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5.24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만민의 기도하는 집
성경본문 : 이사야 56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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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네 마리가 강물에 고요히 떠 있는 통나무 위에 누워있었습니다. 갑자기 통나무가 물결에 휩쓸려 천천히 강 아래로 밀려갔습니다. 개구리들은 아직까지 항해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이로움과 즐거움으로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첫 번째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신기한 통나무다. 마치 살아 있는 것같이 움직이잖아. 통나무가 움직인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어.” 두 번째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이 통나무는 다른 통나무들과 똑같은 것이야. 이것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바로 흘러가는 강물이 우리와 이 통나무를 움직이게 하고 있어.” 세 번째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통나무도 아니고 강물도 아니야. 진짜 움직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야. 생각 없이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세 마리 개구리들은 이제는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해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하고 시끄럽기만 할 뿐, 그들의 의견은 좀처럼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네 번째 개구리에게 시선을 보냈습니다. 세 마리 개구리는 그의 의견을 듣고자 했습니다.
“너희들의 말은 다 옳아. 너희들 중 아무도 틀리지 않았어. 움직이는 것은 통나무와 물과 우리들의 생각 모두야.”
네 번째 개구리가 말하자 세 마리 개구리들은 너무너무 화가 나 흥분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맞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다른 두 친구의 의견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때 이상한 일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세 마리 개구리들이 힘을 합쳐 네 번째 개구리를 통나무 밖으로 , 즉 물속으로 밀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이런 일을 당해 본적이 있지 않습니까? 한번쯤은 있을 줄 압니다. 모든 사람들안에 다 조금씩 맞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도리어 밀려나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 네 번째 개구리가 밀려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아마도 “난 모르겠어,” 이렇게 대답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I don’t know.”
우리는 아주 애매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최고로 문명의 이기가 발달된 시대이긴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애매해지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는 분들은 제 보기에는 “I don’t know”의 사람들입니다. 뭔가 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 같으면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반면 여러분 외롭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뭐든지 안다고 생각하시고 이웃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널리 자랑해 보세요. 금방 외로워지실 것입니다.
반면 제 보기에는 아직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은 두 그룹만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딘 가는 들어야 하는 곳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는 대학교수입니다. 학생들이 대학교수를 존경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학점을 잘 받아서 졸업을 해야 하니까. 교수님의 강의가 이거다 저거다 확실해야지 시험보거나 페이퍼 쓸 때 확실하게 쓸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미디아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자기를 향하여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듣는데 아무런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반면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 확실하게 말하면 마음에 품게 됩니다. 어느덧 자기의 생각이 되어 버려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 기자나 방송인이 자기 앞에 와서 이거다 저거다 말하면 좋아할까요? 그럴 때는 “I don’t know”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사는 우리들의 특징일줄 압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사는 우리들은 누가 와서 “이거다 저거다” 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쓰리쿠션으로 전해 오는 말에만 귀를 기우립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보스톤에서 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보스톤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고 특히 이러한 때에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는 ECC건축 완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엄청난 건축을 마무리 짖는 우리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길 원하실까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특히 보스톤에서 교회건축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 보스톤의 교회들이 콘도미니움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를 통하여 어떻게 보면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면, 사실 저희 교회는 50주년 곧 희년을 맞이하여 교육관건축을 계획하였습니다. 벌써 첫 희년이 지난 지 6년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희년의 일 년 전인 2002년부터 건축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을 구상한지 7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내다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끌었겠습니까? 헌금도 헌금이지만 카트리나나 중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서 건축비가 폭등하고 해서 한동안 건축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것도 고려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온상지인 이곳에 교회가 건축될 수 있다는 기적을 보여주시길 원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다니는 곳에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되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한 동안 건축비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하버드 스트리트(Harvard St.)의 커뮤니티센터를 높이 올리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콘도로만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곧 기다림의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7년간 준비하고 건축된 이 ECC건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70년간 놀라운 일을 펼쳐나가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런 오랜 산고 끝에 완공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저희교회가 처한 상황하고는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 곧 건축을 하던 안 하던 저희 교회를 포함한 세계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귀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의 마치는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제 얼마 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민족은 이제 가슴이 들떠 있습니다. 곧 바벨론에서 해방될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앞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기대하며 말씀을 듣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은 곧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될 이스라엘 민족에게 크게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의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인들은 결단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의를 행하고 안식일을 잘 지켜야지. 우리는 택함 받은 민족이니까.”
그리고는 서로서로에게 격려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십시다. 우리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가 안식일을 잘 지키나 안 지키나 감시하십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새로운 기회가 오면 또 다시 포로 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서로 서로를 의지하여 말씀대로 살 것을 결단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 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이방인들도 같은 축복의 대열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고자에 대한 말씀은 시간상 생략합니다. 4, 5절에 고자도 같은 축복의 대상임을 말씀하시고는 또다시 이방인을 언급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이스라엘인들은 정신이 얼떨떨해 졌을 것입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종이요 자기들만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인 줄 알았는데 그러한 축복의 삶이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듣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서 뒤로 넘어 갈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이방인은 감히 예루살렘 성전에 얼씬도 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은 고자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한 사람 두 사람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이방인들을 철저히 차별하였습니다. 감히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단에 희생을 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한 사람 두 사람 깨닫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이 바벨론 포로가 된 이유 중 대표적인 이유는 자기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하였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은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깨닫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갈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엄청난 잘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어렴풋이 깨닫길 시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이방인들을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지혜로운 이스라엘인이라면 이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동안 하나님의 집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었음을 깨닫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가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을 손수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각오를 하셨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집은 전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이를 무시하는 자들이 정녕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 세계 모든 교회를 향하여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잘 실천하는 교회가 복된 교회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ECC완공을 코앞에 둔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까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한 번쯤 대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예루살렘 성전을 이방인들이 와서 파괴시켜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에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손으로 몸소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까?”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에 감사하게도 보스톤 노회를 통하여 십만 불을 받기는 하였지만 전체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 모기지를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께 대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몸소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한인들만의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우문현답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교우 여러분, 우리가 완공하는 ECC뿐 아니라 우리가 오래 전 인수받은 본당건물도 사실은 우리들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민의 건물입니다. 만민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수 말씀하시는 메시지일 줄 압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교육관이 완공되면 이 하나님의 집을 만민의 집이 되게 하십시다. 그 때 우리 교회는 최고의 축복을 받게 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가 될 줄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결심을 안 했을까요? 물론 했을 줄 압니다. 어떠한 결과를 나았죠? 마가복음 11장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또다시 예루살렘성전에서 내쫓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이 말씀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엎으셨다고 생각하여 왔는데, 결코 그 것이 아닙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장사의 소굴이 되었겠습니까? 이유는 이방인을 받지 않았기에 강도의 굴혈로 변한 것이 아닐까요?
이사야를 통하여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라는 메시지를 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실패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스라엘민족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운 건물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께 영원히 바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헤롯이 지은 성전구조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사실 첫 성전인 솔로몬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 후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은 이방인들보다 다르다는 사실이 몸에 배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에게 대한 태도는 “너희는 우리들에게 배워야되. 자 이방인의 뜰을 마련해 줄테니까, 여기 들어와서 우리들을 경외해 그리고 우리들로 부터 배워.”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배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들에게 배워야 하는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의 자세는 “I know everything”이었습니다. 결국 이방인의 들을 만들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곧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새로 짓는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뜰’을 만들어 놓고는 하나님께 자랑하였을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 우리는 이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방인들도 함께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한 아니 가르치려고만 한 그들은 결국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지 이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멋지게 성전건축을 이루어 놓고 이웃민족들에게 “봤지. 당신은 우리에게 와서 배워야 해” 하는 순간 이웃은 우리를 멀리 떠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들의 교회당도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메리라는 천주교 수녀가 있었는데 5년 동안의 수녀의 삶을 정리하고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수녀로서의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자신은 동성애자임을 발견합니다.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녀직을 그만 둔 것뿐 아니고 동성애자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늘 고통 가운데 지내는데 시빌이라는 간호사를 만납니다. 시빌은 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에 자신에게 늘 격려를 해 준 것이 고마워 어떻게 보답을 하면 좋겠냐고 묻자 시빌은 글쓰기에 자신이 없고 문법과 구두점을 바르게 쓰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선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탁을 하였습니다. “얘, 그럼 나한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줘!”
드디어 둘만의 글쓰기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빌은 글쓰기를 배웠고, 메리는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세상을 조금은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그 후 작가이자 교사로서 멋진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시빌은 메리에게 참 격려를 해 준 사람입니다. 그의 참 격려는 “내게 가르쳐줘(Teach me)”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둘은 참된 만남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포스트모더니즘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들의 자세는 “나에게서 배워라 (Learn from me)”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이웃에게 배우기 전에 결코 이웃은 우리들에게서 배우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웃 민족에서부터 배우십시다. 우리가 진정 이웃에게 가르치길 원한다면 먼저 이웃에게서 배워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 때 진정 우리는 우리의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웃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복음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시겠습니까? 이웃 민족에게서부터 배우십시다. 이웃 민족의 좋은 것을 배우십시다. 그 때야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루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설교준비를 하기 전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드리다가 아무도 없는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Community center, 지하에 있는 중고등부실 그리고 Parlor가 있는 일층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층계가 눈에 띄어서 올라가 보았습니다. 앞으로 유‐초등부 어린이들이 예배드릴 소예배실이 마련될 곳입니다. 갑자기 ‘오늘은 여기서 기도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앉았는데 멀리 내다보니 부르클라인 주민들이 사는 집들이 보였습니다. 순간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 곳으로 오세요. 이곳으로 쳐들어오세요. 이곳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곳으로 오세요. 이곳으로 쳐들어오세요. 이곳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안고 우리는 이웃을 찾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우리교회는 진정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