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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문 목사,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 (로마서 8장 22-28절) 06/04/2017

요즘 많은 분들이 여행을 하고, 새로운 곳들도 큰 불편함없이 잘 다니십니다. 예전보다 더 쉽게 모르는곳도 잘 다닐 수 있도록 크게 공헌을 한것은 아마도 스마트폰일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지도와 모든 information을 주기에 스마트폰을 의지하며 잘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믿고 다니다가 가장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가요? 베터리가 떨어졌을때죠.
몇년전 보스톤 노회가 아주 먼곳에서 열린적이 있었는데, 저는 지도없이 스마트폰 하나만 믿고 갔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 충전기를 빼먹고 갔습니다. 제일 지도가 필요했던 순간, 베터리가 떨어져 꺼져버린 스마트폰 때문에, 생판 모르던 곳에 가서 갈 방향을 완전히 잃어 버렸던 아찌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충전이 안된 스마트폰을 의지했다가 저처럼 난감했던 일을 겪으셨을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날마다 잠자기 전에 휴대폰 충전하느라 바쁩니다. 스마트폰 충전하는 일이 거의 의식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께서 이렇게 매일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열심히들 충전하기 바쁘지만, 사실, “자신의 심신과 영혼을 충전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지적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충전시키는 일이 그 보다 더 중요하단 말씀인데요, 우리 신앙생홮에도 늘 영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만일, 영적 충전이 없어지면, 신앙생활이 메말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임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사도행전 2:2-4).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었죠. 그들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교회가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이 성령이 임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들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고 계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성령의 역사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던 사도들의 가르침과 행적들,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들의 기록되어 있죠. 특별히, 사도 바울이 여러 곤란과 위험에 처했을때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통해 기적과같은 일들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했던, 소아시아를 넘어, 로마로 가서 그곳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여러번 무산됩니다. 열정적으로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후에 죄수의 몸이 되어서나 로마 감옥으로 가게 되었죠. 그러나, 반면에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열정을 오늘 읽은 로마서에서 잘 보여주며, 자신의 신학을 펼쳐갔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해 기록한 이 로마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아주 여러번, 무려 20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8장은 흔히 ‘성령장’이라고 불릴 만큼 성령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사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성령에 힘입어 살아간 자였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주로 믿게 되었던 자였습니다. 어찌보면,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은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로마서 5절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것이고, 이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 알게된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로 하여금, 그 사랑을 아직 알지못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저 에너지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추상적인 힘이나 사물, 에너지가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이고, 또, 아울러, 그가 곤궁에 바졌을때 직접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인격체이신 분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인격체적인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8장 22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다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아신다고 말하죠. 모든 피조물들이 미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날까지는 고통과 탄식을 겪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챤들이 그날까지 소망가운데 참고 기다려야 할것을 말씀하시면서도, 한편으로 큰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현재 받고 있는 고통의 소리들, 신음하고 탄식하는 것을 들으시고 계시고, 그 고통가운데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탄식’이란 이 말은 고통과 절망에 대하며 깊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이죠. 어떤 무게나 압력이 눌러올 때, 시름하며, 애통해하며 내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 본인도 여러번의 선교 여행중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모욕과 고난과 큰 무게의 짐을 많이 지셨던 경험을 했던 분입니다. 그와 그의 동역자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기위하여 길을 가던 많은 믿는자들의 모습에서 바울은 그런 탄식의 소리, 신음과 애통의 소리가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들으시고, 슬퍼함과 기뻐함에 같이 해주시는 인격체로서 다가오신다는 것을 바울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식하는 인간들과 같이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라고 말씀하면서요.
A. W. 토저란 분이 성령께서 인격적 자질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 당신이 인격체이듯이 성령도 인격체이다. 성령은 들으실 수 있고, 바라실 수 있고, 슬퍼하실 수 있고, 기뻐하실 수 있다” . 성령은 우리 가운데, 알고 느끼는 인격체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 2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신다라는 성령의 인격적인 역활은 예수님께서 보내시겟다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게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곧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을 떠날 것을 생각하시며 요한복음 14: 16절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를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혜사란 말의 희랍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원뜻은, ‘곁에서: “위로한다, 돕는다, 간청하다”의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보헤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께서 그 성령을 피조물들이 연약함 가운데, 탄식하는 가운데 있을때에 곂에 와서 돕는 자로, 대신 간구하는 자라고 할때, 바로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던지, 어떤 고난과 연약함에 서 있던지 도우시는 성령을 간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여러번의 전도여행을 거치면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성령에 기대어, 항상 도우시는 성령을 만났습니다.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만나주시며, 찾아와주시는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었습니다. 성령께서 그가 연약할 때 도우시며, 위로하시며,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워 들어주시는 분임을 확신했기에 그는 사실 어떤 고난도 헤쳐갈 수 있었습니다.
R. C. 스프로울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성령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성령을 깊이 체험한 후에, 당시 자신의 약혼자 였던 베스타도 성령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기도모임에 참여한 후 베스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제 성령이 누구신지 알겠어요.” 스프로울은 그녀가 “성령이 무엇인지 알겠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누구신지 알겠어요”라고 대답한 것에 주목합니다. 자신의 약혼자가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로 알게 된것을 무척 기뻐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그것”이 아니라 “그”라고 칭하고 있는것 처럼, 성령께서는 인격체로서 체험될 수 있는 분임을 믿으며, 스포로울 목사님은 성령은 우리와 인격체로서 관계하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만났던 성령도 바로, 이렇게 인간들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계시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위로하시는 분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처럼,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도우시며, 친히 간구하고 계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힘과 에너지로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라고 알려주시면서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성령님과 어떻게 만나고 계시고, 어떻게 연결되어 계십니까? 그분으로부터 위로받고 도움받기를 간구하여 인격적으로 만나고 계십니까?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Tom Long 교수가 소개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프랭크란 소년이 바닷가에서 배를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친구하나가 가까이 왔습니다. 프랭크는 노를 젓어서 이 배를 타고 저쪽에 보이는 섬쪽으로 가보자고 하면서 친구랑 배에 올랐습니다. 바닷위를 노저으면서 재미있게 가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이 어린 소년들은 놀라서 노를 마구 졋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파도가 심하게 처오자 이들은 노도 파도에 빼앗게 버리고, 배도 잃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수영하여 작은 섬에 다달았습니다. 두 소년은 이제 절망하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낙담하고 있습니다. 이제 해도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겠죠. 이때, 멀리서, 큰 배한대가 증기를 배뿜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프랭크는 뛰어나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Help! Help!”….친구는 말합니다. “아무 소용없어..저 배에서 누가 듣고 오겠어? “..그러나, 이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배의 captain은 뱃머리를 돌려 이들을 향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구해냈죠…프랭크가 말합니다. “나는 저 captain을 알아..” “저 배의 captain이 바로 우리 아버지야!” Tom Long 교수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우주의 선장 captain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이 소년처럼 막막함과 위험,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께, “도와주세요, help, help”하고 외칠때, 성령 하나님게서는 뱃머리를 돌려 우리를 찾아 오시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듣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위로하여 주시려고 찾아 오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부, 성령께서는 먼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셨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그 성령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로 보내신 성령은, 우리들 곁에서 도우시고,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까아 오셔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실 수 있는 인격적인 그 성령님이 여러분들 곁에 계십니다. 그 성령님께 여러분을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연약함 가운데서도, 성령께 구하시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려분들이 심지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연약함 가운데서, 무능력함을 느끼며, 기도할 바를 모를 정도로 힘겨운 때라도, 그런 자들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의지만 한다해도,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은 오늘, 여러분은 그런 성령을 하나님게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들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순절 다락방에 임하셨던, 주님께서 보내신 그 성령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채워가시며, 여러분의 영혼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 부어주시고, 성령을 통해 위로하여 주실때, 그분으로 인해 영적인 충전을 받아, 하나님 안에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도우시는 성령께서는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연결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우리들이 받는 고난과 아픔, 상처 가운데서 위로하시며, 오히려 그 아픔과 상처 가운데서도 연약함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힘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B. U. 신학교에서 만났던 한 후배가 한국에서 북한 탈주이민자들을 위한 일을 했었을때의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습니다. 이 후배는 북한을 탈출할때 많은 고통스러운 일을 겪어서 상처가 많은 탈북한 청소년들을 기독교 기관에서 교육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습니다. 한번은 옷감 천 조가리들을 모아서 그 조각들을 바느질로 하나하나 엮어서 조각보라는 보자기를 만드는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온 청소년 한명이 조각 조각난 것들을 이어가며 꿰매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 하나 하나가 내가 북한을 탈출하면서 겪었던 아픔 하나하나처럼 느껴지고, 마음의 상처들인것 같게 느끼져요. 그런데, 바느질로 조각 하나하나를 엮다보니 성령께서 사랑으로 내 상처들을 하나 하나 엮어가시면서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 상처 많은 청소년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일하시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위로의 손길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학생은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어떤 고난과 아픔 가운데 있더라도 가까이 오셔서 우리들의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엮어가시면서, 위로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했고, 거기서 소망을 찾았을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꿰매어 가시며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시고 계신 성령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에게도 새로운 소망이 생겨나고, 삶에 변화와 생동력이 생격나지 않을까요? 인격적인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와 능력을 부여 받으면서요.
한국에서 [모세골]이란 영성 센터를 목회하시는 이민목회자들을 위한 강의에서 임영수 목사님이 영적으로 풍성한 라이스 스타일-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령의 임재 안에 사는 삶을 살다 보면 어떤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하신 말씀하신적이 있습니다.
“]이러 저러한] 것들에서 자유롭게 된다….그리고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상대방이 상처의 독화살을 쏠 때 그것을 못 쏘게는 할 수 없지만 화살이 날아와도 자유의 영역이 인격 속에 형성되어 있기에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앞에서 툭 떨어지게 된다….그 전에는 화살이 심장 깊이 들어박혔지만 이제는 (툭 떨어져 버리는) 그런 변화를 겪게된다. ”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때에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여 졌을대에는 어떤 상처나 아픔도 우리를 해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능력과 참 자유함을 얻으며 살아 갈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일줄 압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아, 우리를 찾아오신 성령을 찾고 구하며, 새로운 능력을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삶을 내어 맡기십시다.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성령 충만함으로 다시 채워지고 충전되어지길 기도하십시다.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부어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하시며, 우리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계속 연결시켜 주시며, 그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 갈 수 있게 하실것입니다.
그때, 28절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처럼, 주님이 주시는 소망, 구원의 소망 안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믿으며,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더욱 능력과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될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2세기 독일의 한 여류 영성가였던 힐데가드 빙엔(Hildegard Bingen)이란 분이 계십니다. 당대 많은 영성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던 분으로, 수도원을 몇개나 짓고, 70세가 넘어서까지 왕성하게 사역을 하시면서 ‘스키비아(Scivia)’란 유명한 작품을 남겼던 분입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성령이 어느날 한줄기 빛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셔서 touch하신 그 체험을 통해 이분은 성령의 힘에 의지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이분에게 있어 언제나 성령은 자신에게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며, 늘 ‘푸르른 ’생명력을 주시는 분으로 다가오셨고, 그 성령으로 인해 찬양이 떠져나오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그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이렇게 시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살아있는 생명이요,
세상의 나무들의 뿌리이며, 나무 가지들들 흔드는 바람입니다.
죄를 씻어내고, 상처를 오일로 바르십니다.
성령은 빛나는 생명이요, 모든 찬양을 끌어내며,
모든 것을 일깨우고, 모든 것을 부활시킵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살아계신 성령께서 우리들의 삶에도 늘 함께 하신다면, 어떨까요? 생명이신 이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가 새로와지고, 우리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으로 인해 아름다운 찬양을 터뜨리며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며 더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그런,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성령께 우리 모두 우리들의 빈 마음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하십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회복하시며, 새로운 소망으로 재충전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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