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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서 온 작은 마음

날짜 : 2008.12.21
예배명 : 성탄주일 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태초에서 온 작은 마음
성경본문 : 미가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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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듀간 챠터( Dougan Chater)라는 장교가 독일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1914년 크리스마스 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냅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였으니 바로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후 첫 크리스마스가 되는 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10시경이었습니다. 나는 난간에서 독일군 진영을 정탐하고 있었습니다. 한 독일 군인이 손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두 명이 그들의 참호를 나와서 우리 편으로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총을 발사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영국군과 독일군은 함께 무기를 놓고 모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악수를 하며 서로 성탄을 축하하였습니다.”

아마 이들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 오늘까지 최고의 성탄을 맞이한 사람들 중 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세 그룹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이 장교의 어머니와 같이 이 편지를 읽는 사람입니다. 저도 이 편지를 읽었고 또 여러분도 지금 이 편지를 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 모두 마음이 훈훈해 짐을 느낍니다. 진정한 성탄절의 멧세지를 느끼게 합니다.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영국의 장교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장교는 먼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려고 자기의 참호를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독일군의 손 흔드는 것을 보고 뒤늦게 응답한 사람입니다. 영국군들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영국군들이 실수로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들도 큰일을 한 셈입니다.
한편 제일 중요한 사람들은 물론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무기를 버리고 참호를 나왔습니다. 이들의 용감한 행위로 인해서 성탄절의 훈훈한 멧세지는 오늘도 온 세계에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독일군과 영국군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국군들도 성탄절에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난간을 넘어 독일군의 동태만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용감하게 무기를 버리고 참호를 나왔습니다. 무엇이 차이였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주전 약 730여년 전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무난합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는 앗수리아라는 강대국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 의해서 이스라엘 곧 북왕국이 멸망합니다. 남왕국만 남게 됩니다.
요즘 Museum of Fine Arts에서는 앗수리아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 교역자님들과 같이 가 보았는데 이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하여 있었는지를 한 눈에 보게 됩니다. 오늘 설교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먼저 관람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전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앗수리아 궁전의 유물들입니다. 많은 벽화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말이 벽화이지 벽에 그림을 조각한 것입니다. 벽에 조각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까지 3천년이 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많은 벽화가 거의 전부 전쟁에 관한 벽화입니다. 이웃나라와 싸우는 그림입니다. 딱 하나만 평화로이 사자와 다른 짐승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것이고 다른 모든 벽화는 모두 전쟁벽화입니다.
한 벽화를 보니 포로들이 빨래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뒤에서는 앗수리아 군인이 빨래를 잘못하면 채찍을 가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뼈를 가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앗수리아 당시 늘 까불던 나라가 바벨론인데 바벨론 포로들을 잡아 온 다음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 선조들의 뼈를 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도 중요한지 이를 왕궁의 벽화로 조각하게 한 것입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것 소개해드릴까요? 이 당시 귀족들은 침대 밑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개들을 조각하여 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들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Don’t think. Bite,’ ‘Loud is his bark,’ ‘Biter of his foe,’ ‘Catcher of the enemy,’ ‘Expeller of evil.’ 이 다섯 개들의 이름이 앗수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자 이런 앗수리아 사람들의 소문을 이스라엘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라를 이웃으로 삼고 있는데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런데 미가가 부패한 이스라엘인들을 향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딸 군대여’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표현되어 있는데 ‘그들’은 앗수리아 군대를 의미합니다. 곧 앗수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언젠가 무서운 앗수리아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가의 예언들 듣고 등골이 오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웃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골이 오싹 오싹한데 이 무서운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앗수리아 쪽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겁이 나는데 이들이 직접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들은 후 이들의 공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 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이들에게 계속 예언을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앗수리아인으로 인하여 덜덜 떨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이제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병주고 약주고’라고 할까요?
베들레헴에 있는 한 족속에서 한 사람이 태어날 것인데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근본은 태초에 부터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앗수리아가 있기 전에 아니 세상이 있기 전에부터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미가의 멧세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인들은 앗수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앗수리아 앞에서 상상력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이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앗수리아가 세상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미가는 다른 존재를 소개해 줍니다. 참으로 세상의 시작이요 마지막인 존재를 소개해 줍니다. 그 분은 베들레헴의 작은 족속에서 나올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미가는 두려움으로 굳어져 있는 그들의 상상력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앗수리아 앞에서 상상력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라. 태초에부터 계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오시고 계시다. 이분이 메시야이다.’
미가의 예언을 듣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앗수리아로 인해서 굳어져 있는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앗수리아라는 세상보다 더 크고 위대한 세상이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됩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이들에게 미가는 계속 말씀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잠시 이스라엘인들이 어려움을 당하지만 언젠가는 이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인들을 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귀절에 더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지금 미가는 이스라엘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야만 이해하게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인들은 안연히 거하게 될 것을 상상합니다. 또한 이 메시야는 창대하게 되실 분이심을 상상합니다. 상상력이 두려움을 이기기 시작합니다. 역사적 위기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상은 몹시도 중요한 것이었나 봅니다.

여기서 잠시 초대교회 수도사들이 펴낸 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홍해 근처의 어떤 수도원에 한동안 무료하고 따분하며, 피곤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수도사가 가만히 발밑을 보니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아주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깊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 개미들의 존재를 보고 무료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야 합니다. 또 끊임없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바쁘게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일거리를 만들어 가며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이 부족하게 되면 세상은 죽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수도사들도 기독교인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상은 아무런 상상이나 다 좋을까요? 자기마음대로 하는 상상은 공상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다시 미가의 예언으로 돌아 가 봅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메시야로 인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앗수르인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단지 이 메시야는 이스라엘인들을 앗수리아에서 구해주는 것뿐 아니라, 앗수리아를 뿌리채 뽑고야 마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상상은 이제 단순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리아의 멸망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전에는 ‘앗수리아’하면 늘 다섯 개의 개의 이름들을 상상했던 이스라엘인들이었을 것입니다. ‘Don’t think. Bite,’ ‘Loud is his bark,’ ‘Biter of his foe,’ ‘Catcher of the enemy,’ ‘Expeller of evil.’ 그런데 이제는 언젠가 메시야로 인해서 멸망당하고야 말 앗수리아를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그들은 어느덧 메시야로 인해서 평강 가운데 거하게 될 자신들의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상고에서 오시는 이, 태초에서 오시는 이를 상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인들이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그 후에도 살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가가 이런 예언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스라엘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아름다운 상상을 하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갖고 있었던 모든 두려움을 씻어 버리고 도리어 최고의 상상을 하면서 최고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를 상대하던 안하던 미가의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예언의 성취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선물을 이 땅 위에서 부터 받을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의 삶을 살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 독일군인은 크리스마스에 총을 놓고 참호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상상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앗수리아의 개의 이름을 상상하는 자가 아니라, 아기 예수를 상상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는 상고에 태초에부터 계신 분임을 상상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고에 태초에부터 계신 아기 예수가 자기를 위해서 태어나신 것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 그는 더 이상 총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참호 밖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진실로 자기의 삶을 통하여 아기 예수의 오심을 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와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동방박사와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상상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상상의 사람을 한분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정호승 시인의 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정호승 시인이 제가 설교 중에 제일 많이 언급했던 분 중에 한분일줄 압니다. ‘씨앗’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이 시를 읽고 왜 정호승 시인이 이처럼 훌륭한 시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무엇이었을까
오월의 나뭇잎에 어리는 햇살이었을까
길가에 핀 한 송이 작은 풀꽃이었을까
아니면 남해의 어느 섬 절벽 위에 둥지 튼
바다새의 작은 새알이었을까
아마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엄마의 사랑의 마음이었을 거야
마음의 중심에 있는
작은 씨앗이었을 거야”

시인은 보통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상상력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엄마의 사랑의 마음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엄마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작은 씨앗이라고 상상합니다. 이러한 자화상을 갖고 있으니 그러한 멋진 작품을 펼쳐 내곤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분의 상상력은 지금도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보다도 더 큰 상상의 세계를 안고 우리가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상고에 태초에부터 오셔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을 상상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이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임을 작은 씨앗임을 상상하기 원하십니다. 그 씨앗이 마지막으로 각자의 어머니의 가슴에 담겨 있다가 태어났음을 상상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아기 예수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엄마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아니 자신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그들은 앗수리아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앗수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최고의 상상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최고의 상상의 세계를 앗수리아 사람들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무엇을 상상할 것이냐고요? 그들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엄마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었다는 상상을 할 것입니다. 아니 그들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었다고 작은 씨앗이었다고 상상할 것입니다. 이 때 진실로 앗수리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다 상고에 태초에서부터 온 사랑의 마음이었다고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앗수리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의 가슴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를 상상하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는 성탄 선물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오늘 성탄 주일을 맞아 우리는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상상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가득 차있습니다. 사랑의 작은 씨앗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 이웃이 바로 그 안에 있는 작은 씨앗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주 토요일 건축을 위한 찬양 감사의 밤을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셨습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성탄주일을 맞아 미가는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장로님들뿐이 아닙니다. 그 때 장로님들의 이 고백을 들었던 모든 분들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작은 씨앗입니다.”
오늘 두 명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성인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분들에게도 미가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함께 나눌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의 이웃에게 드리십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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