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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진 돌

날짜 : 2009.04.12
예배명 : 뉴잉글랜드 부활절 연합 새벽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옮겨진 돌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장 1-10절

오래전부터 독일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설교는 농담으로 시작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루터란 교회에서는 어느 해 다음과 같은 주보 광고문을 내었습니다.
“이번 부활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우리 모두 사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듭시다. 예수님을 죽은 자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3일 동안 사탄을 골려 주셨습니다. 이번 예배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유머와 함께 즐겨 보십시다. 웃기게 옷을 입고 오시고, 재미있는 모자를 쓰고 오세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리석어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무찌르셨습니다. 재미있는 조크(joke)를 가져 오세요. 목사님을 놀리세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여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교회 가시기 전 집으로 들리실 텐데 용감하신 교우님들 한번 이 루터교 주보 광고 그대로 한번 원하시면 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후의 책임은 제가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아무나 웃기는 옷을 입고 와서 부활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요즘도 서구교회에서 부활절 농담을 좋아하나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으로 영어로 부활절 조크(Easter Joke)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조크(joke)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으로 영어 검색을 끝내고 한글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부활절 농담’을 입력했는데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서구 문화권은 아직까지도 부활절을 유머스럽게 생각하고 대하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심각한 교리로만 받아 드리고 있구나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한번 생각해 볼 만합니다. 부활절을 유머로 맞이하는 것이 신성 모독인가요? 아니면 부활절을 딱딱한 엄숙한 사건으로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한번 생각하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라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무덤에 묻히셨는데, 본문 말씀을 보니 ‘안식 후 첫 날’ 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일요일이 되겠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이 되었기에 막달아 마리아가 무덤에 와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마리아의 생각을 알 듯 합니다.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요한 이 두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자신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노라” 말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무덤의 돌이 옮겨진 이유는 누군가가 금요일 밤이던 토요일이던 와서 돌을 움직이고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허겁지겁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갑니다. 요한이 발이 더 빨랐으나 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무덤에 와서 밖에서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고 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는 용감한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온데 간데 없어진 것을 봅니다. 이때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9절 말씀이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절)
이 두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10절까지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 구절부터 마리아와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10절까지만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안에서는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도 못했고,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 안에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그 누군가가 있습니다. 단지 사람이 아닌 것뿐이죠. 무엇일까요? 옮겨진 돌입니다. 무덤을 막아섰던 돌입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 돌을 인격체로 생각해 보고 오늘 본문 장면을 살펴보십시다. 요한복음에서는 돌을 누가 옮겨 놓았는지 기록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사라고 생각하면 제일 무난할 줄 압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 후 금요일 저녁 사람들은 돌을 옮겨서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훔쳐 갈까봐 갖다 놓은 돌이니 무척 큰 돌이었을 것입니다. 몇 명이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돌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무덤을 막는데 사용하는 돌이 되었습니다.
이 돌의 운명은 기구합니다. 다른 많은 사용 용도가 있는데 고작 무덤을 막는데 사용되는 돌이 되었습니다. 무덤을 막는 돌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돌이라도 좋아할 리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번은 좀 특별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철저히 감시하는 가운데 시체가 옮겨지고 자기처럼 큰 돌로 막는 것을 보면 분명 극악한 죄수였음에는 틀림없다고 돌이 느꼈을 것입니다. 돌은 그래도 유대인들을 위해 극악한 죄수를 가두어 놓는 일에 사용됨을 뜻 깊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로 무덤이 막혀지는 것을 본 후 한 사람 두 사람 그 자리를 떠납니다. 날은 어두워집니다. 금요일 밤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토요일은 안식일이니 계속 주변은 적막이 흐릅니다. 돌은 극악범 예수를 지키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토요일 밤 또 다시 어두움이 깔립니다. 밤은 더욱 깊어 갑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자기를 밀어내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 사람 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데 자기를 밀으려면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 하는데…. 순간 극악범으로 사형을 받아 누워있던 청년 예수가 일어서더니 돌로 막혀있는 문으로 가까이 나옵니다. 동시에 어떤 놀라운 힘에 의해서 그 무거운 돌은 가뿐히 옆으로 옮겨집니다.
무덤 문이 열려졌습니다. 열린 무덤문 밖으로 흰 옷 입은 예수님이 걸어 나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돌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더 이상 그 청년이 극악한 사형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청년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 넘쳐 있는 듯 했습니다.
돌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돌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도 하였지만 천사들이 자기를 사뿐히 들어서 옮기는 신비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돌은 혼자서 깊은 사색에 잠깁니다. “이는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런데 잠시 후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여인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슬픈 기색을 띕니다. 돌인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듯 합니다. ‘왜, 저 돌이 저기로 옮겨졌나’ 몹시 못 마땅한 듯한 표정입니다. 분명히 그 멋진 청년을 찾아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은 막 울면서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잠시 후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납니다. 한 청년이 뛰어 오고 있습니다. 허둥지둥 뛰어 오더니 무덤 밖에서 기웃 기웃거립니다. 또 다른 말발굽 소리와 함께 좀 둔해 보이는 청년이 뛰어 옵니다. 이 청년은 무작정 무덤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거리면서 나옵니다. 몹시도 실망한 표정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그 무엇을 잃은 좌절감에 빠진 표정들입니다.
돌은 혼자서 웃기 시작합니다. 깔깔 거리기 시작합니다.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직 돌을 만드셨던 하나님만 듣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돌이 함께 웃기 시작합니다. 깔깔깔깔… 그 웃음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두 청년은 그 현장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돌은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줄 알고 슬퍼하는 제자들과 여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돌은 많은 폭소를 터뜨렸으리라 봅니다.
어떤 교우님들은 혹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돌이 어떻게 웃는단 말이야 목사님이 더 우리를 웃기시네! 목사님들은 가끔 억지를 부린단 말이야. 정말 돌이 웃질 못할까요?
1909년 제프리 잉그램 테일러(Geoffrey Ingram Taylor)라는 영국의 물리학자가 실험을 하였는데 그가 내린 결론이 다음과 같습니다. 방 안에 사람이 있을 때 하고 없을 때하고 방 안에 있는 양자(quantum particle)‐양자는 모든 물질의 최고로 작은 단위입니다‐의 움직임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배를 드릴 때와 안 드릴 때, 이 본당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양자들의 움직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있어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교회당에 들어가시면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여러분 한 분의 존재로 인하여 교회당의 수많은 양자들이 움직임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 후 약 90년이 지난 1998년에 이스라엘 학자들이 비슷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갔는데, 그냥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집중을 하느냐에 따라 더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도를 하는데 집중을 덜하고 하면 그만큼 본당의 양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덜하고 제가 집중을 세게 하면 본당의 양자들의 움직임이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실험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존재와 삶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소리지르지 않았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기뻐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누가 제일 먼저 이를 알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리고 시무룩한 제자들을 보고 누가 깔깔 웃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입니다.
그리고 그 돌의 웃음소리는 지금도 온 천지를 울리고 있지 않을까요? 사실 그 돌의 운명을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석공이 이 돌을 본 후 쓸모있구나 생각하고는 이 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데 쓸 수도 있었겠고 담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고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석공이 징으로 자기를 가를 때마다 돌은 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웃는 돌을 보면서 옆에 있는 돌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너는 무엇이 좋아 계속 웃니.” “나는 봤어 예수님이 부활하였어!” 그런데 웃음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이 돌의 웃음은 다른 돌로 전달되고 어느새 나무들에게 전달되고 어느새 나무에 즐겨 앉는 새들에게 전달되고 이제는 온 지구 위 모든 피조물에게 전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구를 넘어 빛을 통하여 태양계에 전달되고 태양의 빛을 타고 은하계에 전달되고 은하계를 넘어 끝없이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전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온 우주가 주님의 부활을 알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돌을 보면 잠시 멈추어 서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 주님이 부활한 것 아니? 분명히 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으신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돌들은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그런데 정말로 온 우주가 알고 있을까요? 온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요? 2009년 4월 6일 오전 11시 30분경 어느 순간에 세계 인구는 68억9천8백8십만 2천2백7십4명이었습니다. 1초에 3명씩 늘고 있었습니다. 거의 70억이 되는 인구 중에 몇 명이 주님의 부활을 알고 있겠습니까? 약 20억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 통계 자료는 얻기가 불가능합니다. 20억에는 교회는 안 다니지만 스스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잡아서 20억이라고 하십시다. 50억의 인구가 아직도 돌들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세계 통계이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미국은 어떨까요? 사실 지난주 뉴스위크(Newsweek)는 Holy Week를 맞이해서 기독교 특집호를 발간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한다는 보도를 하였을까요? 카버에 쓰여 있길, The Decline and Fall of Christian America. 내용에 들어가서는, ‘The end of Christian America.’ 더 이상 미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기독교인들이10% 줄었다고 합니다. 물론 86%에서 76%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76%이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76%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안 다니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줄 압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조지 부시(George Bush)대통령과 클린턴(Clinton)대통령 시절에는 58%가 종교가 문제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반면 현재는 10%가 떨어진 48%의 사람들만이 종교가 문제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76%가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삶 가운데서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 수는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사는 우리들에게 적신호를 안겨주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동안 미국전역에서 제일 비종교적인 곳이 북서부지방이었다는 것입니다. 시애틀(Seattle)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롭게 가담한 곳이 동북부지방이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는 뉴잉글랜드(New England)지방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을 더 이상 기독교국가가 아니라는 말을 듣게 한 지역이 바로 뉴잉글랜드라는 것입니다.
뉴잉글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돌들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 세계인구의 50억이 돌들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도 점점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뉴잉글랜드에 사는 사람들도 갈수록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통계를 듣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도 나는 20억 안에 들어와 있으니 행복하다? 뉴잉글랜드에는 돌이 많습니다. 뉴햄프셔 화이트마운틴(White Mountain)에 가면 돌이 많습니다. 나무들이 돌 틈에서 뿌리 내리느라고 무지 애를 쓰고 있습니다. 유명한 Old Man’s Face‐ 물론 지금은 무너져 내려갔지만 – 돌입니다. 사방이 돌인데 더 믿는 자들은 줄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돌의 웃음소리만으로는 부족한 가봅니다. 이렇게 돌이 많은데도 뉴잉글랜드는 왜 자꾸 비기독교화 되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누구의 웃음소리가 필요할까요? 더 이상 돌의 웃음소리 가지고는 뉴잉글랜드가 변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남은 길은 믿는 자들이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폭소를 터뜨리는 소리만이 뉴잉글랜드의 사람들 마음을 막고 있는 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곧 우리 각자가 옮겨진 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웃는 돌이 되어야겠습니다.

구세군이 만든 책갈피에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라: 온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이다.
주라: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
일하라: 성공의 값을 누리리라.
눌라: 젊음의 비결이다.
웃어라: 영혼의 음악이다.”

그러면 웃는 돌의 특징은 그저 깔깔대며 웃는 것뿐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줄 압니다. 오늘 본 교회에 가시면 오든 목사님들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실텐데 바로 그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될 줄 압니다. 목사님은 여러분 교회에 맞는 웃는 돌의 모습을 말씀하실 줄 압니다. 저는 이 시간 뉴잉글랜드의 모든 교우님들께 공통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만 소개해드립니다.

지난 주 저희 한인 사회는 또 다른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3년 전에 최영호 목사님께서 하나님 품에 안기셨는데 사랑하는 윤민 사모님마저 세 자녀를 남겨두고 하나님품에 안기셨습니다. 이 가정 이야기는 제가 더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 누구도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하실 줄 압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을 일찍 데려 가셨나?” 그런데 우리들의 이 궁금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사모님을 데려 가셨습니다. 저희 모두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질문할 기력도 생각도 잃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부활절은 다가 왔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빈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아니 옮겨진 돌 앞에 물끄러미 서 있습니다. 빈 무덤은 아무 말이 없지만 옮겨진 돌은 무엇인가 속삭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옮겨진 돌은 지금 웃고 있습니다. 깔깔대며 웃고 있습니다. 옮겨진 돌의 웃음소리를 들으십시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주는 교훈을 생각하십시다. 그 웃음소리를 세 자녀들에게 전하여 주십시다.
이 시간 그 동안 이 가정을 물심양면으로 도우신 여러 교회와 성도님들께 같은 교역자로서 그리고 교회협의회 회장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여 우리가 이 가정에게 드릴 선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웃음입니다. 세 자녀들이 필요한 것은 부활의 웃음일줄 압니다. 부활의 웃음이 듬뿍 담긴 사랑의 선물일줄 압니다.
이 세 자녀들에게 부활의 웃음이 담긴 선물을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또 주십시다. 우리는 어느덧 귀한 삶의 습관을 소유한 자가 될줄 압니다. 우리는 바로 누구에게도 부활의 웃음을 선물로 주는 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아울러 이 세 자녀들은 부활의 웃음의 주인공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한인들을 넘어서 다른 미국인들에게 부활의 웃음을 주는 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들의 웃음이 퍼지고 퍼지고 퍼져서 뉴잉글랜드를 변화시키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뉴잉글랜드로 인해서 미국이 다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는 웃기는 이야기마저 탄생되지 않을까요?
다음 사람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 대왕, 조지 워싱톤, 나폴레옹, 골다 메이어, 바흐, 루소, 단테,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이들은 모두 부모를 일찍 잃은 고아들입니다. 이들은 부활의 웃음소리를 들었기에 이처럼 위대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세 자녀들을 이와 같은 자들로 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뉴잉글랜드는 부활의 웃음을 잃었습니다. New England 사람들은 부활로 인해서 더 이상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될 때만 기뻐합니다. 좋은 학력 좋은 직장 많은 재산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어느덧 부활의 웃음을 잃었습니다. 찰스강과 주위에 널려져 있는 돌들만 주님의 부활로 인해 싱글벙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찰스강과 주위에 널려져 있는 돌들은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소리치고 있습니다. 돌들과 함께 웃읍시다. 함께 부활의 웃음을 터뜨립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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