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편 137:1-9)
이영길 담임 목사
‘우생마사’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갖고 있습니다.
우생마사 牛生馬死
아주 커다란 저수지에 말과 소를 동시에 던져 넣으면 둘 다 헤엄쳐서 뭍으로 나옵니다. 말의 헤엄 속도가 훨씬 빨라 거의 소의 두배의 속도로 땅을 밟는데 네발 달린 짐승이 무슨 헤엄을 그렇게 잘치는지 보고 있으면 신기한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마철에는 이야기가 달라 집니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소와 말을 동시에 던져 보면, 소는 살아서 나오는데, 말은 익사를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은 헤엄은 잘 치지만 강한 물살이 떠미니깐 그 물살을 이겨 내려고 물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려 합니다. 1미터 전진 하다가 물살에 밀려서 다시 1미터 후퇴하고 또 전진하다가 후퇴하고 반복 반복 합니다. 한 20분 정도 헤엄 치면 제 자리에서 맴돌다가 결국 지쳐서 물을 마시고 익사해 버립니다.
그런데 소는 절대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냥 물살을 등에 지고 같이 떠 내려 갑니다. 저러다 죽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10미터 떠내려가는 와중에 1미터 강가로 10미터 떠 내려 가다가 또 1미터 강가로 그렇게 한 2~3 킬로 내려가다 어느새 강가의 얕은 모래밭에 발이 닿고 나서야 엉금엉금 걸어 나옵니다.
신기한 일 입니다. 헤엄을 두배나 잘 하는 말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다 힘이 빠져 익사하고 둔한 소는 물살에 편승해서 조금씩 강가로 나와 목숨을 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생마사’입니다. ‘소는 살고 말은 죽는다.’
사실 지난주에 교회에 오신 분들은 기억하실줄 압니다만, 저는 지난 주일부터 저희 교회 비전 선언문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첫번째 비전선언인 ‘3 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를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세번째 비전인 ‘한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계를 향한 교회’에 대해서는 단기 선교단 파송예배 때 드릴 예정입니다.
‘우생마사’와 세번째 비전인 ‘한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좀 의아한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만, 일단 본문 말씀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시인은 지금 바벨론 포로로 끌려 와 있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를 해석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시에 나오는 이미지를 먼저 떠 올리는 것입니다. 좋은 시일수록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2절까지 보면 이 시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곧 이 시의 이미지는 강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울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그러면 이들이 강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있을까요? 3, 4절을 보면 자기를 끌고 온 사람들이 고향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아예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은 것입니다. 안 부르겠다는 것이죠. 그 의지가 6절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고향의 노래 곧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결코 자기를 포로로 잡아 온 이방인들 앞에서는 부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결단을 넘어 마음의 생각을 노래로 표현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한 마디로 시인은 고된 포로 생활 가운데 고향의 노래를 부르기를 거절하고 대신 강변에 앉아서 고향을 바라 보면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는 바벨론이 멸망하길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번져서 포로로 잡혀 온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부르는 새로운 노래가 된 것입니다. 곧 이 노래는 시온의 노래가 아니라 바벨론 강변의 노래라고 할까요?
바벨론 강변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마음의 소원은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포로는 몇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 가죠? 70년만에 돌아 갑니다. 그들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의 강변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노래가 새로운 세상 역사를 창조한 것입니다.
시편이 150편으로 되어졌는데 시편은 사실 노래 가사입니다. 처음 시편은 노래로만 불리워졌습니다. 물론 시편에는 기쁨의 노래도 있고 슬픔의 노래도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슬픔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항상 가사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노래로 역사에 한 자취를 남긴 것입니다. 무늬를 남겼다고 할까요?
文 무늬
이 文은 ‘무늬’ 문입니다. 무늬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문화를 만드는 민족이 역사를 바꿉니다. 한편 무늬를 만들지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멸망합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징기스칸의 몽고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징기스칸의 몽고족이 한 때 동양과 서양을 휩쓸지 않았습니까? 언젠가 워싱톤 포스트 지는 지난 천년 동안 가장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민족이 몽고족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끼친 것이 훌륭한 문화를 남겨 놓은 것이 아니고 동과 서의 문화 교류의 장을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아랍을 거쳐 터키에 이르기 까지 동서양을 휩쓸고 다녔기에 동서양의 문화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할만 하고 자기들의 자취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문화를 만들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무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놀랍게도 가늘고 길게 5천년을 버텨 왔습니다. 이제는 세계 경제 강대국이 되었고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보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어떻게 임하였을까요? 사실 한 민족은 무늬를 만드는 민족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민족 처럼….
요즘 한국이 여러모로 어려워도 그래도 모두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은 세계경제 대국의 반열에 들어 섰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잘 살게 된 이유를 많은 분들이 정치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를 잘 한 이유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뜨거운 헌신과 기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얼마전 정신과 의사가 지은 책을 보니 그 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고 매일 노래를 불렀고 좋건 실컨 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를 떠나서 저도 의사 출신이니 꽤 저의 마음에 들어 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정치가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크레딧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잘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마음 속에서부터 “잘 살아 보세”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 노래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면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 당시 정치인이 “잘 살아 봅시다” 외치기만 했다면 잘 살게 되었을까요?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 잘 살아 보세.”
요즘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이 노래를 만들지 않고 서로 서로 공박하기 바쁩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요즘 의학이 발전이 되어서 우리 두뇌가 좌측뇌와 우측뇌로 되어진 사실 많은 분들이 잘 아실줄 압니다. 서로 서로 공박할 때는 어느 뇌가 사용되겠습니까? 좌측뇌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를 때는 어느 뇌가 사용되겠습니까? 우측뇌가 사용됩니다.
제가 읽었던 정신과 의사의 책 제목이 ‘창조의 심장 ‘우뇌’’입니다. 그리고 책 커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미래를 선도하는 창조의 중심엔 우뇌형 한국인이 있다.”
정신과 의사가 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를 중요시 여기는지 이해가 될줄 압니다.
이스라엘 포로들은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 오고 바벨론은 멸망할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가 될줄 압니다. 좌측뇌가 말 싸움에서는 이기지만 결과적으로는 우측뇌가 이길수 밖에 없습니다. 우측뇌가 문화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우생마사의 사자성어를 소개해드렸는데, 몽고족은 말과 같은 민족인 것 같습니다. 말을 타고 동서양을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기 시작하니 이제는 이름만 남아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한 민족은 소와 같은 민족입니다. 급류에 던져지면 급류를 거슬러 싸우질 않습니다. 급류에 몸을 맡깁니다. 노래를 부르며…. 언젠가 육지로 다가 와 섭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불렀던 노래를 자손들에게 들려 줍니다. 급류에 휩쓸려 내려 가면서 무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무늬가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면…, 신라 진평왕 때 만들어진 ‘혜성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왜군(일본군)이 쳐 들어 옴을 보고 군대로는 대항할수가 없어서 이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멀리서 보고 왜군이 물러 갔다고 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전설이 내려 온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강강수월래의 유래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정유재란의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수병(수군)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할 때 조선 수병들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여 왜군이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자 차림을 하고 떼지어 올라가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 위의 왜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 줄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합니다. 싸움이 끝난 뒤 부근의 마을 부녀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즐기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강술래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저희 교회가 첫 희년 행사 중 하나로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는데 그 때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강강수월래를 이웃 주민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맞는지는 두째 치고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 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한 민족은 무늬를 그릴줄 아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무늬를 그림으로 새 역사를 창조할줄 아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말이 되지 않고 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서두르지 않고 도리어 무늬를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조상들이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약소민족인 한민족이 이제는 세계의 역사 속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남은 과제가 있습니다. 한민족으로서 당연히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지 알겠는데, 기독교인이라면 민족의 범주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도전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민족주의로 흐를 때 우월감이 싹트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로 해결점을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수 많은 문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문화가 살아 남을수 있었던 것은 그들도 다 무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웃 민족의 문화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 안에 놀라운 세계가 담겨져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건이 되면 함께 교류를 해야 합니다.
사실 저희 교회가 4년전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 중 하나로 제 5회 한국문화 축제를 열었는데 그 전에 두 번은, 한 번은 유대인들을 초청하였고 또 한번은 Irish를 초청하여서 문화 축제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신비한 무늬를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주님은 말이었을까요? 소였을까요? 우리 주님은 세상 급류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내 맡겼습니다. 당신의 몸으로 무늬를 그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무늬를 그렸습니다. 곧 십자가라는 무늬를 그렸습니다.
곧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 살아 남은 모든 문화에는 건전한 문화 안에는 십자가라는 무늬의 그림자가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 저희 교회가 주최하는 한국 문화 축제를 보면서 한 민족의 문화 안에 담겨져 있는 갈보리의 그림자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 한 민족의 문화뿐 아니라 온 세상의 건전한 문화 안에는 갈보리의 그림자를 찾아 볼수 있습니다. 보려고 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한민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갈 때 구체적으로 갈보리 십자가에 가까이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들려드립니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지독한 가난뿐 아니라 군사 정부로부터 고문도 많이 당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인생을 아름다운 무늬로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의 소풍이었다고…. 그는 새로운 한민족의 무늬를 그린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그려 가십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신 것처럼….
시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