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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네 어머니라

날짜 : 2009.04.10
예배명 : 성금요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보라, 네 어머니라
성경본문 : 요한복음 19장 25-27절

지난 화요일에는 자녀를 세 명 이 땅에 놓아두고 먼저 소천받으신 고 윤민 사모님의 입관 및 하관 예배에 참석하였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장지를 떠나오는데 같이 가셨던 어느 목사님이 얼마 전에 읽은 에세이가 생각이 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생은 두 숫자 사이랍니다. 그리고 이 두 숫자 앞에서는 아무도 꼼짝 못한다고 합니다.”
“두 숫자라니요”
“비석을 보세요. 두 숫자가 적혀 있지 않습니까? 태어나는 해와 세상을 떠나는 해. 그 두 숫자 사이에서 자기 나름대로 뭔가 해 보려고 껍적대지만 결국 숫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거죠.”
저와 저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은 모두 1953년생이었습니다. 곧 저희의 첫 번째 숫자는 1953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숫자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여러분 중에 두 번째 숫자를 아시는 분 계십니까?

사실 이 에세이가 주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숫자를 조정하고 콘트롤할 수 있는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하기도 할 수 있고 빼기도 할 수 있고 곱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전혀 콘트롤할 수 없는 숫자가 두 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 두 개를 다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사신 분 중에 이 두 숫자를 알고 이 땅에 오셨고 또 세상을 떠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던 분이십니다. 인간들이 죄를 짓자 성삼위 일체께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땅으로 내려가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성삼위일체께서는 기원후 4년에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땅위에 태어날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무조건 순종하십니다. 곧 그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첫 번째 숫자를 알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30년간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30년에 공생애를 시작하고 33세에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셨습니다. 곧 기원 후 37년에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아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두 숫자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 두 숫자를 아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반면 인간들은 첫 번째 숫자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왔으며 나머지 한 숫자를 알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갑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큰 차이는 예수님은 자신이 알고 계신 두 숫자 사이에서 당신의 삶의 목적을 완수하는 삶을 삽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두 번째 숫자를 어떻게든 연기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살아가지 않습니까? 자기가 그 숫자를 콘트롤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금요일을 맞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시는 예수님 앞에 모였습니다. 어떤 마음을 안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두 번째 숫자를 연기시켜 달라는 마음의 소원을 갖고 이 자리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번째 숫자를 연기시켜 달라는 마음으로 온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실까요?
“보라 네 어머니라.”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과는 아랑곳없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천주교에서는 오늘 이 장면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요한을 모든 인간의 대표로 간주합니다. 곧 요한은 두 숫자를 알지 못하는 전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두 숫자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지금 두 숫자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최고의 선물을 인간에게 내리신다고 천주교에서는 믿고 있습니다.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인간들에게 주셨기에 이제 인간들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개신교와는 이 장면을 해석하는데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죄가 없으신 깨끗한 분으로 믿고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라는 예수님 다음으로 최고로 거룩한 분을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개신교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마리아도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입니다. 곧 하나님은 죄인 마리아를 요한에게 선물로 아니 어머니로 주신 것입니다.
지난번 안식년에 터키에 가 보았었는데, 터키에 있는 에베소에 가보면 마리아의 집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사도요한이 목회를 했다고 생각하는 사도 요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곳입니다. 곧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평생 모셨습니다.
그러면 한번 질문해 볼만 합니다. 사도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모셨는데 그 결과 사도 요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사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설교는 아주 간략하였고 힘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설교는 늘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어지는데 요한이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부터 사랑의 사람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요한을 처음 불렀을 때 요한의 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막3:17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의 소유자가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우뢰의 아들의 사랑의 사도로 만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이 우두커니 있는데 뚝 떨어져서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였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순종한 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리아를 어머니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저 나름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후의 요한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도 많은데 자기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겼다고 생각하니 너무 황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 수 있겠나요? 요한도 인간이고 마리아도 인간입니다. 요한도 죄인이고 마리아도 죄인입니다. 요한은 마리아의 죄성을 보기 시작합니다. 점점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실망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분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지.” 어떤 때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하십니다. 아침 마다 문안드리곤 했는데 점점 문안드리기가 싫어집니다. 어느 날은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드리는 것을 생략합니다. 자신이 지은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은 순간 마리아의 죄성이 아니라 자신 안에 깊게 뿌리 박혀있는 죄성을 느낍니다. 자기 자신이 최악의 죄인임을 느낍니다. 눈물로 회개하고는 마리아에게 달려갑니다.
“어머니”
수많은 허물로 꽉꽉 들어차 보였던 마리아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 어느덧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이 아닐까요? 사랑의 사도로서 살다가 두 번째 숫자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저는 그동안 있었던 큰 궁금증을 하나 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역사에 큰 일을 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 프란시스가 그랬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esa of Avila)가 그랬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들 보기에는 이들은 죄인의 괴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스스로 죄인의 괴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큰 주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늘 저에게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저 나름대로 이번 사순절에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죄성과 이웃의 죄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죄성이 개의 죄성이라고 생각하면 저의 집사람의 죄성은 고양이의 죄성이고 저의 아들은 노루의 죄성이라고 할까요. 한 가족의 죄성도 이렇게 다른데 이웃과의 죄성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곧 우리들의 죄성이 너무 독특하기에 이웃과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죄성은 그 아무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내가 갖고 잇는 죄성은 세계에서 유일한 죄성입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 눈은 더이상 안 옵니다만, 눈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눈 한 송이 한 송이가 다를수 있을까? 상상이 안 갑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죄성도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다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인의 괴수들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랑은 사라지고 미움과 멸시만 무성해집니다.
저희가 필라델피아에서 살 때 고양이를 키웠었습니다. 한번은 온 가족이 며칠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집안에다가 먹을 것을 잔뜩 풀어 놓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며칠 후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집 문을 열자마자 이 때다 하고 밖으로 놀러 나가는 것입니다. 오래 못 나가 놀았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같이 키웠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개들은 주인이 온 것이 좋아서 사방에 오줌을 찍찍 싸며 올라타면서 좋아하지 않을까요? 고양이는 달아나고 개는 멍멍 짖으면서 주인에게 올라타고…. 이렇게 둘이 다르지 않습니까?
개는 고양이를 정죄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 놈은 주인이 오셨는데 살짝 도망나가나.” 한편 고양이는 개를 정죄하였을 것입니다. “개들은 언제나 시끄러워.”
이 세상의 동물들이 각각 다르듯이 우리 인간들의 죄성도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서로가 상대방의 죄성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경멸합니다. 정죄합니다.

이렇게 죄성이 서로 다른 자들을 위하여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죄성이 다른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요?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 찬양대의 찬양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리고는 그 음성을 듣는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십시다.
“보라. 네 어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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