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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목사, 꼭 닮았구나 (마태복음 5장 9절) 06/11/2017

숨이 막힐 듯 무덥던 한 여름 날, 숨을 죽이고 모두가 앉아 있었습니다. 흐르는 눈물과 무너지는 마음을 간신히 주체하며 예배의 한 순서, 한 순서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그 예배는 아주 짧은 생을 마치고 떠났던 이의 장례 예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장례 예배를 참석해보았고, 상주가 되어 치른 장례도 세 번이나 되었지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 지, 어떤 인사로 다가가야 할 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큰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클라리넷 연주자의 순서가 되었고, 조용히, 하지만 깊은 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율은 참석한 이들의 아픔 마음과 영혼을 강하게 울렸습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고요함 가운데 숨 죽여 예배를 드리던 이 곳, 저 곳에서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평안을 노래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힘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또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가?’ 저의 머리 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이미 마음과 영은, 그 연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느끼기 시작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알 수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주시겠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하셨던 그 평안은, 우리의 감각과 사고의 통제를 벗어난 저 높은 어딘가에서 샘물처럼 이미 졸졸 흘러 내려와 우리를 적시고 달래고 덮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자주 하는 인사 중의 하나가 바로 ‘평안하십니까?’ 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서로의 평안을 묻고 바라는 공동체이고, 이 ‘샬롬’이라는 인사말은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성경에서도 평안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27권 중 26권에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말로는 평안, 화평, 평강, 평화 등으로 그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지만, 영어로는 peace 이고, 히브리어로는 שָׁלוֹם (shalom), 헬라어로는 εἰρήνη(eiréné) 인 한 의미를 공유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이 신비로운 평안의 상태를 경험하고 나면 그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의 많은 이들이 평안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화평, 혹은 평안의 상태는, 위협이나 근심, 혹은 부정의(injustice)나 전쟁 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더 이상 근심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원숙한 사람들에게 오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원숙한 사람들은 직역하면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인생의 욕심이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오디세이와 일리아드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If you wish peace, prepare for war.)고 말하였습니다. 전쟁을 통해 위협이 되는 원수들을 정복하고 제거해야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문제의 제거를 통해 얻은 평정의 상태, 더 이상 위협이나 근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전쟁과 갈등으로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평화는 누구도 다치지 않고 싸우지 않는 전쟁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한편,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그 날 주린 배를 흰 쌀 밥과 고기 반찬으로 든든히 채우고 잠자리에 드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겁니다. 즉, 당장 우리 눈 앞에 위협이나 근심이 되는 일들이 사라진 상태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평화이고 화평입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생각처럼, 전쟁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고, 무력으로 문제를 제거하면 이와 같은 평강을 누리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과격한 종교인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진정한 정의가 세워지고 평화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타 종교인들을 제거의 대상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테러일 뿐입니다. 유난히 요즘, 이와 같은 생각들이 세상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로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중세 시대의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스라엘의 역사도 비슷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평안을 꿈꾸며, 비슷한 상상을 할 지 모릅니다. ‘나에게 근심을 주는 저 문제만 해결되면 평안할텐데…’ 혹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저 사람만 없어지면 세상 평화로울텐데…’ 문제의 제거, 소멸이 우리를 화평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사고가 틀리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평안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앞서 장례 예배를 통해 경험했던 평안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삶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르치시면서, 여덟 가지의 복을 소개하는, 소위 ‘팔복’의 내용 중 일곱 번째에 속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팔복은 영어로 Beatitude라고 하는데 의미는 ‘supreme blessedness’ 즉, 세상의 그 많은 좋은 것들 중에 최고의 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주제인 ‘화평’을 누리고 전하는 사람의 복입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마음의 화평이 으뜸이 되는 복이라는 말에 큰 이견이 없으실 것입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가득하다면 뭘 더 바랄게 있을까 싶습니다. 이 화평의 성경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큰 도움을 주는 구절이 바로 골로새서 1장 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먼저 이루셨던 화평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와 창조물을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신 일입니다. 죄로 인해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던 우리들이 그 분과 화목하게 되고 연합하게 된 상태를 성경은 화평, 또는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합의 상태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건이나 관계를 대할 때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시고 나와 연합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내가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평안의 비결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나의 눈과 나의 기준이 아닌, 내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눈으로 바라보니 시기하고 불편해하기보다 사랑하고 품게 되니 평안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다가와도 내 판단과 반응 너머에 계신 예수님의 섭리를 신뢰하니 미리 걱정하거나 불안해할 것 없이 평안한 것입니다. 찬양 중에,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산다는 고백의 곡이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예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동행하는 삶에서 진정한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서론에서 말씀드린 장례 예배 중의 신비한 평안도 이제 이해가 갑니다. 슬픔의 경험 중에도 제 안에 계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그 찬양을 통해 확인하고 그 분의 화평을 저도 느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주변 교우님들의 삶을 통해서도 종종 듣곤 합니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임했던 평안, 큰 시험이나 오디션을 앞두고 근심하던 중에 임했던 평화, 삶의 어지러운 문제들로 낙심할 때 기도하며 얻게 된 평강… 이것들은 세상은 이해할 수도, 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그 분의 풍성한 돌보심과 충만한 샬롬을 온전히 느끼기 시작하면, 상황과 문제에 상관없이 이 신비한 평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평안,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신비한 평강이 우리 안에 흘러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삶에서 내 감정이 앞서려고 할 때, 그 소리를 잠시 잠재우고, 내 안의 주님의 화평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이 놀라운 화평을 나누고 전달할 것인가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화평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 즉 화평을 만드는 자 (peacemaker) 가 복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인가요? 그저 싸움을 해소하는 중재인이나, 우리 눈 앞의 근심과 문제를 해소해주는 심부름 센터 직원이, 혹은 거대한 사회 구조적 갈등들을 다루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회단체 사람들이 화평하게 하는 자인가요? 물론 이런 분들도 큰 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하게 하는 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샬롬을 전하는 사람, 그 분의 풍성함을 잘 받고, 잘 누리고, 잘 간직했다가, 잘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화평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사과를 나눠주는 것처럼 물리적 전달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 화평을 하나 주고, 저 사람에게 화평을 두 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특정 교수 방법(teaching method)으로 건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심호흡하고, 저렇게 마음을 먹으면 화평을 누릴꺼야.’ 설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화평하게 하라’는 명령 자체가 없습니다. 사과처럼 나눠줄 수도, 지식처럼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평하게 하다’는 동사들은 나오는데 그 주어가 모두 하나님입니다. 그 깊고 충만한 샬롬의 은총을 하늘과 땅의 피조물들에게 전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화평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와 잘 연합하고,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충만한 샬롬을 경험할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말과, 행동에, 생각과 판단에 흘러나오게 되고, 이것을 주변에서 느끼게 될 때에 우리 안에 계신 화평의 영이 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화평을 전하지 못할 수 있고, 싸움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살아도 그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의 샬롬은 전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 평안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이 향기처럼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이고, 시냇물처럼 졸졸 화평의 영이 흘러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화평케 하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사심을 우리 안에서 진하게 느끼는 일입니다. 이게 때로 어렵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특징인지 신앙인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때로 좋은 것에 황송해하며 불편해하거나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인력거를 몰던 사람이 큰 짐을 머리에 이고 가시던 할머니를 보고 공짜로 태워드렸다고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시더니 후에 고맙다고 말씀하시고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머리에 있는 짐은 그대로 이고 계시더랍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었지만 너무 불편해 보이기에 여쭈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그 짐은 왜 계속 머리에 이고 계세요?’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이것까지 내려놓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한국적 문화인지 신앙인들의 겸손인지, 이와 같은 황송한 마음이 하나님의 풍성한 샬롬의 은총을 내 온 삶에 누리고 또 나아가 전하는 데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평강을 마음껏 누려도 되나.’ ‘하나님께 잘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이 충만한 평화를 받아도 되나.’ 가끔씩 우리에게 예상 못한 칭찬이 올 때에도 그렇습니다. 간결하게 ‘감사합니다’로 받으셔도 되는데, 자주 ‘아니예요’ 로 반응하게 됩니다. ‘음식을 참 많이 준비하셨네요.’라는 칭찬에는 누가 보아도 차린 음식이 상을 꽉 채웠는데, ‘차린 게 없어요.’ 라는 대답으로 칭찬을 충분히 받고 간직하고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때에 칭찬을 거부하지 않고 감사로 잘 받은 사람들이 내면의 감사를 잘 간직하여서 후에 칭찬과 감사를 더 잘 나눈다고 합니다. 반대로,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 충분히 기뻐하고 누리고 음미하지 못하면, 그 풍성함을 잃게 되고, 누군가에게 동일한 양의 풍성함으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인색하게 되는 것이지요. 내 안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평화도 충분히 누리고 음미하지 못한다면 흘러나오는 데에도 인색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충만한 평안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흘려보내는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이 반응을 합니다. 오늘 본문 보니 뭐라고 반응한다고 나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영어로는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성경에는 ‘너희가 내 백성이 되리라,’ 혹은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분의 율법을 행함으로, 그 분의 새 계명을 지킴으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으려면 어떠한 룰을 지킴으로, 혹은 특정한 행동을 취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평화가 넘쳐나고 흘러나올 때에 가능하다고 오늘 본문이 가르쳐줍니다.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부모의 룰을 지키고 정해진 행동을 취해야만 자녀가 됩니까? 그것들은 특정한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해 하는 일들이지요. 시민으로서, 혹은 제자로서. 자녀들은 어떠한 룰을 지키는 이들이 아니라, 부모를 그냥 닮은 이들입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걸음걸이에서 닮은 모양이 풍겨나고, 사소한 얼굴 표정이나 행동에서도 닮음이 묻어나는 이들을 ‘자녀’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무의식의 최고 상태인 잠자는 자세에서도 부모의 그것을 똑같이 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자녀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는 도저히 본 적 없는 화평을 일상에서 누리고 사소한 말과 행동에서 주변에 흘려보낼 때에, 사람들은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았구나. 저 화평은 저들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데, 저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것을 닮은 것이구나.” 그리고 이와 같은 화평이 신비하게 느껴질 때에 화평은 이미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불같은 성령을 경험한 사도들을 보고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신비하다고 여길 때에 그 불이 그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doing이 아니고 being 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묻어나오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꼭 닮은 성품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최고의 축복, supreme blessedness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렸을 적 사람들이 저를 붕어빵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마음에 제가 붕어를 닮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제가 아버지와 붕어빵 틀에서 나온 두 빵들처럼 똑같이 닮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이 닮았었나 봅니다. 어렸을 적, 동네를 지나가다가 처음 뵌 어른들이 아는 척을 하고 심지어 용돈을 주고 가실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모습만 보아도 아빠가 누군지 알 수 있어서… “너, 아빠를 꼭 닮았구나.”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자주 듣던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우는 복을 받는다는데, 하나님을 닮은 자라는 일컬음을 받는다는데, 하나님께 그 말 듣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너, 나를 꼭 닮았구나.”

D.L Moody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명 중 1명이 성경을 읽고 나머지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특정 행동이나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통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좋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기도 하고, 기도를 오래 하기도 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도 합니다. 신앙적 노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나의 행동이 아닌, 나의 화평한 존재 그 자체이며, 그것이야말로 신앙인이 맺을 최고의 열매이고, 받을 최고의 복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실 때에, 우리 안의 주님과 함께 갑시다. 그분의 충만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풍성한 평강을 황송해하지 마시고, 온 몸으로 누리고 음미하십시다. 그리하여 돌아가시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가정에서, 자연에서,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직장에서, 삶으로 성품으로 그 분을 드러냅시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은 어느 샌가 그 분을 꼭 닮아 있을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일상에서, 무의식에서 완성하는 놀라운 축복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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