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들어 오지 못한 외경 중에 도마 복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져 있는데, 그 책에 바구니에 씨를 가득 담고 걸어 가는 한 여인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여인이 마을에 가서 씨를 바구니에 가득 담은 후 집으로 걸어 옵니다. 그런데 그 바구니에는 구멍이 뚫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까지 와서 보면 바구니에 씨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는 길에 다 뿌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일면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집은 우리들이 언젠가 갈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집에 도착해 보니 바구니에 담겨 있던 씨가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집으로 가는 동안 모두 새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입니다. 겨자씨를 바구니에 담고 올 한 해를 걸어가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올 해가 마칠 때 우리 모두 기쁨의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기쁨으로 한 해를 마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겨자씨가 담긴 바구니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줄 압니다. 물론 구멍이 나 있어야 하구요….
오늘 제직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제직분뿐만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올해 바구니의 소유자가 되셔서 축복된 한 해를 주님께 드리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겨자씨가 담긴 구멍난 바구니의 소유자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대표적인 바구니의 소유자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사도바울의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한 마음을 볼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얼굴을 보길 원하고 있는지 느낄수 있습니다.
겨자씨를 바구니에 담고 사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그리워 하는 자들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일에는 소홀해 집니다.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다 보면 자신의 삶에는 구멍이 나겠죠.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잠시 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얼굴 보기를 그리워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생각하니 신귀복씨의 ‘얼굴’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가요라면 가요이고 가곡이라면 가곡이라고 할수 있는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1967년 어느 날, 동도공고의 교무실입니다. 그 날도 아침 교무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지자 지루함을 느낀 어느 생물 선생이 옆에 있던 신귀복 음악 선생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봐, 교장 얘기 따분한데 우리 애인 얼굴 생각하면서 노래나 하나 만들어 볼까?”
“좋아, 심 선생이 가사를 쓰면 내가 곡을 만들어 봄세.”
이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조회가 끝난 후 바로 음악실로 가서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아얀 그때 꿈을”로 시작하는 ‘얼굴’입니다. 두 청년 교사가 무료함을 달래고자 미지의 여인상을 상상하며 즉흥적으로 만든 곡입니다.
신귀복 선생과 사도바울 모두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의 그리워하는 모습은 비교해 볼만합니다. 신귀복 선생은 미지의 여인상을 상상하였습니다. 곧 한가한 가운데 떠오른 얼굴을 생각하면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도바울은 어떤가요?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도바울이 그리워 하는 얼굴은 한가한 때 떠오른 얼굴은 아닙니다.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쓰게 된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면, 사도바울이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심하게 박해를 했습니다. 약 1년만 목회를 하고 떠나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곧 데살로니가 교회가 1년이 지나자마자 사도바울은 아픈 마음을 안고 떠나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척한지 1년만에 떠나 온 교회이니 얼마나 또 가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천지 사방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더욱 그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이를 사탄이 막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신귀복씨의 상황과 사도바울의 상황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토록 그리워하는 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은 신귀복씨의 ‘얼굴’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서는 그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 한다면 언젠가 주님께서 강림하실 날을 바라보며 그 때는 확실히 볼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얼굴을 그리워하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적 영광은 곧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분명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서로 손가락질을 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저 사람 때문에 여기에 왔지.”
자기에게 예수님을 믿게 한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가르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기들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있는듯 합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왔습니다.”
반면 그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너희들은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정말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땅 위에서 이미 이 주님 품에 알길 때까지 이 고백을 하고 또 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 고백을 할 때마다 겨자씨는 뿌려지고 또 뿌려지지 않았을까요? 왜?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의 삶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겨자씨를 다 뿌린 후 주님 품에 안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루 아침에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를 하고 지금 이 서신을 쓰기까지는 16년이 흐릅니다. 16년만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데살로니가전서가 사도바울의 첫번째 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주후 47년에 첫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그 후 5년 후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씁니다. 곧 비교적 선교 초창기에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 나이가 5년이 지난 52세입니다. 그 이후로 66세까지 거의 매해 서신 하나씩을 써갑니다.
곧 사도바울은 선교 초창기에 이 놀라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고백을 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욱 사도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를 통해 겨자씨는 뿌려진 것입니다.
제가 24년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제가 존경하는 임영수 목사님께서 몇 권의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중 늘 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목사 되어 가기.’
1년에도 몇 번 아니 한 달에도 몇 번 이 책 제목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 되어 가기.’ 혼자서 생각합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니지. 목사는 계속 되어 가는거지….”
사실 사도바울도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도바울도 늘 사도로서 또 사도가 되어 간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는 고백을 하면서 이 고백이 갈수록 깊어져 간 것입니다.
사도뿐이겠습니까? 목사가 되어가는 과정도, 아니 오늘 제직 임직 예배를 드리는데 제직이 되어가는 과정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고백 안에 있지 않을까요?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은 교우들의 얼굴을 심히 그리워 하다가 자기의 바구니가 구멍 난 줄도 모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는 목회자들과 제직들을 통해서 겨자씨는 오늘날도 이 땅에 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많은 제직 분들이 큰 부담을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도바울처럼 이런 고백을 할수 있을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고백 안에 열쇠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 서신은 사도바울 혼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실라와 디모데와 더불어 함께 쓴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이 사도 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고백은 바로 ‘우리’라는 고백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세 사람의 이름으로 문안을 했으니 세 사람이 쓴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고 말씀해도 상관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겸손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너희는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백했더라면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어갔을까요? 세 사람의 공동체 안에서 이 고백을 익혀 갔고 그 과정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진정 사도가 되어 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서 겸손해진 것이고 그로 인해 겨자씨는 뿌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물론이거니와 제직도 바로 공동체 안에서 겸손히 제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곧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고백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계에 세 가지의 바늘이 있습니다. 초침, 분침, 시침…. 이 세 바늘이 항상 함께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시계는 제 구실을 못합니다.
제직에도 저희 교회는 세 직분이 있습니다. 집사(서리 및 안수), 권사, 장로. 세 제직 그룹들이 한 공동체를 이룰 때 아주 자연스럽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을까요? 시계처럼…. 언제 이 세 바늘이 사이좋게 갈 수 있겠습니까? 겸손의 기름이 쳐 있을 때가 아닐까요? 그럴 때 결국 사도바울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어 갈줄 압니다. 제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 제직분들을 향하여 귀여운 손가락질을 많은 분들이 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의 고백으로 겸손히 답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 겨자씨는 뿌려집니다. 우리들의 삶에 겸손히 구멍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구멍은 너무 작아 겨자씨도 새어나갈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주님 안에 함께 거할 때 우리들의 구멍이 더 켜져서 겨자씨가 새어나갈수 있는 큰 구멍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리워하다가 십자가에서 당신 몸에 사방으로 큰 구멍을 뚫게 놓아 두셨습니다. 수많은 겨자씨를 이 땅에 쏟으셨습니다.
이 겨자씨를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자들을 통해서 뿌리시길 원하십니다. 곧 제직이 되어 간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겸손히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릴케의 ‘넓어지는 원’이라는 시입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우리가 사도바울의 고백을 할 때 우리의 삶의 원은 넓혀집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을 우리들의 원 안에 들어 오게 합니다. 물론 완성되지 못한채 하늘 집으로 들어 갈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들의 바구니에 구멍이 나 있으니…. 함께 이 고백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우리 모두 이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많이 많이 말씀하십시다. 참 제직이 되어 가십시다.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