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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그네

날짜 : 2010.01.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세 나그네
성경본문 : 창세기 18장 1-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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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본인 의사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 다섯 가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분은 말기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약 천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한 후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 다섯 가지를 발표하였습니다. 시간관계상 열개만 소개해 드립니다.

첫 번째 후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두 번째 후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세 번째 후회,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네 번째 후회,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다섯 번째 후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섯 번째 후회,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일곱 번째 후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여덟 번째 후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아홉 번째 후회, 기억에 남는 연애를 했더라면
열 번째 후회,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새해 두 번째 주일인데 죽음과 후회에 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새해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회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정확히 346일이 지나면 우리는 올 해를 마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한해가 될 수 있을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남은 한해를 후회 없는 한 해로 지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올해 연말에 두는 것보다는 우리들의 죽음의 때에 두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곧 한 해 보다는 우리가 전 생애를 산 후 아니 그것보다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후회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더 명확해 질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인지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먼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졸고 있었는지 아니면 기도하고 있었는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사실 나무 밑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보다는 졸고 있는 것이 더 가까울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졸고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때 이미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백 세 난 할아버지가 나무 밑에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아브라함의 내면세계는 무척 복잡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호시절 곧 젊은 시절을 갈대아 우르 현재로는 이라크 지방에서 살았는데 이제 75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창12:2,3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데 아브라함이 축복을 하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저희 교회에 상록회 분들이 많이 계신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하셨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록회 나이가 되지 않아도 40세가 되면 사람들은 인생을 뒤돌아보며 한번쯤 위기가 오는데 40세에 이런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감지덕지죠.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75세 할아버지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어서 순종하여 가나안땅으로 갔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큰 민족이 되는 조짐은 없습니다. 아직도 자식이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하인들이 자꾸 싸우니 어쩔 수 없이 헤어지자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을 기쁘게 여기셨던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 13: 14-17절 말씀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마 지금은 80세쯤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의심이 잔뜩 생겼을 무렵일줄 압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또다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자손의 약속, 땅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답하죠? 13:18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어디서 읽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1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백 세 난 아브라함이 지금 졸고 있는 곳은 약20년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재확인 받은 후 단을 쌓은 곳입니다. 그러면 왜 거기에 와서 앉아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죠. 좀 더 확실한 상황을 파헤쳐 볼까요? 두 마므레 상수리 수풀 사건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80세에 하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셨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아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혼자 결론을 지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키운 아이가 자기의 상속자가 될 것을 생각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5:9절에 보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나님이 세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꾀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셨으니 아내 사라가 아닌 다른 여인은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사라의 하인인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로 막연히 기다립니다. 자기 집에서 키운 남의 아이도 아니고 자기가 낳은 이스마엘도 아닙니다. 사라에게서 낳아야만 합니다. 나이는 점점 많아집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 마디로 ‘대 혼동.’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약속하셨지만 나이만 자꾸 먹어 갑니다. 이와 같은 혼동을 안고 아브라함은 또 기다립니다. 얼마 동안 기다렸을까요? 17:1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마므레에 나타나신 후 19년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다렸다는 것보다는 세월이 지났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해 별 생각을 다 했으리라고 봅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면 분명합니다. 17:17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피식 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이삭(웃음)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웃습니까? 우리들의 자녀가 우리를 향하여 피식 웃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웃을만 했습니다. 웃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약속하셨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거기다가 이제 자기는 백세가 되었습니다. 사라는 구십세가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은 지금 더 큰 혼동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들의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뭔가 일이 생길만도 합니다. 이 기대를 안고 지금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곧 이제부터가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으신 분도 있으시겠는데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음악회에 가면 악장이 끝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숨도 내쉬고 기침도 하시는데, 자 한숨을 내쉴 분 내쉬시고, 기침하실 분 기침도 한 번 하시고…, 1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리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아브라함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20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로 약속을 받고 단을 쌓은 곳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표현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곳이 자기 장막이 있는 곳입니다. 자기 집을 그곳에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20년 전에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은 그곳에서 장막을 펴고 산 것입니다. 얼마나 그 약속의 성취를 사모했으면 그러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약속을 손꼽아 기다렸으면 그 곳에 아예 장막을 펴고 살았겠습니까? 그 장소에서 약속을 받은지 20년 후,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네번째 약속을 받은 후 그것도 아들의 이름까지 받은 후 아브라함은 자기가 단을 쌓던 나무 아래 앉아 있습니다. 정확히는 장막문에 앉아 있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은 받았지만 아직도 모릅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착각의 연속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보면 묵상을 하였고 어떻게 보면 졸고 있었는데, 18: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인기척이 들려 눈을 들어 본 것 같습니다.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 영접합니다. 절하며 말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아브라함은 졸고 있었는지 말이 좀 헷갈립니다. 세 나그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세 나그네에게 왜 이런 표현을 합니까? ‘주’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고 또 왜 단수로 말합니까? 세 사람인데…. 하여튼 계속 아브라함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의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여기서는 또 복수로 말합니다. ‘당신들의 발을,’’당신들의 마음을.’ 아브라함은 지금 왔다 갔다 합니다. 한 사람으로 보였다가 세 사람으로 보였다가 합니다. 하여튼 정신이 없었는지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배설합니다. 6절에 보니깐,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세 스아는 6 갤런(gallon)의 양이라고 합니다. 세 사람을 위해서 6 갤런의 곡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7절에 보니,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하게 합니다. 세 사람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는다.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부분을 버리게 되었을 줄 압니다. 물론 나중에 하인들이 먹었겠지만…. 8절 말씀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세 나그네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눈에는 이들은 주님으로도 보였고 세 사람으로도 보였을 것입니다. 곧 세 나그네를 주님을 접대하듯 접대하고 있었습니다. 세 나그네는 그야말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제 식사가 다 끝이 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분명히 복수입니다. ‘그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그 다음은 또 누가 말하는지 주위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이제는 또 ‘그가’곧 단수입니다. 아브라함은 정신이 없습니다. 세 나그네가 말하기도 하고 주님이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헷갈려 지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헷갈리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헷갈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그토록 기다렸던 약속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곧 낳을 것이라는 선언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의 기다림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받은 약속 후로는 20년의 기다림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헷갈려도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는 상관이 있습니다. 왜 그토록 복수와 단수가 왔다 갔다 했는지 빨리 해결해야 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22절 말씀이 우리들의 수수께끼를 풀어줍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나그네들은 떠나가고 하나님은 계속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나그네 중에 한 나그네는 하나님이고 두 나그네만 사람이던가, 아니면 세 나그네가 다 사람인데 그 세 나그네 안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함께 계셨던가 둘 중에 하나일줄 압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19:1절을 인용하면서 한 나그네는 하나님 두 나그네는 두 천사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 나그네 중에 누가 하나님이고 누가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세 나그네를 통하여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그토록 기다리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장황하게 아브라함의 생애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아브라함이 평생에 한 것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약속을 기다리는 삶, 하나는 이웃을 축복하는 삶.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또한 네가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리라 은연중에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늘 이웃을 축복했을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복하였을 것입니다. 지나는 나그네를 축복합니다. 곧 나그네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이웃을 축복하는 자는 나그네를 대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없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드디어 만국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결국 약속을 기다리는 삶이나 이웃을 축복하는 삶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웃을 축복함을 통해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세 나그네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이루는 삶이나 이웃을 축복하는 삶은 하나이기에 하나님은 세 나그네를 통하여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놀라운 약속의 선물을 갖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가 축복의 사람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축복할 때 나그네를 대접할 때 하나님은 신비스럽게 나타나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어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이기에 우리가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나그네를 돌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워집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천국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후회할 것이 무엇이겠냐고 질문을 드렸는데 이제 해답이 확실해 진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의사가 말하는 첫 열개 후회안에도 사실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전에 이미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열개를 다시한번 소개해 드릴까요?

첫 번째 후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두 번째 후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세 번째 후회,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네 번째 후회,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더 이상은 생략합니다. 일본 의사는 나그네를 대접 안 한 것을 네 번째 후회거리로 소개하지만 성경을 보면 첫 번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장면을 소개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반면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시죠?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이 나그네를 영접함으로 완성됨을 말씀하십니다. 한편 사람들의 영원한 후회가 무엇이 될지도 은연중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로마서 12:13절에서 정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올해 우리는 그토록 오랜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ECC건축이 완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ECC건축의 완공은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약속의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은 그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건축 완공과 더불어 이웃을 축복하며 나그네를 대접할 때 진정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ECC건물 안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십시다. 한편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저희 자녀들이 보고 배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브라함을 닮은 저희 자녀들이 되길 원합니다. 이웃을 축복하는 자들, 특히 나그네를 접대하는 저희 자녀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 때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의 귀한 약속이 그들 삶 속에서 이루어짐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야말로 3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축복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찾아오시는 나그네를 접대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교회적으로는 우리의 ECC건물이 나그네를 접대하는 건물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한 사람만 있으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 갈수 있다.”
아주 우리들의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위에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분을 찾아 가십시다. 이들이 우리들의 나그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또한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진 퀸(Jean Quinn)이라는 분이 홈리스(homeless)들을 위한 소피아 하우징(Sophia Housing)이라는 기관을 운영했습니다. 단순한 쉘터(shelter)가 아니라 전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기관입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 집을 나온 사람들과의 멋진 인생 여정은 수 년전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내가homeless를 돌보면서 깨달은 것은 나도 집을 나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깨달음과 함께 나의 참 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은 나그네를 돌봄을 통해서 자신의 참 세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참 세계를 발견하였습니까? 참 축복의 세계를 발견하였습니까? 약속의 세계, 축복의 세계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들을 축복할 때 우리의 참 축복의 세계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 축복을 함께 누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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