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8.02.1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삭의 눈물
성경본문 : 창세기 22: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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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들레이 베스케(Hadley Basque)라는 한국 참전 용사가 있습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말합니다.
“저는 한국전쟁시 포로가 되었었습니다. 2년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죠. 겨울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북한의 겨울은 살을 에이는듯하죠. 눈이 많이 육?땅은 얼어 붙습니다. 우리는 판자로 만든 수용소 안에서 담요 한장만 덮고 자야만 했죠. 겨울에는 북한 군인들이 수용소 안에 석탄불을 핍니다. 군인들이 불 주위에서 자신들의 몸을 녹히죠. 그런데 우리가 원하면 우리도 석탄불 옆에 잘수 있습니다. 군인들은 가만 둡니다.
“우리는 누구가 살기를 포기했는지 압니다.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불옆에서 잡니다. 물론 불옆이 따뜻하죠. 불옆에 있으면 그 밤을 추위에 떨지 않고 잘 보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따뜻하게 할수록 몸의 저항력은 낮아지죠. 불옆에서 자는 사람들은 독감에 걸리거나 폐렴에 걸리죠.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은 건강하게 삽니다. 그러나 오래 못가죠.
“끝까지 살아 남는 사람들은 불옆에서 자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불 가까이 가려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읽고 곧바로 한국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장교출신이라서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사병들 숙소에 가 보면 소위 말해서 내무반에 가 보면,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는 내무반 가운데 석탄을 사용하는 큰 벽난로가 있습니다. 고참 순서로 벽난로에서부터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일 쫄병이 제일 끝에 자고 가장 고참이 바로 제일 뜨끈 뜨끈한 벽난로 옆에서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대에 쫄병으로 들어 가면 제일 멋진 인생의 길을 가는 준비가 시작되는것 같습니다. 벽난로에서 가장 멀리서 생활하니 말입니다. 그 상태로 군대2-3년을 마치면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세월이 갈수록 고참이 됩니다. 힘이 센사람이 됩니다. 벽난로 가까이 갑니다. 군대를 제대할 때는 전보다 더 초라한 인간이 되어서 제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모두 소원하는 것이 한결 같습니다. “언제 벽난로 가까이 가서 자나?”그것이 바로 인생을 포기하는 길인지도 모르고…. 우리 인생도 매한 가지 입니다. 우리는 모두 벽난로를 향하여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벽난로 옆을 우리가 가야할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군대는 시간만 지나면 언젠가는 벽난로 옆에 가서 잡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만 지나 간다고 해서 벽난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벽난로 옆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요즘 겨울이 계속되고 있는데 돈 많은 분들은 겨울마다 따뜻한 데로 피한을 갑니다. 우리 한국분들은 그런 분들이 많지 않지만 많은 백인 부자들은 따뜻한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그곳에서 지내다 온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분을 가까이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데 그런 분들 별로 부러워 하지 마십시요. 미군 포로인 베스케(Basque)씨에 의하면 그 분들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참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 동안도 별장을 소유한 사람을 모델로 삼고 우리는 지내 오지 않았습니까? 벽난로에 가까이 가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너무 죄의식 갖지 마십시요. 사실 우리는 벽난로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수 없습니다. 벽난로에 가까이 가는 것이 이 세상이 운행되는 힘일줄 압니다. 모두가 벽난로로 가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세상이 망하는 순간일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월 스트릿(Wall Street)의 증권시장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그런 분들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분들이 사라질 때 경제는 곤두박질 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을 내릴 수있는 것은 벽난로에 가까이 가도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고 가까이 가지 않아도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것저것도 아니고 다른 길이 있을까요? 이런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 오늘 사순절 두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함께 그러한 길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잘 아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삭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상고하고저 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때 아들 이삭을 나았습니다.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라의 뜻을 받들어 내어 보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온 정성을 쏟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백세에 나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것도 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를 만국의 아비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자가 바로 이삭입니다. 얼마나 보물과 같은 존재입니까?
그런데 자기의 아들이면 누구나 잘 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벽난로에 가까이 가게하길 원합니다. 벽난로에 가장 가깝게 가는 모습을 보길 원합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길 원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먹을수록 자기도 나이가 먹습니다. 이삭이 1살이 되면 자기는 101살이 되고 이삭이 2살이 되면 자기는 102살이 되고, 이삭이 장가갈 나이 곧 20살이 되면 자기는 120살이 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귀합니다.
나이가 100살 차이라 이삭과 마음껏 잘 놀아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숨박꼭질 정도나 했을까요? 그 당시는 공이 있었는지 몰라도 아마 없었겠죠. 한국식으로 하면 제기차기도 같이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100년을 살았으니 아마도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사회에서 성공하는 자녀가 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생활했던 이야기 어느 날 하나님 음성을 듣고 무작정 그 곳을 떠나는 이야기 무엇 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이야기, 그리고 그 약속을 이을 자가 바로 ‘너’ 이삭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려 주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어릴 때 이미 자기는 만국의 아비의 아들이라는 자각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를 통해서 이루워질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자인지 너무도 잘 알게 됩니다. 이삭은 빨리 성인이 되면 예쁜 아가씨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나을 계획도 세웠을지 모릅니다. 이삭은 온 세상이 자기의 것입니다. 자신은 이 땅에서 최초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의 첫 자녀가 바로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이 땅에서 최초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세상에서 첫번째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것도 자기는 기적적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적의 아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최초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로서 아마 당당하게 매일 매일 신나게 살아 갔을 것입니다. 기적의 능력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많이 계획해 놓으셨으리라 믿고 자신만만한게 자라갑니다. 매일 매일이 신나는 하루 하루였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새로운 신나는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경험을 해서 언젠가 자기도 자기 자녀들에게 많은 이야기거리를 선물로 줄 셈으로 하루를 맞이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전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감돕니다. 아침부터 나무 패는 소리가 들립니다. 날도 춥지 않은데 나무를 사환들이 패고 있습니다. 가끔 하나님께 번제드리러 갈 때 나무를 패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곧바로 하나님께 번제드리는 날이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 날은 아버지도 함께 나무를 패는데 아버지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곤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꽤 피곤하신가 보다 생각한채 이삭은 방을 뛰쳐 나갑니다. 하나님께 멋진 번제를 드릴 생각에 머리는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제를 드리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시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전과는 달리 나귀에게 많은 짐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사환도 둘씩이나 따라갑니다. 순간 이번 번제는 꽤 멀리서 드리는구나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가는 길에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해서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그 길이 멀수록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더 흥분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건강이 걱정됩니다. 100살이 넘은 아버지가 아마 못해도 110살은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과연 끝까지 잘 견디시려나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흥분이 걱정을 이깁니다. 두 사환과 함께 나귀에 짐을 싣고 떠납니다.
하루를 꼬박 걸었습니다. 하루밤을 길에서 지냅니다. 멋진 하루였습니다. 다음 날 또 하루를 꼬박 걸었습니다. 그 날밤도 길에서 지냅니다. 또 다른 좋은 하루였습니다. 삼일째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더니 아버지가 멀리를 가르킵니다. 그곳이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이젠 이삭도 좀 지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도 좀 지쳐 보입니다. 그런데 고지가 보인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저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오면 하나님의 약속이 더 한층 빨리 이루워질것이라는 희망에 잠시 젖습니다.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리고는 아버지가 나무를 이삭에게 지웁니다. 아들 이삭이 당연히 백살이 넘은 아버지보다는 힘이 더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손에 칼과 불을 듭니다.
그런데 이삭은 궁금해졌습니다. 보통 때는 사환이 양을 끌고 따라 왔는데 번제드릴 양이 없습니다. 사환도 따라 오질 않습니다. 이삭은 이런 궁리 저런 궁리합니다. 그래도 전혀 감을 잡을수가 없습니다. 감히 110살이 넘은 아버지에게 입을 엽니다.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시더니 입을 엽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삭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기적의 아이이니 기적의 양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삭은 이번에는 어떠한 기적의 양을 허락하실까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기적의 양을 가지고 번제를 드리면 기적과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생각하며 꿈에 젖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기적의 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언젠가 기적의 양이 나타날 것이고 그 때 번제를 드리시겠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습니다. 아직도 기적의 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차가운 손이 자기를 결박하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바로 번제드릴 어린양이었습니다. 자기가 바로 기적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기적의 양이 되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 이 번제의 혜택은 누구에게로 돌아 갑니까? 분명히 자기는 아닙니다. 자기는 피의 제물로 돌아 가고 다른 누구가 이 번제의 댓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동안 10여년동안 꿈꾸워 왔던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물거품으로 돌아 가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자신은 만국의 아비의 약속을 이을 자가 아닙니다. 그 동안 첫번째 약속의 자녀로서 꿈꾸어 왔던 모든 계획은 일장춘몽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만국의 아비의 자녀로서 세상에서도 으뜸이 될려고 멋진 계획을 매일 세워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아마 마음 속으로 외쳤을지 모릅니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아버지 돌았어요?” 그러나 그의 입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의 몸도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가 아버지를 뿌리칠려면 얼마든지 뿌리칠수 있습니다. 그는 10대 소년이고 아버지는 100살이 훨씬 넘은 노인입니다. 그러나 웬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마치 그 동안 살았던 시간 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깁니다. 첫번째로 든 생각은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다 거짓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약속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하셨는데 다 거짓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 동안 세웠던 계획도 다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꿈꾸워 왔던 것은 전혀 이루어 지지 않는 허상이었습니다. 자기는 약속의 첫 자녀가 아니라 버림받는 첫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버렸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자기를 번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아예 이스마엘처럼 길바닥으로 내어 쫓기면 다시 솟아날 구멍이라도 있지, 이삭은 칼에 맞아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배반을 당합니다.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우주적 절망을 합니다. 이 우주적 절망 가운데 그는 누구를 만났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이삭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이 되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을 통하여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손을 내밀어 칼로 죽이려 할 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에게도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에게도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아니 이삭이 하나님께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구요? 이삭이 하나님을 절망 가운데서 불렀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쩌면 하나님을 처음으로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은 아버지가 대신 불러주는 것을 옆에서 듣고만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절망 중에 불러 봅니다.
“하나님.”
순간 정말 기적의 양이 나타났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
절망중에 이삭이 하나님께 나타났고 이에 하나님은 기적의 양을 통해서 이삭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첫 번째로는 아브라함이 만민의 아비가 되는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한편 이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는 이삭이 첫 약속의 자녀가 되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첫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절망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나타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 외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적의 양이 되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 기적의 양을 꼭 껴안았을 것입니다. 전에도 많은 양을 제사지냈었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많이 달랐습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목숨을 잃을 그 양을 꼭 껴 안았을 것입니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도와 자기를 결박했던 줄을 가지고 양을 결박합니다. 자기가 누었던 단 위에 그 양을 대신 눕힙니다. 양의 눈에서 절망의 빛을 느낍니다. 얼마 전 자기의 눈에 서려 있었던 절망의 눈빛이 양에게 이전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각색을 한다면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자기를 찌르려던 칼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칼을 내리칩니다.
“끽—.”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양은 절망중에 죽어 갑니다. 죽어 가는 기적의 양을 바라보며 이삭은 양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삭은 새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늘 기적의 아이로, 첫 약속의 자녀로, 만국의 아비를 이어갈 자로 자신 만만하게 지냈던 이삭, 인생의 벽난로에 가장 가깝게 갈려고 노력하며 살아 왔던 이삭이 변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인줄 알면서 지내 왔던 이삭은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는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까지 버림받는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주변에 밀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만난 것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세상 가장 바깥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자기만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기적의 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대신 죽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할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는 양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자리에 내려 앉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하나님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자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아야겠죠. 드디이 이삭은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벽난로에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삭은 벽난로에서 멀리 있어도 축복의 근원으로서 살아 가게 되었습니다. 가깝게 있어도 축복의 근원으로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약속의 첫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삭은 종종 그 산 곧 모리아 산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벽난로로 가던 삶에서 멈추어 서서 시간을 내어서 3일간 걸어서 모리아 산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일년에 한번은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로 버림받던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절망적으로 불렀던 순간 기적의 양이 나타났던 시간을 방문하고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이삭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이 날은 사람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승진하는 날이었습니다.
한편 이 모리아 산이 바로 갈보리산입니다. 이 모리아 산에서, 곧 갈보리 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는 갈보리 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이 갈보리 산이 바로 기적의 산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벽난로에 가까이 가려고 애쓰던 우리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 피를 흘리시는 하나님을 찾는 절기입니다. 곧 기적의 산으로 향하는 절길입니다. 우리를 위해 어린 양이 되셔서 가시덤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절기입니다. 그 어린 양이 우리를 묶었던 밧줄에 묶여져서 우리의 자리에서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만나는 절기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은 세상 벽난로에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이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기적의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려면 어쩔수 없이 벽난로로 향하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시에 또 한 군데로 향하여 가야 합니다. 그것은 모리아산입니다. 갈보리산입니다. 갈보리산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늘 움직입니다. 아니 그곳에 있는 기적의 양은 늘 움직입니다. 우리가 짖는 죄의 현장마다 쫓아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늘 고통의 울부짖음을 발합니다.
“끽—.”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사순절 기간 갈보리산으로 가십시다. 갈보리산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산에 기적의 양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적의 양은 세상에서 버려진 곳에 안주하십니다. 기적의 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 받고계십니다. 하나님마저도 버리십니다. 아니 우리에게 버림 받으십니다. 우리가 누워야 할 자리에서 우리는 벌떡 일어나 주님을 눕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적의 양을 못 박고 있습니다. 주님을 못을 박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까지 그 현장을 방문하고 또 방문하십시다. 그리고 이삭의 눈물을 흘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알랜(Alan)이라는 기자가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크게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 면담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역을 하시고 어떻게 성공할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루한 답변만 듣곤 하였습니다. 어느날은 빌 브라이트(Bill Bright)라는 C.C.C. 총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질문을 했는데 다 기억이 안나는 것을 보아서 역시 신통한 면담이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대답은 못하시고 갑자기 우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빌 브라이트(Bill Bright)는 아마도 이삭의 눈물을 소유하신 분 같습니다. 그는 자기를 대신하여 밧줄에 묵여 제단에서 죽임을 당하신 주님을 늘 만나시는 분일줄 압니다. 어린 양의 울음 소리를 늘 들이시는 분이십니다. “끽—.”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는 누구입니까? 물으실 때 우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답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이 번 사순절을 마칠 때는 우리도 이삭의 눈물을 소유한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벽난로 주위에 있던 멀리 있던 우리가 있는 곳을 이삭의 눈물로 아름답게 하십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수가 누구이냐’ 물을 때 울음으로 답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