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에노스의 감사

날짜 : 2009.11.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에노스의 감사
성경본문 : 창세기 4장 16-26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1122.wmv

매우 위대한 랍비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고결하고 친절하며 자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심성이 온순하고 하나님을 대단히 깊이 공경하고 있었습니다. 개미 한 마리 밟는 일이 없도록 걸어다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건을 깨뜨리지 않도록 늘 신중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자신의 육체가 쇠약해지고 늙었음을 깨닫고 이젠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몸져 누운 그의 머리맡에 모였을 때, 그는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왜 우느냐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공부하는 것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있었습니까? 무심히 가르친 것 또한 하루라도 있었습니까? 자선을 베풀지 않았던 날이 하루라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깊이 공경한 사람도 선생님입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세속 세계에는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이 우실 까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에, 나 자신에게 ‘너는 공부했는가? 너는 하나님에게 기도했는가? 너는 자선을 베풀었는가? 너는 올바른 행동을 해왔는가?라고 물으면, 전부 ‘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는 일반적인 인간 생활에 어울려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아니오’라고 밖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일반적인 인간 생활에 어울려 본적이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어느 랍비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일을 못한 것이 아쉬워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보람된 삶은 과연 어떤 삶인가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최고의 감사의 제목을 안고 산 삶은 어떤 삶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그룹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고의 감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나오는 그룹은 세상을 떠날 때 감사는 커녕 눈물을 흘렸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의 후예들의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그의 족보가 소개됩니다. 18절을 보면 가인의 다섯번째 후손으로 라멕이 태어납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한 후 세 아들을 낳는데 세 아들 모두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삽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곧 첫째 아들은 목축업의 선구자가 됩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양식을 공급받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최고의 음악인이 됩니다. 인간들을 예술인으로 만들어 가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22절을 보면,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셋째 아들은 최고의 엔지니어가 됩니다.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정말 자녀들을 잘 키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자녀가 셋이 있다고 가정하십시다. 세 자녀가 각기 목축업, 음악, 공업에 선구자가 되었다고 가정하십시다. 얼마나 뿌듯하시겠습니까? 지금 라멕은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로 인하여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만일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런 훌륭한 길을 가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라멕은 어떤 감사를 드릴까요? 23절 말씀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엉뚱한 노래를 부릅니다. 자기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고 노래합니다. 하여튼 계속 라멕의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에 대해서 알고 계셔야 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라멕은 가인의 표보다 더 무서운 표를 자기가 갖고 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는 가인을 죽이는 자보다 훨씬 큰 벌을 곧 칠십칠배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라멕은 최고의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이 세상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세상 문화와 문명을 이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노래는 감사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감사를 드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는데 왜 그는 감사는 커녕 도리어 공포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여기까지 보면 자녀들을 세상적으로 교육을 잘 시키면 안되나 의문을 품게 합니다. 여기서 왜 라멕은 자녀들이 잘 되었는데 이런 공포의 사람이 되었는가 알아 봐야겠습니다. 그의 고백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수 있습니다. 그는 노래합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 고백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그는 이웃에게 피해를 받는 일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이 쌀 한 되를 훔쳐가면 쌀 한 가마를 훔쳐와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에 난 조그만 상처 하나로 인해서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이 이런 사람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이 그토록 훌륭한 업적을 쌓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감사하는 자였더라면 자녀를 위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감사가 몸에 밴 자라면 어쩌다가 이웃에게 상처를 받았을지라도 그 상처로 인해서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끝내 이웃에게 당한 작은 상처를 살인으로 갚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감사하는 사람들은 상처로 인해서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웃을 해하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라멕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감사의 제목이 생길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감사를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작은 일에 남을 해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은 잘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할줄 모르는 이들이 어쩌다 상처를 받으면 살인을 합니다. 라멕이 탄생됩니다.
얼마 전 제가 아는 분이 교통사고를 내었습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아주 고통의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작은 상처를 가지고 살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를 기회로 삼고 이웃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너무도 잘 알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한두달 전에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빨간색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로우 커버리지(Low coverage).’ 그 의미는 ‘남을 잡아 먹고자 하는 살인자들이 많은 세상인데 더 많은 보험을 드시지’라는 멧세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라멕이 많이 있다는 경고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처음 말씀드린 랍비처럼 세상 일과는 등지고 혼자서 공부하고 성경보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이웃은 멀리서 구제하는 삶을 살면 될까요? 본문 말씀은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가인의 후예들이 사는 것을 보고 못 마땅한 아담은 세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셋이라고 부릅니다. 셋은 다른 씨가 됩니다. 아벨을 잇는 다른 씨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가인의 후예 특히 라멕의 자녀들이 세상 문화와 문명의 일인자들이 되어 갔는데 이들은 더 훌륭한 인물들이 되지 않았을까요? 26절 말씀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소개되어집니다. 세상 문화를 이끌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하나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곧 감사의 제사를 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자녀들과는 전혀 많이 대조가 됩니다.

그러면 라멕의 자녀들을 현대 사회 속에서 찾아볼까요?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최고로 똑똑한 자들입니다. 매스컴에서는 이들의 고견을 듣고자 이들을 자기네 방송의 전문 분석가로 특별히 잘 모십니다. 노벨상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손해가 났을 때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고로 비싼 변호사를 당장 불러서 복수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 이뤄 놓았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셋의 후손 대표적으로 에노스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남들이 다 만들어 놓은 컴퓨터 앞에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미있게 보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어떻게해서 이런 컴퓨터가 생겼는지 감히 알아볼 꿈도 꾸지 못합니다. 세상사에도 매한 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말하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이 저런 말하면 또 그것도 맞는 것 같고…. 전혀 세상사에 감을 잡지 못합니다. 한편 남들의 멋진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입을 멍하니 벌리고 감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빵 한 조각을 손에 쥐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이 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빵을 조금 떼 가도 “어 왜 이리 작아졌지? No Idea.” 하면서 남은 빵 조각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부족한 머리로 계산하느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앞에서 자신은 ‘No Idea’ 말할 수 밖에 없음을 늘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아울러 감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가슴 속에 전달될 것입니다. 에노스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감사는 상황과 관계가 없습니다. 에노스의 자녀들은 라멕의 자녀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감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무 조건이 안 갖추어졌어도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에노스의 노래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No idea,”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Thank you.” “No idea, but thank you” 이것이 에노스의 노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바로 라멕과 그 자손들이 들어야 할 노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살인자가 되어 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노래가 무엇이었겠습니까? “No idea, but thank you.”(무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감사합니다.)

워터게이트 (Watergate) 사건으로 유명한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씨가 있습니다. 한 때 닉슨 (Nixon)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세상의 온갖 권력을 다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의 학벌과 최고의 권력 그리고 부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은 교만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어려워진 때 옛 친구를 만납니다. 레이데온 (Raytheon) 이라는 국방산업에서 최고의 영향력이 있는 회사의 사장을 만납니다. 탐 (Tom) 이라는 분인데 이 분이 얼마 전 예수님을 영접한 후 새 삶을 살고 있을 때입니다. Tom은 세상의 성공이 아무런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Tom 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신의 삶이 변했다는 간증과 함께 C. S. 루이스 (C S Lewis)의 책의 한 챕터를 읽어줍니다.
“이 세상 창조 이후 교만이 모든 나라와 가정의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어 왔습니다. 다른 악은 때로는 사람들을 도우기도 합니다. 좋은 친교와 즐거운 말, 우정은 술주정뱅이나 방탕한 사람에게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언제나 적을 만듭니다. 인간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말입니다.”
Tom의 집을 나오는데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차를 도중에 세우고는 한참 눈물을 닦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에노스의 노래를 들은 것입니다. 아울러 그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어 갑니다. “No idea, but thank you.”
사실 십자가의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No idea, but thank you.”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도 알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No idea, but thank you.” 이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노래입니다. 세상에 있는 라멕의 가슴 속에 심겨져야 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56주년기념예배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저희 교회를 세우시고 56년간 지켜 주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에노스의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함일줄 압니다. 최고의 석학들에게 에노스의 노래를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아니 너무 자주 우리는 세상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불렀던 노래 가사는 “No idea, but thank you”아닙니까? 앞으로도 이것이 우리들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No idea, but thank you.”

말씀을 거둡니다.
파커 팔머 (Parker Palmer)라는 유명한 교육자며 영성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런 깊은 경지에 들어 갈수 있었던 것은 두번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나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심한 우울증에 고생하시는 분이 Palmer 씨에게 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어떤 사람은 회복됩니까?” Palmer씨는 대답합니다. “ I have no idea. I really have no idea.” Palmer 씨는 곧바로 후회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후회합니다. 사실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얼마 후 그 분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내용은, “no idea”라는 답변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 “Thank you”까지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에노스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개인의 삶을 생각하며, 가정을 생각하며, 세상사를 생각하며, 특히 56주년을 맞아 교회를 생각하며 부르십시다.
“No idea, but thank you.”
우리 주위에는 많은 라멕이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의 제목이 많이 있지만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에노스의 노래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101 라합을 찾은 자들 admin 2010.03.07
100 우물가의 나그네 admin 2010.02.28
99 떠남의 절기 admin 2010.02.21
98 이제 허락하라 admin 2010.01.31
97 어찌 그리 보배스러운지요 admin 2010.01.24
96 세 나그네 admin 2010.01.10
95 새해를 축복하자 admin 2010.01.06
94 아기가 자라매 admin 2009.12.27
93 나의 빛 admin 2009.12.06
92 에노스의 감사 admin 2009.11.22
< Prev ... 1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