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8.07.1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
성경본문 : 야고보서 5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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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래이본(Shane Claiborne)씨가 이라크 전쟁이 막 시작한 후에 이라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에 있을 동안 거의 매일 예배에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 미국으로 돌아 오기 며칠 전에 드렸던 예배는 가장 인상 깊은 예배였다고 합니다. 개신교 카톨릭 동방 정교회 등 중동 지역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한데 모여 모슬렘 사회를 향해 기독교 교회의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며 당신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수백 명의 크리스천들이 계속 자리를 채웠습니다. 이라크에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그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실로 거룩한 체험이었다고 합니다.
쉐인 씨는 예배가 끝난 뒤에 그 모임을 주관했던 카톨릭 주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에 크리스천들이 정말로 많아 깜짝 놀랐다고 말하자, 그가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합니다. “기독교가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죠?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의 땅입니다.” 이에 쉐인 씨는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곧 이어 주교가 물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 전쟁에 찬성하지요? 그러면 크리스챤들은 이 전쟁에 대해 뭐라고 말합니까?”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가… 교회가 될수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쉐인 씨의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흘려 내렸다고 합니다.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위해 아니 미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라크의 주교의 생각으로는 미국의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미국의 크리스챤들은 참 크리스챤의 본질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크리스챤들과 교회가 그 본질을 되찾을까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보면 이락의 주교님이 바로 우리 미국의 교회에게,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크리스챤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첫 절을 먼저 봉독해 드립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
이라크의 주교의 입장에서 본문을 각색해 볼까요?
“들으라 미국 사람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사실 야고보는 지금 이 당시 땅 주인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이 당시도 진짜 부자는 땅주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땅만 소유하고 놀고 먹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교에게는 미국 사람들이 야고보 당시의 땅 주인과 같았을줄 압니다. 실제로 지금 주교는 세계 최고의 부자인 미국인들에게 “울고 통곡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부자들은 울고 통곡해야 합니까?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었으면 됐지. 야고보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큰 어려움의 시간이 닥아 오고 있는가 봅니다. 부자들에게 닥아 오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당시 부자가 왜 이처럼 어려움에 처해야 하는지 더욱 궁금해 집니다. 그 다음 절부터 그 이유가 설명되어 지고 있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 먹었고, 금과 은은 녹이 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재물이 썩고 옷이 좀 먹고 금과 은이 녹이 씁니까? 가만히 놓아 둘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까? 옷을 입지 않고 가만히 놓아 두면 언젠가 좀이 쓸게 되어 있죠. 금과 은도 녹이 쓸게 되어 있죠. 이와 같이 재물도 가만히 놓아 두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야고보는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그런데 언젠가는 그 녹이, 좀 먹은 그 좀이, 썩은 냄새가 증인이 되어 부자들을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부자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도로시 데이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외투 두벌을 갖고 있다면 한 벌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멧세지를 잘 풀이 하여 선포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남과 나누지 않은 것들이 녹이 된다는 것입니다. 좀이 된다는 것입니다. 썩는 냄새가 나게 됩니다. 이것들이 증거가 되어 끝내 불같이 살을 파먹게 됩니다. 남과 나누지 않아서 생긴 녹이 우리들의 살을 파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 소개해 드린 쉐인 클래이본(Shane Claiborne)씨가 인도 캘커타 어느 초등학교에서 연극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도로시 데이의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외투 두벌을 갖고 있다면 한 벌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자 맨 앞줄에 있던 아이가 쟈켓을 벗어 교단에 던진 뒤에 환하게 웃더니 “옷이 없는 애들한테 주세요!”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아이가 미래에 어떻게 될까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주 멋진 인생을 살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아이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릴 때 이미 깨달은 아이입니다.
이 아이처럼 행했던 부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을 만나 인생이 뒤바뀌어졌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록펠러(Rockefeller)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그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55세에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루는 최후 검진을 받기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갔을 때 병원 대기실 벽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는 그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정을 느끼면서 눈물이 나서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잠시 후 시끄러운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병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입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해 주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 그 순간을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하고 남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의 병도 신기하게 나았습니다. 55세 때 1년밖에 더 살수 없다던 그가 98세까지 살면서 일도 많이 하고 재물도 많이 모아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시카고 대학도 그의 재단으로 지은 학교입니다. 도시마다 그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는 재단이 없는 곳이 없고 길 이름까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데가 많아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는듯 합니다.
부가 녹과 좀이 되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을 때 아니 썩게 하고 있을 때 이웃을 발견함을 통해서 참 인생을 발견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록펠러와 같은 사람이 살았던 미국이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어느 이라크의 주교가 이제는 미국을 위해서 아니 미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을 하기까지 되었을까요? 4절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사실 미국에 사는 부자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삯을 다 주었으니깐…. 정말 삯을 다 주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가장 합리화된 정책이 소위 말하는 최저임금 보장(minimum wage)입니다. 현재 미국 연방정부에서는 최저 임금이 $5.85입니다. 다행히 매사츄세츠주는 $8.00입니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고용인들에게 최저 임금을 주고 나면 법적으로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최저 임금을 주었다고 해서 품군에게 주어야 할 임금을 다 지불한 것일까요?
저희 교단에 노숙자(homeless)들을 위해 사역하시는 김진숙 목사님이 계십니다. 평생을 노숙자를 위해 섬긴 후 노숙자들에 관한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노숙자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노숙자들의 40%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직업 없이 남의 돈 구걸하며 사는 자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하는데 노숙자들 중 40%가 직업이 있습니다. 이들 중 대개가 최저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최저 임금을 가지고는 아파트에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학적으로 housing wage라는 말이 생겨 난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이 two bedroom아파트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임금입니다. 현재 $17.31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것은 미국의 전국적인 평균치고 보스톤에서는 택도 안되는 숫치일줄 압니다. 하여튼 미국 전국적으로 보면 시간당 $17.31을 벌어야 아파트에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은 법은 아닙니다. 참고 숫치에 불과합니다. 법은 미국 전국적으로는 $5.85, 매사츄세츠주에서는 $8.00입니다. 곧 최저 임금보다 적어도 세배를 받아야지 그나마 아파트에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고 있는 고용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야고보의 말씀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해당 안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최저임금제도가, 법이 그들의 횡포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 도리어 부자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법으로 인해서 부자들은 더욱 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 이야기는 쇼킹한 메세지를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쉐인 클래이본 씨의 이라크 방문후 쓴 이야기입니다.
“이라크의 한 병원을 방문했던 게 기억난다. 의사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하거나 목슴을 잃은 어린이들을 침대에 싣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떤 소녀는 침대에서 진저리를 치며 ‘제가 미국한테 무슨 짓을 했죠? 무슨 잘못을 했죠?’라고 소리쳤고, 어떤 아버지는 미사일 파편을 맞아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끌어 안고 ‘이 전쟁이 이 아이에게 무슨 해방을 준다는 겁니까? 이런 해방은 원하지 않아요. 이게 민주주의라면 미국이나 가지라고 하세요!’라며 절규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이상한 해방자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말이 그곳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의사들은 벌써 일주일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으며 개전 초기 세 시간 동안 민간인 사상자가 100명이 넘었다고 설명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참상의 한 가운데서 그 병원의 원장이 했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폭력은 상상력을 상실한 자들의 것입니다. 당신 나라는 상상력을 잃었습니다.’ 그의 두눈에 맺혔던 굵은 눈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특히 이 말이 저의 가슴을 깊이 울렸습니다.
“폭력은 상상력을 상실한 자들의 것입니다. 당신 나라는 상상력을 잃었습니다.”
상상력을 잃을 때 사람은 폭력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이라크의 주교는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라크의 어느 의사는 미국은 상상력을 잃은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은 상상력을 잃은 나라이고 이 미국이 다시 상상력을 회복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이 잃은 상상력이 무엇일까요? 사실 미국처럼 상상력을 강조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처음 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를 다녔는데, 기초 과목들이 대충 끝나고 응용과목을 듣기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4-5명씩 그룹 토의를 시켰습니다. 그 때 제가 놀란 것은 기초 과목할 때는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던 친구들이 응용 과목을 하면서 토의 시간에 들어 오니 얼마나 똑똑들 하던지요.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신학의 세계를 펼쳐 가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린 것은 미국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두 풍부한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구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라크의 의사는 미국을 향해 상상력을 잃은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라크의 의사의 생각이 틀렸나요?
미국인들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 상상력으로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잃어버린 아니 그들이 아니라 미국에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한 가지 상상력이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이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최저임금을 받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들의 아픔을 상상하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우는 소리를 듣는 상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우는 소리가 지금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상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상상력을 잃어 버리니 남은 상상력은 어느덧 이웃을 해치는 폭력에 사용하게 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상상력을 잃어 버릴 때 우리는 폭군이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상상력을 잃어 버릴 때 그들이 받는 세계 최고의 교육도 폭군의 교육이 되어 버립니다.
교우 여러분, 미국이 아니 부자들이 그 귀한 상상력을 잘 못 사용하게 된 이유는 이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상상하는 힘을 잃었을 때 그 귀한 상상력은 엉뚱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였을 때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 대표적인 예가 록펠러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록펠러는 다음의 야고보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새겨 들은 사람입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실 록펠러는 이 마직막 때에 스스로 사치하고 연락하며 자신을 살지게 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그러나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것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삶으로 바친 것입니다. 그 결과 55세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 98세의 장수를 누린 것입니다.
한편 마지막절인 6절 말씀은 가난한 자를 새롭게 보게 하는 멧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옳은 자,’ ‘그는’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옳은 자’와 ‘그는’을 누구를 말하나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해석은 ‘옳은 자’는 바로 예수님으로 생각합니다. 두번째 해석은 ‘옳은 자’는 가난한 자들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요 설교자인 저로서는 둘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둘다 맞다고 봅니다.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옳은 자’는 예수님이며 또한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이며 또한 가난한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옳은 자’를 상상하느냐 상상하지 않느냐 입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맞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가? 그 ‘옳은 자’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교우 여러분,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것이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것을 잃을 때 우리는 어느덧 합법적인 폭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삶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나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삶의 경이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난을 위한 웹싸이트가 있습니다. 케어(Care)라는 자선단체의 웹싸이트인데 홈페이지(homepage)에 들어 가보면 한 사람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주 사람은 바뀌지만 사진과 함께 그들을 소개하는 글은 언제나 같습니다. “I am powerful.” 가난하지만 승리감에 가득찬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소개되어 집니다. 그 들의 모습을 보면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상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상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에게 정죄함을 당해도 심지어 죽임을 당해도 대항하지 않을 정도로 powerful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놀라운 세계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돕지 않으면 가난한 그대로 아무 불평없이 죽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며 그들을 도울 때 진정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하지 않겠습니까?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마더 테레사의 글을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이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엄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보다도 삶을 살아내는 용기가 대단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가난을 택하지만, 그들은 어쩔수 없이 가난을 받아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경이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을 택하든지 가난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미국에 사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가난을 택하는 길만이 남아 있습니다. 가난을 택하는 길은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상상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나누게 됩니다. 삶의 경이를 맛 보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은 경이로운 자들입니다. 진실로 상상력이 풍부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곧 가난한 자들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며 사시는 이해인 수녀가 ‘가난한 새의 기도’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처음 두 단락만 소개해 드립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이해인 수녀는 가난한 자들을 상상하는 분이십니다. 그의 오랜 동안의 상상은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게 한 것입니다. 그 분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가난한자들의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유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가난한 자들이 이처럼 경이스럽고 자유한 자가 되기까지는 많은 역경을 이기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하고 있는 용감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경이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미국에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인 수녀처럼 삶의 경이를 맛 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만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우는 소리를 들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