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8.3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호흡의 신비
성경본문 : 시편 150편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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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가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말합니다.
“나는 크리스챤이 더 이상 아닌 것 같애.”
두 친구는 신앙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친구는 신앙이 자신에게는 흐릿한 그림자였음을 말합니다. 결국 고백합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에 헌신(commit)했던적이 없었어.”
이를 듣고 있던 친구가 말합니다.
“너는 그러면 다른 무엇에 헌신해 본적이 있었니?”
상대방 친구의 약점을 늘 잘 알고 있던 친구였기에 이런 말을 내뱉은 것입니다. 그 무엇에게도 헌신해 보지 못했던 친구인데 결국 기독교 신앙에도 주위에서 맴돌다가 안타까운 고백을 하는 모습을 대한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 나온 자료를 대한 적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인데 ‘구원의 확신 내지 신앙의 확신이 있는가?’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개신교인 1,000명 중 73퍼센트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출석한지 얼마만에 구원의 확신이 생겼느냐는 것도 조사하였는데, 1년 이내였다고 대답한 사람은 25 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22 퍼센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2년에서 5년 사이에 영접하였다고 말하였고 18 퍼센트의 사람들은 6년에서 10년 사이에 영접하였다고 말했으며, 놀랍게도 35 퍼센트의 사람들이 1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수의 사람들(52%)이 교회를 6년 이상 출석하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6년씩이나 교회를 다녀도 구원의 확신이 생기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무엇에 commit한다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다는 증거일줄 압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6년씩이나 교회주위를 오갔기 때문에 이들은 그래도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6년 이상이 더 걸리시는 분도 계시지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한번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앙의 확신이 있는가?” 만일 아직도 신앙의 확신이 없다면 속히 신앙의 확신을 얻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신앙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에 관해 아프리카의 어느 마사이 크리스챤의 이야기가 큰 도움을 줍니다. 마사이인들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믿는다’라는 뜻은 곧 영어에서 말하는 ‘to believe in’의 의미는 마치 백인 사냥꾼이 멀리서 총을 가지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눈과 손가락만 믿음의 행위에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어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반면 마사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사자가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와 눈과 귀가 먹이를 찾은 후 발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사이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왜 그렇게 신앙의 확신이 생기기 어려운지 이해가 갑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 나와서 눈과 손가락으로 믿음 생활을 해보려고 합니다. 믿는 것 같지만 확신이 안 생깁니다. 결국 6년이 지나야 확신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6년이 지나야 이제 눈과 손가락뿐 아니라 전 삶으로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확신에 찬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6년을 기다려야 하나요? 6년도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1년 안에 신앙의 확신을 얻은 분들이 25%였다고 하는데 어떤 분들이 이러한 축복을 받을수 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빠른 시간 안에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가장 빨리 신앙의 성숙을 가져 오는 길이 소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
시인은 무조건 찬양할 것을 명령합니다. 왜 무조건 찬양할 것을 명령하겠습니까? 시인은 자기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찬양에는 놀라운 위력이 담겨져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무조건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시편에 나오는 찬양시에 대해서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찬양의 이유를 안고 찬양하는 시, 또 다른 하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시. 시편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는 찬양의 이유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150편은 아무 이유 없이 찬양하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가 시편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시편 150편이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찬양의 이유가 없을 때는 찬양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찬양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면 찬양 안해도 됩니다. 그러나 시150편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의 이유가 있어야지만 찬양한다면 1년에 몇날이나 찬양하겠습니까? 시편 150편은 우리 인간은 아무 조건없이 찬양하여야 함을 일깨워 주는 시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짓게 되었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찬양의 놀라운 위력을 맛보았기 때문일줄 압니다. 무조건적인 찬양 어쩌면 이것이신앙의 성숙을 가장 빨리 가져다 주는 축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알기에 지금 이런 명령을 시로 펼쳐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무조건적으로 찬양할 것을 무조건 명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무조건 찬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시인의 신학적 통찰력의 근거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호흡들아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호흡이 있는 자’보다도 더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호흡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사람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전에 사람의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이 중요합니다, 왜냐? 중요한 호흡을 가진 자들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호흡을 가지고 찬양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고 그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이 호흡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그가 갖고 있었던 신학적 통찰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시편에는 소개되어지고 있지 않지만 신구약을 통하여 우리는 쉽게 그가 갖고 있었던 통찰력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세 군데 말씀을 찾아가며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2: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먼저 진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호흡은 바로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호흡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생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은 아닙니다. 창2: 1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지으신 후 아담에게 가져 옵니다. 아담은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름을 그냥 붙여줍니까? 자기의 호흡으로 붙여 줍니다. “너는 코끼리, 너는 기린, 너는 사자.” 하나님은 인간의 호흡으로 당신의 창조를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아담이 “너는 코끼리”할 때 코끼리의 코는 더 길어집니다. “너는 기린”할 때 기린의 목은 더 길어집니다. “너는 사자”할 때 사자는 더욱 위용찬 동물이 되어 갑니다. 곧 하나님의 호흡이 인간의 호흡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호흡으로 창조는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성숙을 사모하십니까?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호흡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그 호흡을 하나님의 호흡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경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일치월장 발전할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확신을 안고 지금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라는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의 호흡을 계속 소유하고 있나요? 아담의 죄 이후로 더 이상 하나님의 호흡은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서는 요20:19절 이하 말씀에서 해답을 찾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말씀하시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로라.” 그리고는 2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숨을 내 쉬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이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처럼 숨을 내쉬십니다.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곧 성령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호흡은 성령의 호흡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호흡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의 호흡을 받은 우리의 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령의 호흡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23절 말씀에 놀라운 멧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믿는 자가 “저를 용서하소서”할 때 용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용서를 통해 그들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호흡은 성령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데반과 바울의 이야기 아닙니까? 사도행전7:60절에 보면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면서 외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서 바울이 회개하게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회개를 하였는데 실상은 스데반의 이 기도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당신의 마지막 호흡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령의 호흡을 멋지게 한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호흡으로 당신의 창조를 완성시키시기 원하셨던 것을 알수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호흡으로 당신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을 완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호흡의 신비가 너무 엄청나서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좀 머리가 띵하지 않습니까? 말씀은 좋은데 하나님의 창조니 이웃의 구원이니 좀 소화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세번째로는 좀 더 쉽게 소화할수 있는 말씀을 소개해 드립니다. 로마서 10:10절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각자의 구원에 이르는 마지막 길도 바로 우리들의 호흡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어느 교우분이 안수집사 교육 때 다음과 같은 간증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자녀들이 자라서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아빠에게 질문을 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 교우님은 신앙은 없었지만 오랜 세월 교회에 다녀서 들은 풍월은 많았습니다. 들은 풍월대로 질문하는 자녀에게 답변을 해주곤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한번 두번 말을 하다가 보니 어느새 당신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호흡의 신비입니다. 그는 호흡의 신비를 체험한 것입니다. 왜 오랜 세월 교회를 나와도 신앙의 확신이 안 생기는지 이유는 분명합니다. 호흡의 신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흡의 신비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호흡을 바르게 사용하시는 분들은 그 체험을 하시고야 말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세가지 호흡의 신비를 정리해 드리면, 거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로는 우리의 호흡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호흡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이 호흡으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모든 호흡들아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는 찬양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눈과 손가락이 아니라 입으로 주둥이로 하란 말입니까?” 이 질문을 받고 시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맞다. 입으로 하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말들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 간다. (The words with which we praise God shape the world in which we shall live.)” 우리는 우리의 찬양으로 창조된 세계에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호흡의 신비를 너무나도 잘 요약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호흡으로 하는 찬양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고 우리가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살 삶을 이루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우리들은 더 멋지게 찬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찬양하여야 하나 질문이 생깁니다. 요즘 많은 찬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닥치는대로 불러야 하나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매티라는 희귀한 병을 안고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근육 이영양증(Muscular Dystrophy)’라는 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전신의 근육이 약해 지다가 결국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 병입니다. 매티는 3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14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5살이 되었을 때 옷 속에 음악이 나오는 장치가 달린 셔츠를 입고 시를 쓰고 있었는데, 시를 쓰느라 몸을 기울이는데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옷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던 것 같지만, 순간 매티는 자기의 마음에서 또다른 음악이 흘러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매티는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이것 봐요. 가슴에서 노래가 흘러나와요.” 그리고는 시를 쓰고는 제목을 ‘마음의 노래’라고 붙였습니다. 이 마음의 노래에 대해서 매티는 자기의 시집 인삿말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마음의 노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숨어 있어요. 이 노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삶의 목표 같은 것이기도 해요. 나이가 들면서 때로는 너무나 바쁘고 힘들고 화가 나서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도 있거든요.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관심을 두거나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는 법을 잊어버리면 마음의 노래도 들리지 않아요. 하지만 마음의 노래를 듣는 법을 다 잊어버렸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들을 수 있게 되죠.”
마지막 표현이 눈에 띄입니다. “다른 사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들을 수 있게 되죠.”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마음의 노래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마음의 노래를 듣지 못하게 부르는 찬양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의 노래를 들을수 있는 찬양이 참된 찬양입니다. 매티의 찬양을 들어 볼까요. 매티가 8살 때 지은 ‘여행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단지 생명을 주셔서가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게 해주셔서요.
산다는 건 정말 기적 같아요.
삶을 구석구석 여행한다는 건
그 많은 기적들을 누린다는 거죠.
우리가 마음의 노래를 들으며 여행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고맙습니다.
마음에서 울리는 그 노래, 축복의 노래로
저는 그 모든 기적을 누릴 수 있게 됐어요.
교우 여러분,우리의 호흡으로 찬양할 때 우리는 마음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매티처럼 삶의 모든 기적을 누리게 됩니다. 나의 삶에 기적이 임합니다. 이웃에게 기적이 임합니다. 온 우주에 기적이 임합니다. 호흡의 신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청년부부사역을 맞고 있었는데 그 때 어느 대학원생이 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임원회를 그 집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교역자이니 성경 찬송은 가지고 갖지만 예배 준비는 하지 않고 갔습니다. 임원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집 주인이 하는 말이, “우리집에서는 모든 모임을 예배로 시작합니다.” 저는 부랴 부랴 정신 없이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언제나 예배 준비를 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 그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주 큰 일을 멋지게 감당하고 계신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예배하는 자 찬양하는 자들이 받는 축복을 눈에 보는듯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분처럼 똑 같이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에게 맞는 찬양의 시간과 방법이 있을 줄 압니다.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그 찬양은 놀라운 축복이 되어서 우리를 찾아 올 것입니다. 호흡의 신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