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9.03.08
예배명 : 사순절 둘째 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사배를 갚겠나이다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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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지은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볼까요?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기형이 되었습니다. 참새들 사이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노숙자 아저씨의 눈에 이 참새가 띄었습니다. 아마도 참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참새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참새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아먹은 셈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듭니다. 함께 꿈을 꾸었는데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나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이 이야기에 혹 빠졌습니다. 무조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빠졌나 차분히 생각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진 부리’가 제목인데 부러진 부리의 참새의 모습에 저는 쉽게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동화되었겠습니까? 부러진 부리의 아픔을 저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목사님은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곧 참 공동체는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라고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삶을 사시면서 부러진 부리의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 이상 기형이 되는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의 부리는 멀쩡한데 나의 부리만 부러지는 경험을 한번이상 다 하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들 사이에 낄수 없는 고통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톨스토이도 아주 꼭 맞는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 같이 같다. 하지만 불행한 개인들의 불행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하나 같이 같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 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부러진 부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처럼 부리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가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부러진 것은 같으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도리어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문제를 도리어 어떻게 축복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자기 키로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부자이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가 삭개오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이며 키가 작은 세리장이 뛰어 가니 모두 재미있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삭개오 세리장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뛰어 가지.” 그런데 뛰는 것보다 더 웃기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데입니다. 삭개오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열심히 뛰어가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소리내어 킥킥 거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해서 걸리면 다음번에 세금을 왕창 내야할지 모르니깐, 조심조심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삭개오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입니다. 잠시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키가 작아도 그렇지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라면 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섞여 있을 줄 압니다. 키가 작으면 제일 앞에 나가서면 됩니다. 제일 앞에 나가서면 뒤의 사람들에게 전혀 방해가 안 됩니다. 키가 큰 사람들에게는 삭개오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키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 세리입니다. 곧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죄인들과 옷만 스쳐도 죄가 옮겨 온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삭개오만 나타나면 이들은 자리를 피합니다. 줄행랑을 칩니다. 왜냐하면 죄가 옮을 가봐. 삭개오는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앞에 나가서면 사람들이 다 피할 것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예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 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비통해 여깁니다. 아마 삭개오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뽕나무로 뛰어 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를 쉬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습니다. 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실시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이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초대하였습니다. 아주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였습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사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수백 명의 주민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광고도 없습니다. 방문객들은 막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방문객들은 군중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자기들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두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두 다른 의견의 그룹이 생깁니다. 잠시 후에는 두 그룹의 대변인이 생깁니다. 논쟁은 싸움으로 변해 갑니다. 드디어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발전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 때 교수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실험이었다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심리학 교수들은 다시금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재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자신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모두 부러진 부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의 부리를 생각할 때는 달라집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중구조로 봅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매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는 세상에서 유일한 문제입니다. 남의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흑 아니면 백.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모두 부리가 부러진 면에는 같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죠? 서로 다른 면을 인정하며 포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이웃을 볼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의 이중구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대하는 사람들도 이중적 판단 구조로 삭개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검은 색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독특한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도 부리가 부러져 있으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러진 부리를 가진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검은 색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눈총뿐입니다.
이 때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던 예수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뽕나무 위에 있으니 자기에게까지 쫓아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소리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십니다. 자기가 있는 뽕나무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회개하라” 소리치실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숨깁니다. 순간 예수님이 뽕나무 밑에 까지 오셨습니다.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도 검정색과 나쁜 것의 대명사로 살아오면서 많이 기가 죽어 있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까지 검정색이니 나쁜 것이니 불리게 되는 시간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순간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립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삭개오만 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하길 원하시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를 찾아 오셨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을 모셨습니다. 삭개오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무리는 어쩔 수 없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검던가 희던가 둘 중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은 다 다르면서도…. 삭개오를 왕따시켰던 무리는 이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볼 줄 모르는 무리는 금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곧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즐거운 시간을 나눕니다. 삭개오와 웃고 놀고 별 장난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와 같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자가 자기 집에 함께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삭개오는 난생처음 자기 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것이 삶이로구나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갑자기 일어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부자가 재산 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입이 많아질수록 십일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얼마큼 큰 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 곧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은 경우는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삭개오가 공연히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면 최소한 4배는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던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제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시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도 삭개오처럼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를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한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나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삭개오가 그러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협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소개하는 장면과 두 주전 본문 말씀 곧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장면과 연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흔들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살려고 할 때마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합니다. 왕따를 당하면 포기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년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순간 삭개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꼼짝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이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삭개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테오도르 댈림플(Theodore Dalrymple)이라는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소에서 죄수들을 상담하며 치료하는 의사인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죄인 줄은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죄수들이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데, 한 죄수는 교회의 기물을 늘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훔치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왜 교회당 관리를 소홀히 해서 자기로 하여금 훔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관리를 잘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소개할까요? 이 사람은 비디오등 전기제품들을 잘 훔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치는 이유는 의사들 잘 못이라는 것입니다. 빨리 좋은 약을 개발하여 자신의 도벽을 없애지 못하기에 자신이 자꾸 훔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죄를 계속 짖고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흑과 백의 관점에서 선인과 악인의 이중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킵니다. 그러니 토색하는 것은 자신을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토색을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신비입니다. 죄인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죄는 반복되어 짓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합리화합니다. 바로 우리도 죄의 신비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 안에 있던 이런 죄의 신비, 죄인의 신비가 박살이 났습니다. 삭개오는 고백한 것입니다.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왜 이런 고백을 할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안에 있는 죄의 신비가 깨어질 수 있었을까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먼저 사순절기간 우리 각자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그런 후 이웃을 향하여 외치십시다. “내 모친들과 내 동생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번 사순절 오늘의 삭개오를 찾아 가십시다.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채 외로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찾아 가십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십시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참 모친과 참 형제와 참 자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백할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월요일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저는 요즘 눈만 오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집니다. 공사가 지연되기 때문입니다. 화요일에 교회 왔더니 공사장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있고 일꾼들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예뻐 보였던 하얀 눈들이 이제는 별로입니다. 특히 공사장에 쌓인 눈들은 까맣게 보일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본당에서 기도를 합니다. 순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시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 이래서는 안 되지 눈이 무슨 죄가 있어.” 그리고는 공사장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눈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소리쳤습니다. “고맙다, 눈아.”
사실 눈 한 송이 한 송이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운이 나쁘게 우리교회 공사장에 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눈이 소유한 모양은 전 세계에 지구 역사에 유일한 모양이 아닙니까? 우리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그러고 나니 눈이 예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예쁜 눈들을 내가 괄시했구나”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어느덧 눈은 제 손에서 녹아서 자기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순간 눈이 안되 보였습니다. “내 손에 들어왔기에 빨리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었군.” 어느새 눈은 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물.’ 아주 친밀한 생각이 어느새 들어왔습니다. 저의 몸의 70‐80%가 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물과 저는 하나인 것입니다. 아니 방금 전 제가 괄시했던 눈은 저와 하나인 것입니다. 흑백을 가르는 안목으로 보았었기에 잠시 까맣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눈은 저와 하나였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하나로 눈과 저는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눈가 제가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 인간관계는 어떨까요?
사람과 눈은 물을 통해서 하나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은 주님의 피로 인해서 하나됨을 느낍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부러진 부리가 다를지라도 주님의 피로 하나된 축복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사순절 기간 주님의 피를 만지십시다. 주님과 하나가 되십시다. 이웃과 하나가 되십시다. 어느덧 이웃을 흑백으로 가르는 눈을 잃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흑백을 가르는 안목으로 보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서로서로 다르게 부러진 부리의 모양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한 식구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향하여 외치십시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그리고 함께 고백하십시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