀 달라.”
교우 여러분, 이 음성을 들으십시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축복을 제일 많이 누릴까요? 나그네를 만나는 자들입니다. 나그네를 만나는 미래 일기를 쓰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남은 시간 나그네를 만나는 미래 일기를 같이 써 볼까요? 각자가 형편에 맞게 쓰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교회 공동체가 나그네를 만나는 미래 일기를 한 가지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저는 종종 이런 구상을 해 보았습니다. 조만간 ECC가 완공이 되는데 가끔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이곳에 찾아 온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합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이 찾아 온 사람들을 초대해서 좋은 음식으로 대접도 하고 좋은 음악과 재미있는 순서로 그들을 위로하는 장면들을 상상하곤 합니다. 이들은 모두 “물을 좀 주세요” 절규하는 나그네들입니다. 이 상상에 따른 미래일기를 써보았습니다.
약 20년 후입니다. 2030년 2월 28일. 어느 중년 신사 내지 숙녀가 보스톤 한인 교회 담임 목사 사무실을 두드립니다. 그 때는 다른 분이 담임목사님이시겠죠. 한 분이 찾아 와서 말합니다. 물론 영어로 말할 것입니다. “2012년 2월 25일, 제가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보스톤 한인 교회에서 나그네를 초대한 다는 소식을 접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심한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었는데, 본 교회 교우님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후 그 날 밤, 저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나의 삶의 모토로 정하였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면 대접할수록 저는 이 세상에 너무도 소중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임을 갈수록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온 우주가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매일 체험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나그네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으로 온 우주가 움직이고 있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의 삶은 새로와 졌습니다. 보스톤 한인 교회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나그네로 오신 메시야를 만나는 절기입니다. 아니 나그네 안에 계신 메시야를 만나는 절기입니다. 모든 나그네에게 메시야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나그네를 대접해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메시야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7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목마르다.” 평생 목마른 나그네가 되어서 사신 주님은 끝내 “내가 목마르다” 외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은 오늘 목마른 나그네로 찾아 오십니다. 나그네가 되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말씀을 거두기 전 잠시 아까 쓰던 일기로 다시 돌아갈까요? 지금으로부터 40년 후의 일기입니다. 그러니 2050년 어느 날입니다. 보스톤 한인 교회 담임 목사 사무실을 두드린지 20년 후에, 믿거나 말거나, 그 분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에는 실제 있었던 일을 소개해드립니다. 케미 모그벨리 (Kamy Moghbelli)라는 이란에서 온 이민자가 루터교 어느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의 삶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스터데이 (Yesterday):전쟁, 핍박, 공포, 도주, 굶주림. 투데이 (Today):음식, 쉼의 공간, 보호, 희망. 투마로우 (Tomorrow): new beginning(새로운 시작). 좀 더 저의 삶을 말씀드리면, 저는 1984년 2월 24일 저의 부인과 아들과 딸과 함께 이란에서 미국으로 피난 온 사람입니다. 아주 적은 돈과 가방을 들고 독일에서 이곳 저곳 캠프를 이전하면 지내다 왔습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 앞에 서서 말합니다. 저는 이제 자랑스런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크리스챤이 되었고 루터란 교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짐을 믿습니다.”
이 분은 루터교회의 피난민을 보호하는 사역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Love starts at our tables, at our homes, at our meals that we share together.”
(“사랑은 우리의 식탁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이웃과 나누는 음식에서 시작합니다.”)
교우여러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식탁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물 곁에서 그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우리에게 찾아 와서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물 길을 그릇이 없으신 나그네로 찾아 오십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나그네를 만나러 가십시다. 아니 나그네를 만나는 일기를 쓰십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메시야를 매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목마르다. 물을 좀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