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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행복

날짜 : 2008.07.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아들의 행복
성경본문 : 요한복음 5: 1-18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80706_0001.wmv

찰스 로턴이라는 영국 배우가 있습니다. 여러 해전 미국 전역을 돌면서 성경 낭독회를 열었습니다. 이 위대한 영국 배우는 성경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낭독하기 때문에 그의 낭독을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자그마한 중서부 마을의 커다란 교회에 들렀습니다. 로턴씨가 성경을 읽는 동안 청중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두 그의 성경봉독하는 것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가 낭독을 마치자 실내에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실제로는 1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청중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 생각되어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일흔 가까운 한 자그마한 노인이 자신도 성경을 읽어보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요청은 허락되었고 노인은 읽기 시작했습니다. 청중들은 그 노인이 웅변, 학식, 어조에 있어서 로턴과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 위대한 영국 배우에게는 없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성경 읽기 대회였다면 찰스로턴이 많이 뒤떨이지는 2등을 차지하리라는 것도 청중은 알아보았습니다.
노인이 낭독을 마치고 청중들이 귀가하기 위해 해산할 때 누군가가 찰스 로턴에게 다가가 노인의 낭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로턴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가볍게 흔들더니 부드럽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노인은 성경의 저자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차이가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곧 이 노인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로턴은 겸손하게 노인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분이라고 높입니다. 자신은 성경을 더 잘 알지만 하나님을 잘 아는 분과 자신과는 표현할수 없는 깊은 차이가 있다고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의미가 없는 줄 압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성경의 저자를 아는데까지 이르러야 할줄 압니다.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러야 할줄 압니다.
팩커(J. I. Packer)라는 분이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제목은 ‘Knowing God.(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about God’(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Knowing God’이라고 부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Knowing God’이라고 제목을 부쳤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시고 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아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물론 병자까지 합하면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병자, 성경을 잘 아는 사람,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38년간 이 환자가 얼마나 고생했겠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감이 잡힙니다. 예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시고 병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yes”로 대답하기 보다는 장황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에 환자는 신이 나서 자기가 38년간 애지 중지 아껴 왔던 자리를 들고 일어 납니다. 일어 나서 걸어 갑니다. 그런데 고치신 바로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이에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들은 성경을 잘 안다기보다는 성경을 유대교적으로 해석한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환자가 율법을 들고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아무 할말이 없었습니다. 단지 할수있는 말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오.”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들의 변론을 펼쳐 갑니다. 반면 병자는 만남을 가지고 자신의 변론을 펼쳐 갑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기들의 신학화된 율법을 가지고 펼쳐간 것입니다. 만일 환자가 자기가 걷고 있는 것을 율법을 근거로 조금이라도 말하였더라면 아마도 한바탕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학적인 지식으로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는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대답한 것입니다.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오.” 환자는 그저 만남으로 답변을 대신 한 것입니다.

좀더 본문 내용을 살피기 전 이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확정 하기 위하여 신부들의 모임을 소집했습니다. 그 모임에 초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칼 라너’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임 중간에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던 사회자는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회의에 참석하던 신부들에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한 뒤에 다시 모여 회의를 계속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참석한 신부들은 자신의 기도 처소로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들은 20분이 못 되어 기도 처소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들은 뛰쳐 나오며 고개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라너만 그의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의 박식한 신학자 라너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올 것이다’ 라고 기대했습니다. 30분쯤 더 경과한 뒤에 라너의 기도실에서 누군가가 뛰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뛰쳐 나온 사람은 라너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라너의 말이 너무 어려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카톨릭 신부들 중에 너무 카톨릭 신학자들이 만남 대신에 신학적인 변론으로 빠지니 이러한 풍자적인 이야기를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라너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의 모습이었을줄 압니다. 사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분들이 때로는 더 권위적으로 보이곤 하지 않습니까?
제가 중학교 일 학년 때 중3 선배가 있었는데 글을 쓰면 모든 어려운 문자를 사용해서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나 존경스러워 보였던지요? 그런데 그 분은 현재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지성인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순진한 중학생들 처럼 사람들은 만남보다는 신학적인 변론 앞에 도리어 머리를 숙이곤 하지 않습니까? 율법을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순진한 사람들의 특성이 아닙니까? 아마 이 병자도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유대인들이 쫓아와 묻습니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그런데 이미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였기에 환자는 더 이상 설명할수가 없었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성전에서 우연히 자기를 고치셨던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yes, no’ 대답이 없습니다. 대신 환자는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달려가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인 것을 알립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완성시키고자 하였다면 ‘yes’ 또는 ‘no’로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만남보다는 율법의 권위 내지 지적 권위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불쌍한 병자의 모습입니다. 이 환자에게는 유대인들이 더 학식이 있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더 권위가 있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음을 받았지만 유대인의 학식과 권위가 예수님의 능력보다 더 커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보다 율법적 사회적 권위가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율법이 만남을 이겼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신이 났습니다. 한 사람만 더 굴복시키면 됩니다. 예수라는 청년의 입에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면 됩니다. 이 자백을 얻기 위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핍박하는 이유는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환자를 고쳤고 환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어떻게 핍박하였다는 내용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핍박을 받았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꾹 참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계속 핍박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씀으로 결정적인 대응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을 발칵 뒤집힙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2:2절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누구가 안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는데 그 누가 감히 안식일에 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이 것을 이어받아 십계명중 제 4계명이 탄생되지 않습니까?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사실 이 제 4계명은 창세기 2:2절에 근거를 두고 탄생된 계명입니다. 그래서 제 4계명에는 창2:2절이 주석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은 안식일에 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은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이단 중에 상이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곧 하나님과 동격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유대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생각해 보십시다. 두 사람이 국가 일을 논의하다가 말 다툼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은 정치학 박사입니다. 특히 대통령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대통령이 일하니 나도 일한다.” 가만히 있다가 상대방이 말합니다. “대통령이 내 아버지다.” 더 이상 대화가 되겠습니까? 말로 안되면 힘으로 하는 수밖에 유대인들은 죽일 방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과 청년 예수, 왜 이처럼 종교로 인해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었을까요? 본문 말씀이 주는 결론은, 유대인들은 성경에 대해서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저자에 대해서 아는 자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는 유대인들은 철저히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고 또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감히 이 성경말씀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거역할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저자에 대해서 알고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숨은 뜻을 저자의 숨은 뜻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그는 저자의 아들이기에, 바로 저자와 동등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는 저자와 깊은 만남이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리 저자와 깊은 만남을 갖고 계신 분일지라도 그렇지 딱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만 할까요?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말씀을 안하실수는 없으셨나요? 결국 이로 인해서 더 큰 고난을 받게 되었는데 가만히 계시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어느 안식일, 예수님은 아침 일찍 일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데스다 못으로 향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뒤따라 가십니다. 38년된 병자 앞에 서셨습니다. 아들인 예수님도 그 앞에 섭니다. 병자는 하나님을 보질 못하니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아들인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병자를 낫게 합니다. 이처럼 선한 일을 하셧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더 가까워짐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버지임을 체험합니다. 결국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더 가깝게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부를수록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복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래서 핍박 가운데서 예수님은 더욱 힘차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울러 이 영원한 행복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도 이 행복을 빼앗아 갈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성경의 저자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대해 아는 자이십니까? 아니면 성경의 저자를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십니까? 성경에 대해서 아는 자들은 성경의 저자를 아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반면 성경의 저자를 아는 자들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아버지와의 만남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뜨겁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낍니다.

앤 화이트라는 분이 아버지로 인한 행복을 다음과 같은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어린 아이일 때 아버지가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갈 때면 침대가 늘 차가웠다. 특히 시트가 그랬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기이불로 내 발을 따뜻하게 덮어 주셨다. 아버지가 잘 자라는 키스를 하기 전에 나는 늘 아버지에게 열 개도 넘는 질문을 하곤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아빠 불러도 돼요?’
‘너무 더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너무 추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무서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배고프면 아빠 불러도 돼요?’
내 질문에 아빠는 늘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그럼’
그제야 나는 내가 사랑을 받고 또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며 편안하게 잠들곤 했다.”
이 글을 읽으면 아빠로 인해 무한한 행복을 누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자는 아빠를 아는 행복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아빠를 향한 행복은 앤 화이트의 행복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번에도 ‘샘터’잡지에 소개된 글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요즘은 ‘행복 시대’가 아닙니까? 그 어느 때 보다 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시대가 아닙니까? 종교도 세상적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가 된 시대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제목은 많은 도전을 줍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박누리라는 미술평론가의 글입니다. 빈센트 고흐의 ‘첫 걸음’이라는 그림을 감상한 후 쓴 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빈센트 고흐는 자주 밀레의 그림을 복사하곤 했다고 합니다. 밀레가 그린 그림을 거의 그대로 본따서 그리곤 한 것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표절이라는 딱지가 붙어도 남을 정도로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사실 밀레의 ‘첫 걸음’이라는 그림을 보고 고흐가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몰론 제목은 같지요. ‘첫 걸음.’ 두 개의 그림을 비교한 후 다음과 같이 박누리씨는 말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고흐의 매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모두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아야한다는 강박간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인생이 반드시 항상 행복해야만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나는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려고 해도 쉽게 행복해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마치 인생에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 않으면 패배자라도 되는 양 ‘행복하게 살자’를 외쳐대는 작금의 파지티브 마인드 컨트롤(Positive Mind Control)붐이 영 못마땅한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저는 우리 크리스챤들의 행복의 모습을 생각해 볼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의 모습은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모습일줄 압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니깐.” 행복이 우상이 된 시대에 참된 크리스챤들의 모습은 바로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이 아닐까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니깐.”
그리고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은 성경에 대해서 아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경의 저자를 아는 자들입니다. 성경의 저자를 알기에 세상적으로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그 분을 늘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향하여 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이제까지 열심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은 늘 노래를 부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세상적으로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온 인류를 향한 멧세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온 인류에게 주신 멧세지입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씀을 거둡니다.
로이 레신(Roy Lessin)이라는 신학자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유명한 글을 썼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만약 지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교육가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의사를 우리에게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과 재물이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업가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즐거움과 쾌락이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길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와의 만남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성경의 저자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기에 그들은 종종 고백합니다. “세상적으로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어디서 일하시는가 살펴 보십시다. 아마도 세상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 계십니다. 그곳에 가서 그 하나님을 만나십시다. 그분이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를 만난 후 함께 고백하십시다. “세상적으로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저도 일해요.”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행복에 가득찬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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