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3.22
예배명 : 사순절 넷째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장 28-3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322.wmv
어느 목사님께서 당신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 정서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교우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교우님들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어릴 때는 메노나이트(Mennonite)라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를 다닌 분입니다. 나중에는 알코올에 중독이 되고 결혼에 실패를 하고 사업도 실패를 하고 끝내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다른 교우님들과 교제하는데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서 늘 교회 안에서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서로 의견교환에 늘 어려움을 갖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 식으로 하면 헌신 예배를 인도한 셈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를 하였는데 아주 멋지게 예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분 안에 잠재해 있던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은사를 모두가 보게 된 것입니다. 최고의 헌신 예배가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와 같이 훌륭한 예배가 된 이유를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소외된 자였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outsider였습니다. Outsider가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은사를 발휘하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목사님은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지난 주에도 저희교회에서 여선교회 헌신 예배를 드렸는데 이들은 교회 안에서 outsider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를 인도 하는 데는 어쩌면 outsider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멋진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분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부터 고통의 시간을 많이 겪었던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If you have lemons, make lemonades.(레몬이 있으십니까. 레모네이드를 만드세요.)” 우리가 레몬을 그대로 드시는 분 없지 않습니까? 레몬 그 자체는 쓴 맛뿐입니다. 그러나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수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삶은 레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 분은 레몬이었습니다. 늘 쓴 맛을 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우님들도 이 분을 레몬으로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 이 분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을 보면서 이 분의 레몬이 바로 레모네이드가 되는 것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소외된 자 안에 숨겨져 있었던 하나님의 은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의 과거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레모네이드가 되어 있음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분의 과거의 삶도 이제는 그 공동체를 위한 레모네이드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오랜만에 아주 멋진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를 주제로 설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니 실제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특히 사회에서 레몬이라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지금은 누구를 향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말씀하시고 계신지 그래서 어떤 멋진 공동체를 창조하시길 원하시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도전합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자기들은 제사장의 권위를 갖고 있는데, 자기들의 허락 없이 말씀을 전하니 이런 도전을 한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에게는 하찮은 시골뜨기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시골뜨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니 말이 안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26, 27절 말씀입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짜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I don’t know”처럼 명답이 어디 있습니까? 알지 못하겠다고 하면 최소한 중간은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명답이 아니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KO펀치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KO펀치를 맞고 어리둥절해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묘한 질문을 하십니다. 28절 이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들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처음 것보다 아주 질문이 너무 쉬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상의도 안하고 선뜻 답변합니다. “둘째 아들이니이다.” 모두가 바로 자기들이 둘째 아들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1절 중반절 이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동안 KO펀치를 맞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잠시 깨어났는데 이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듣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그동안 멸시하고 있던 세리와 창녀들이 둘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아마 예수님께 대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첫째 아들이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입으로만 “예”하고 놀러간 사람이란 말입니까? 증거를 대십시요. 우리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리와 창녀들이 ‘예’한 후에 놀러나간 첫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32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가 들어 납니다. 예수님은 방금 나눈 대화를 사용하여서 그들이 첫째 아들임을 증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 제사장들에게 질문하였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에 제사장들은 무엇이라고 답변하였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요한을 믿지 않소”라는 말입니다. 요한을 믿지 않은 이 사실이 바로 첫째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뉘우쳤습니다. 이들은 믿었기에 둘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요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먼저 믿은 자들입니다. 먼저 “Yes”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었다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먼저 “Yes”한 그 사실 때문에 나중에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요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먼저 믿은 교만이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곧 첫째 아들의 특징은 먼저 “Yes”했습니다. 먼저 믿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은 그 믿음으로 인해 나중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한도 예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요한과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들 눈에는 하물며 세리와 창녀는 죄인들 중에 죄인입니다.
반면 첫째 아들에게 소외를 당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들은 둘째 아들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no” 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소외된 자가 되었습니다. 소외된 아픔으로 인해 그들은 어느덧 믿는 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이들은 요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오늘 본문 말씀에는 복잡한 인간 심리 기전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것에는 단순한 질문이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첫째 아들이십니까, 둘째 아들이십니까? 그래도 “나는 둘째 아들이지”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내가 첫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쉽게 판가름을 낼 수 있을 줄 압니다.
폴 투르니에라는 유명한 불란서 정신과 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메뉴는 ‘마데이’라는 소스를 곁들인 소 혓바닥 요리였다고 합니다. 이 식당은 점심에는 한가지 메뉴만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지배인을 불렀습니다. “이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요리를 시킬 수는 없을까요?” 지배인은 “물론이죠, 괜찮으시다면 쇠고기 필레를 정성껏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식사 중에 두 분은 자연스럽게 남편이 연구하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제는 ‘죄책감’이었습니다. 대화도중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 앞에서 메뉴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을 때 죄책감을 느꼈던 걸 아세요? 당신은 언제나 당신 앞에 놓인 것을 그대로 먹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은 내가 상당히 까다롭고 변덕스럽다고 생각할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닌 밤에 홍두깨를 맞은 기분입니다. 금방 남편은 반응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잖소!” 계속 그녀는 대답합니다.
“아니죠. 당신의 침묵은 말로 하는 것 이상이라고요!” 남편도 가만히 당할 수만 없었습니다.
“뭐라고? 나는 모든 사람이 거리낌이나 가식 없이 자기 자신이 될 권리, 심지어 의무를 위하여 싸워 왔소. 그런데 당신은 내 비난이 두려워서 감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단 말이오!” 남편은 아내가 느꼈던 죄책감의 책임을 다시 아내에게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폴 투르니에는 자신의 책 ‘죄책감과 은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옳았다. 아내가 지배인과 말하는 동안 나는 침묵을 지키면서 아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거의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아내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의무에 대한 열성적인 투사로 자처할 수 있었지만, 정작 아내가 나와 다르게 행동하거나 나와 다른 그녀 자신을 드러냈을 때 말없이 그녀를 나무라고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나는 아내의 마음속에 거짓된 죄책감을 심고 키워 온 셈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죄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폴 투르니에는 자신은 첫째 아들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말없이 아내에게 죄책감을 주곤 했던 첫째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폴 투르니에의 글을 읽고 나면 누구나 스스로 첫째 아들임을 고백하게 될 줄 압니다.
첫째 아들의 특징은 남에게 죄책감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죄책감을 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왜 죄책감을 줍니까? 나는 먼저 믿은 자이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행한 자니까.
저는 사실 이 글을 읽고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기독교인 중에 한 분이 바로 폴 투르니에입니다. 저의 집에 아마 10권 이상 이분의 책이 있을 줄 압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하나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 관한 책인데 결혼 주례 때 종종 인용도 합니다. 결혼에 대해서 그처럼 멋진 책을 지은 분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부인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고….
이 분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한 마디로 절망입니다. 모든 크리스챤은 첫째 아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곧바로 이웃에게 죄책감을 안겨다 주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시작하면 우리보다 늦게 믿는 사람들이 있게 되고 그들에게 늘 죄책감을 주게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토록 부부생활에 대해서 훌륭한 책을 썼어도 부인에게 죄책감을 주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서 동시에 이웃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일견해 읽으면 우리가 얻는 해답은 단순합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둘째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죠?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길은 간단합니다. 세리와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으면 죽었지 세리와 창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세리와 창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 안에 있는 본받을 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리와 창녀로부터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마지막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제사장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씀대로 사는 제사장들은 왜 요한을 믿지 않았고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을 쉽게 믿었겠습니까?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의로 말미암아 이웃을 비판의 눈으로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의를 행하면 행할수록 인간의 눈에는 이웃을 보는 눈에 병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웃의 죄를 먼저 보게 되나 봅니다. 이웃의 죄를 먼저 보는 병이 걸린 제사장들은 어느덧 요한 안에 있는 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의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병들었기 때문에….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의를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웃이 조금만 선을 행해도 이웃을 의롭게 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요한이 나타났을 때 이들은 쉽게 요한 안에 있는 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가면 갈수록 건강해졌습니다. 아름다워졌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대로 살다 보면 첫째 아들이 됩니다. 곧 이웃을 정죄의 눈으로 보게 되기 쉽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레몬처럼 여겨집니다. 쓴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둘째 아들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레모네이드가 있습니다. 그 레모네이드는 모든 사람을 도리어 의의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입니다. 곧 오늘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행함으로는 첫째 아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보는 눈은 둘째 아들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웃을 정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웃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약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레모네이드입니다. 곧 둘째 아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의 눈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보다 위대하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습 안에 쉽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쉽게 주님의 고백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교우 여러분, 말씀대로 살면서 한편으로는 세리와 창녀들의 눈을 소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순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세리와 창녀들의 눈을 본받는 삶을 사십시다. 세리와 창녀들은 이웃을 보면서 늘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 저분 안에는 내가 본받아야 할 어떤 훌륭한 모습이 있을까?” 그리고는 그 분의 모습으로 인해 감격해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또 생각합니다. “이 분에게는 어떤 놀라운 모습이 있을까?” 이웃을 대할 때 이런 자세로 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반면 우리가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저런 죄를 짓고 있지. 나처럼 말씀대로 살아야지”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기간 이웃 안에 담겨진 위대한 모습을 찾아 여행을 떠나십시다. 이웃 안에 위대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때까지 상상의 여행을 떠나십시다. “저분 안에는 어떤 멋진 모습이 있을까?” 그리고는 마음껏 멋진 모습을 상상하고 그 멋진 모습을 그분 안에 넣어 보십시다. 특히 레몬이라고 생각했던 분 안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찾아 가십시다. 그 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동안 이웃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책임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동생들을 보라.”
말씀을 거둡니다.
한두 번 말씀드린 줄 압니다만, 저는 설교 준비 전에 짧은 편지를 늘 씁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하기 전에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직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회계사를 하는 친구인데 지금이 제일 바쁜 세금 시즌입니다. 늘 이맘때면 항상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펜을 드네.
세금 시즌이 돌아오면 자네 생각이 종종 난다네.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 다니는 자네의 모습 말일세.
해결사의 웅장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잠시 설교 준비 전 펜을 들었네.
내용은 없는 편지일세. 전에도 그랬었지만….
그저 나의 마음속에 있는 자네의 멋진 모습을 생각하면서 무작정 펜을 들었으니 말일세.
요즘 필라에도 내려 갈 일이 별로 없군.
아니면 전처럼 에너지가 많지 않아 피하는 건지.
하여튼 멋지게 사는 자네의 모습을 잠시라도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라네.
즐겁게 편지를 쓰고 또 마치려 하네.
싱거운 편지라고 놀리지 말게.
내 마음에는 자네를 생각하는 포근함이 있으니.
또 연락하세
부활절을 기다리며.”
싱거운 편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친구의 모습 안에 있는 주님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저의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는 편지입니다. 언젠가 이 친구도 주님을 영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편지입니다. 이와 같은 편지를 수없이 쓸 때 어느새 우리는 세리와 창녀를 닮은 자가 되지 않을까요?
사실 저는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이 친구에게 많은 빚을 지은 사람입니다. 가장 큰 빚은 이 친구는 최고의 눈을 가지고 저를 보아 왔습니다. 늘 최고의 의인으로 저를 대해주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빚을 갚을 차례인 것 같습니다. 이 친구가 저를 본 눈으로 제가 친구를 보아야합니다. 모든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언젠가 주님께서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물으실 때 저는 동문서답이지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둘째 아들을 본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첫째 아들입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내 모친 과 내 동생들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