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6.07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시냇가의 버들 같이
성경본문 : 이사야 4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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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아이들이 호두 봉지를 들고서 터키의 현자를 찾아 갔습니다.
“선생님, 이 봉지 안의 호두를 나눠 가지려고 하는데, 제대로 나눠지지가 않아서 싸움이 붙었어요. 선생님께서 호두를 나눠 주시지 않으실래요?”
“오냐, 그러마.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은 이 호두를 신의 분배 방식으로 나눠 받고 싶으냐? 인간의 분배 방식으로 나눠 받고 싶으냐?”
“그야 당연히 ‘신의 방식’ 대로지요.”
(여기서 잠깐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드립니다. 신의 방식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대답을 들은 현자는 봉지를 풀어 첫 번째 아이에게는 호두를 한 움큼 가득 쥐어 주었고, 그 옆의 아이에게는 다섯 개의 호두를, 그 옆의 아이에게는 세 개의 호두를, 네 번째 아이에게는 한 개의 호두를 주었고, 다섯 번째 아이에게는 한 개의 호두도 주지 않았습니다. 호두를 받은 아이들은 볼멘 목소리로 현자에게 항의 합니다. 물론 한 움큼 받은 첫 번째 아이는 항의를 안했겠죠.
“선생님, 이게 뭐예요? 무슨 분배 방식이 이래요?”
“이게 바로 신의 분배 방식대로 나눈 거란다. 신은 누구에게는 많이 주시고, 누구에게는 조금 주시고, 누구에게는 아예 주시지 않거든. 너희들이 인간의 분배 방식을 택했더라면 호두 숫자대로 정확히 갈라서 줬을 거다.”
여러분이 생각했던 신의 방식과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신의 방식과 어떻습니까? 비슷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다릅니까?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분배해 주신다면 우리는 여러모로 조심해야 할 줄 압니다. 특히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도 조심히 불러야 할 줄 압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 터키의 현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면 조심히 이 찬송을 불러야겠죠. 때로는 대박이 터지기도 하고 때로는 쫄딱 망하기도 하고…. 도박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더 열심히 이 찬송을 부르실 줄 압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골고루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이실까요? 아니면 손에 잡히는 대로 어떤 사람은 많게, 어떤 사람은 적게, 어떤 사람은 하나도 안 주시는 하나님이실까요? 아니면 또 다른 면을 가지시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이 말씀 안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스스로 밝히시고 계십니다.
먼저 이러한 말씀을 하신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벌써 60년 남짓하였습니다.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는 아주 많이 주시고 어떤 나라에는 아주 적게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곧 자기네 민족에겐 아주 작게 주시고 바벨론에게는 아주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 우리에게는 작은 것만 주시고, 어떤 민족에게는 큰 것을 주시고….”
이러한 불평을 60여년 들어오신 하나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깜짝 놀랍니다. 그동안은 세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축복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세상적인 축복을 세어보면 하나님은 불공평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호두 주머니를 안고 찾아 온 이스라엘민족에게 이렇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호두 주머니를 팍 쳐 내버리시면서 말씀합니다.
“나의 종 야곱아, 호두를 가지고 나의 축복을 헤아리지 말아라. 너는 나의 택한 이스라엘이다. 너는 내 것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자기들이 그동안 갖고 있던 하나님을 가늠하는 자가 던저져 버린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낚아채신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조금 전에 소개해 드린 이야기의 어린이들과 같았습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늠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너는 내것이라” 말하시는 하나님은 실상은 “나는 네 것이다”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깜짝 놀란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여수룬’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나 사랑하는 이의 애칭을 부를 때 그냥 부릅니까? 사랑스런 눈길과 함께 부르지 않습니까? 아니 반 녹은 상태로 부르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너무 사랑스러워 반쯤 녹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을 보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수룬’이란 표현 안에는 ‘너는 내것이고 나는 네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여수룬이라는 애칭을 들은 이스라엘은 세상의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참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제 참 축복의 세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먼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과 같이 시내처럼 끝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붙잡아 맬 수가 없습니다. 호두 몇 개를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그 다음 표현이 더 눈에 뜨입니다.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하나님의 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을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니 말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의 엄청난 세계를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동안 받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축복, 아니 그동안 그토록 부러워했던 바벨론의 축복과도 비교가 안 되는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신을 선물로 받은 자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4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저희 교우님 가정에 꽃집 도매상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꽃집은 다른 집들과는 다릅니다. 꽃꽂이를 하는 꽃이 아니라 다 화분 안에서 자라는 꽃들만 파는 꽃집입니다. 꽃꽂이 꽃들은 이미 잘라놓아 있기에 언젠가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꽃집의 꽃들은 모두 화분 안에 있기에 그냥 살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번 방문을 하였는데 그 순간도 예쁘지만 이 모습이 시들지 않고 계속 더 그 아름다움을 발휘할 것을 생각하니 그 아름다움은 살아있는 아름다움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꽃은 살아 있는 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꽃집에는 꽃꽂이 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한 꽃집에는 꽃이 딱 하나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꽃은 화분에 담긴 생명이 있는 꽃입니다. 살아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가능성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꽃꽂이 꽃집에 있는 수많은 꽃들이 감히 화분에 담긴 꽃을 외로워 보인다고 놀릴 수가 있을까요? 도리어 화분에 외로이 홀로 피어 있지만 꽃꽂이 집의 꽃들을 동정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나라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꽃꽂이 집의 무수한 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화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아름다움을 소유한 채 피어나고 있는 외로운 꽃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꽃을 지금 이사야를 통하여 시냇가의 버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지난 주는 성령강림주일로 지켰습니다. 성령강림을 상징하는 빨간 강대보(pulpit scarf)로 강단을 장식하였습니다. 오늘은 하얀색으로 강단을 장식합니다. 하얀색은 축하(celebration)를 상징합니다. 아마 성령강림을 축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만 하얀색이고 지난주 월요일부터는 교회달력으로는 초록색입니다. 곧 내일도 초록색이고 앞으로 계속 초록색입니다. 초록색은 성장을 상징합니다. 푸른 나무가 성장하듯이 이제는 성장의 푸른 계절이 찾아 온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 오셔서 푸른 강대보를 보시면 성장의 계절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는 성장의 축복을 누리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이 성장의 시절을 기다려 왔습니다. 사순절을 지켰고 사순절을 마치며 부활절을 지켰으며 지난주에는 오순절 곧 성령강림절을 지켰습니다. 이제 축복의 시절, 성장의 시절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음껏 축복을 누리십시다. 마음껏 자라가십시다. 우리들 앞에 놓인 축복의 세계는 끝없이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은 있는 축복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때로는 있는 것에서는 더 있는 것으로 성장시키시는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해에도 무한한 축복의 세계가 열려져 있습니다. 무한한 성장의 세계가 열려져 있습니다.
에드윈 게이너(Edwene Gainer)라는 목사님이 1985년 중반 무렵 헬리혜성이 70년 만에 지구 옆을 지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헬리혜성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곳에 남태평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게이너씨는 70년 만에 오는 헬리혜성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혼자서 남태평양까지 가서 볼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돈은 없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 다음날 아침입니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크루즈회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용은 남태평양으로 가는 크루즈 배에서 자신이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천문학자를 한 사람 태우고 망원경을 준비하게 하는 계획을 전했습니다. 전화를 걸어 자신이 사람들을 모집할테니 몇 명을 모집하면 자신은 공짜로 탈 수 있겠느냐고 회사에 물었습니다. 18명만 모집하면 된다는 답을 받아냈습니다.
곧바로 자신이 하는 워크샵에서 광고를 하였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1000의 예약금을 내어야한다는 광고도 하였습니다. 어느 워크샵을 마친 후 밀리드(Milred)라는 여인이 자신도 가겠다면서 수표를 써서 냈습니다. 당연히 $1000이겠지 했는데 봉투를 열고 보니 $10짜리 수표였습니다. 정중히 $1000이라고 말하자, 밀리드씨는 안다고 하면서 나머지는 메일로 보내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계속 수표가 날라 오는데 $4.50, $3.65, $9.00등 작은 액수의 수표만 날라 옵니다. 접수 마감일이 되었을 때 18명이 이미 $1000을 다 내었습니다. 밀리드씨는 아직도 $97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밀리드씨, 이제 만기가 되었고 18명은 다 채워졌습니다. $97을 돌려보내겠습니다.” 밀리드씨는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보내지 마세요. 저는 꼭 크루즈를 갈 것입니다.” 다시 게이너씨가 용기를 내어서 말합니다. “사실 크루즈 비용은 $3000입니다.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은데 $97을 돌려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잘 못 이해하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저는 크루즈에 갑니다.” 게이너씨는 크루즈 다녀와서 돈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시간은 지나 크루즈가 떠나기 전 이틀 전이었습니다. 어느 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부자였는데 법정에 갈 일이 있는데, 법정에서 날을 연기해 주지 않아서 크루즈를 포기해야한다는 전화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는 크루즈를 많이 타 보았는데 환불이 안되는 것을 잘 압니다. 저 대신 다른 분을 대신 태우고 가세요.”
누가 가게 되었겠습니까? 밀리드씨. 밀리드씨는 자기가 가게 될 것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97의 환불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이 아는 신비한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게이너목사님, 헬리혜성을 보고 싶어서 기도를 하였더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사실 게이너목사님의 신앙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정상적인 기도의 응답입니다. 반면 좀 소화하기 어려운 것은 밀리드씨입니다. 과연 그 분의 신앙을 올바른 신앙이라 볼 수 있는지 그래도 되는지, 아니면 그러다가 괜히 응답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밀리드씨처럼 무모하게 믿었다가 믿음대로 안 되는 경우도 종종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기도가 이루어졌기에 제가 알게 되었지 기도가 안 이루어졌으면 제가 알게 되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책에 쓰여지지 않죠. 그런 이야기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뇌리 속에 계속 남겨져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모하게 믿었다가 안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리어 가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원하는 대로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처리하실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 절에 있는 것 같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기도의 응답을 받던 안 받던 자신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들은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스스로 여호와께 속했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으면 받는 대로 안 받으면 안 받는 대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곧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널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 안 될 때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라는 분이 그의 책 “Walking with God”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우리들의 궁금증을 멋지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 들었다고 해서 운동선수나 음악가 되고 싶은 열망을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나이 들어 야구선수나 음악가가 된다는 것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쫓아다니면서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 분의 주장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말려야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포기할 때 더 큰 위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열망을 죽여 버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열정적인 기도는 수포로 돌아 간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열정적인 기도로 인해서 그 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 한 그 열정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더욱 가깝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때로는 무모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식 밖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밀리드씨 처럼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이루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신이 일하는 것입니다.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리어 더 깊게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전보다 더 강하게 손으로 기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최고의 축복된 삶은 때로는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최고의 삶은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기도가 응답 안되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 때 우리 안에 있던 갈망은 하나님을 만나고저 하는 갈망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깊게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되는 삶 이것이 바로 시냇가의 버드나무의 모습이 아닐까요? 기도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은 생기발랄해집니다. 그러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푸르른 버드나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1900년대 초 필라델피아에서 가까운 뉴저지에 사는 한 어린 소녀가 교회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 ‘Good Samaritan Temple Church’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협소했기 때문에 자리가 없다고 거절되었습니다. 그 때는 등록제로 교회학교에 등록을 한 후에야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살다가 얼마 후 병에 걸려 아파서 누워 있다가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녀가 죽고 나서 베게 밑에서 발견된 봉투에는 편지와 돈이 좀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To the pastor of Temple Church”라고 되어 있었고 봉투에는 57센트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목사님, 하루 속히 교회를 더 지어 나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 돈을 보태 써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이것이 전해지면서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 아이의 장례 예배를 치르면서 온 교인들에게 알리고 이웃에게 알려 씨드머니(seed money)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 불씨로 그 교회는 더 크게 복음을 전하며 성장했고 세운 학교가 오늘의 빌 크로스비(Bill Crosby)가 졸업한 템플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두 가지 응답을 다 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기도는 응답받기 시작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육관이 아니라 템플대학까지 세워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기도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앞에 푸른 축복의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처럼 우리들 앞에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열려져 있습니다. 이 축복의 세계에 함께 뛰어 드십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기도응답을 받아도 하나님께 영광인 삶이 기다리고 있고 못 받으면 더 큰 하나님께 영광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내 세상을 버들과 같이 만드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시냇가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