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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함으로…” 고린도전서 9:18-27 (03/04/2018)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입니다. 첫 부분만 소개해 드립니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 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이 땅에 보내진 목적이 다 달성이 되었는지 이 글을 발표한 후 두 달만에 교통사고로 47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합니다. 아마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시를 머리나 심장으로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인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시작은 몸으로 아니 그냥 몸이 아니고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서강대 교수이셨던 한동일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의 라틴어 수업 강의가 유명했고 그 후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
학문도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이 몸으로 하는 것이고 공부하는 것도 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신앙 생활은 무엇일까요?

오늘 사순절 셋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은 참회의 기도와 구제 그리고 절제의 훈련을 통해서 새로워지는 절기입니다. 올 해도 사순절을 뜻깊게 보내고자 사순절을 시작하는 주일에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리자’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참회로 뜨거워진 눈시울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맞이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다음으로는 구제의 삶 곧 ‘give and give and give’의 삶을 통한 축복을 누리자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절제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의 절제는 육신적 절제를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금식과 같이 육신적인 훈련을 뜻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시를 몸으로 쓰듯이 공부를 몸으로 하듯이 신앙생활도 온 몸으로 해야 함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몸으로 하는 신앙 생활을 회복하고자 이런 훈련의 시간을 갖게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몸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삶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오늘 본문 말씀이 고린도전서 9장인데 9장은 27절로 되어 있고 한 문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문단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은 크게 두 주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두 주제가 만나는 부분이 방금 봉독해 드린 18절 말씀입니다.
첫 주제는 물질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 곧 구제와 연관된 주제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구제에 이어 두번째 주제는…,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구제 곧 물질을 통해 이웃을 섬겼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 곧 구제 이외는 어떤 방법으로 섬겼을까요? 20절 이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다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흉내냄으로 어떻게 하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유대인이 되고 때로는 율법 없는자가 되고 때로는 약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무나 할수 있을까요?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행했다.’ 뭔가 익숙한 표현 같지 않습니까?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공부하는 노동자.’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는 노동자’가 아닐까요? 노동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역사상 최고의 복음 증거자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몸으로 전했기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물질로 섬겼습니다. 때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약한 자나 강한 자나 그들을 얻기 위해서 시시때때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곧 몸으로 밀어부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난 주일은 드물게도 예배후 교회 아무 행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수첩을 보니 지난주 오후에는 저희 교회가 2년전에 자선음악회를 베풀어서 모금을 해 드린 Roxbury교회에 음악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잠시 쉬고 뒤늦게 Roxbury교회에 갔습니다. 가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저희 교회가 무슨 행사를 할 때마다 이웃 교회를 초대합니다. 그런데 해당 교회 말고는 거의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Roxbury교회를 위해 행사를 할 때는 그 교회분들만 옵니다. 작년도에는 케냐 교회를 위해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당연히 케냐 교회 교우들만 왔습니다. 물론 초청장은 노회 모든 교회에 다 보냈는데…. 제가 깨닫게 된 것은 ‘몸으로 가서 앉아 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한 일이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시간이 허락이 되면 다른 교회 행사를 가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가도 오진 않더라구요.
그래서 지난 주에는 마음을 비우고 그들이 저희 교회 행사에 올 것은 기대하지 않고 갔습니다. 그래서 아주 마음 편하게 갔습니다. 앉아 있는 것이 복음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즐기면서 음악을 즐기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나서 음악회에 앉아 음악을 즐긴 것을 가지고 몸으로 복음 사역에 참여했다고 말하기는 좀 겸연쩍은 느낌이 듭니다. 사도바울은 물질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사역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온 몸으로 사역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은 음악회가 아닌 운동 경기를 비유를 들어서 몸으로 섬기는 자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몸으로 섬긴다고 말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은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요?

지난번 많은 분들이 관심 갖고 평창 올림픽을 보셨을줄 압니다. 물론 한국 땅에서 열렸기에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보셨을줄 압니다. 저에게 큰 도전을 주었던 선수가 잘 아시는 snowboard Cloe Kim 선수였습니다. 세 번의 라운드가 주어지는데, 세번 중 가장 좋은 점수로 결정이 됩니다. 이미 2차 라운드에서 금메달이 확정이 되었습니다. 3차 라운드는 안해도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최선을 다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 경기가 얼마나 위험해 보입니까?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내려 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냅니다. 기자들이 질문합니다.
“이미 금메달이 확정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자신의 최선의 기량을 발휘해 보지 않으면 후회했을거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excellence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Cloe에게의 금메달은 남과 비교해서 나은 성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금메달은 자신이 추구하는 excellence였습니다. Excellence라는 금메달을 획득한 것입니다.
Excellence로 향할 때 머리만 사용했나요? 심장만 사용했나요? 머리와 심장과 함께 온 몸으로 민 것이 아닐까요? Cloe의 몸 구석 구석마다 excellence를 향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몸으로 섬기는 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excellence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들이 바로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제가 음악회에 가서 앉아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가 아니라 교회 연합이라는 excellence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장로교는 교회연합을 중요시 여깁니다. 특회 노회 안에 교회들의 연합 없이는 교회가 설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회 연합은 바로 우리들의 excellence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 온 많은 분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오신 분들일줄 압니다. 이들도 그나름대로 excellence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excellence를 추구하는 자들은 몸으로 밀게 되어 있습니다. 운동선수처럼….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excellence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excellence를 추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나요?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도바울은 은근히 이 땅에서 excellence를 추구하는 운동선수들이 절제를 한다면 하물려 하늘의 상을 추구하는 우리는 더욱 그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제는 머리로 하는 것입니까? 심장으로 하는 것입니까? 절제는 곧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Diet를 머리로 합니까? 심장으로 합니까? 온 몸으로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절제의 훈련을 하고 계십니까? Excellence를 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excellence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사실 사도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절제를 강조하는 더 큰 숨은 뜻이 있습니다. 썩을 면류관을 추구하는 자나 썩지 않을 면류관을 추구하는 자나 모두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큰 차이점이 있다면 썩을 면류관을 추구하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탈렌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Cloe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Cloe와 같이 되게 하겠다고 4살난 딸에게 snowboard를 가르친다고 해서 Cloe가 됩니까? Cloe보다 훨씬 더 훈련을 많이 시킨다고 해서 될까요? Cloe는 snowboard를 타면서 땅 위에서 15ft까지 올라갑니다. 아무나 가능할까요?
썩어질 승리자의 관을 추구하는 자들은 먼저 탈렌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곧 탈렌트가 우선이고 그 후 절제가 따라 옵니다.
반면 썩지 않을 승리자의 관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어떤가요? 여기에도 어떤 탈렌트가 먼저 필요할까요? 정반대입니다. 절제가 먼저입니다. 절제하는 자들에게 각자에 맞게 놀라운 탈렌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십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 귀절에는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후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가 나오고 광야에서 바위를 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사실 이런 능력의 종이 되기 전에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는 먼저 절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절제의 사람인 그를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절제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구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도바울은 모세처럼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샘이 나오게 하는 하나님의 운동선수가 되어 가길 바란 것입니다. Excellence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Excellence를 향한 뚜렷한 자신의 목표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고백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절제 없이 목표만 가지고 있을 때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의 몸에 절제의 흔적이 박혀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삶에 고린도 교인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홍해를 가르는 역사에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몸으로 밀 때 우리를 삼키고도 남는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들 많이 말합니다. 홍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절제의 삶이 홍해를 가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 기간 우리들의 몸을 절제로 감싸지 않으시렵니까? 사실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기도할수가 없습니다.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어려운 자들을 찾아 갈수가 없습니다.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화해의 손길을 내밀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몸입니다. 온 몸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절제 없이는 온 몸으로 신앙생활을 할수 없습니다. 절제가 신앙 생활의 시작입니다. 몸을 쳐서 복종시키십시다. 남은 사순절 기간 절제로 우리들의 신비한 몸을 길들이십시다. 절제로 길들여진 몸으로 홍해를 가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들에게 종종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항상 주간지만 읽곤 했던 사람이 장기 이식을 받은 후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 장기 이식을 받은 후 예술가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의학계에서는 완전히 과학적으로 규명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학을 떠난지 오래 되서인지 몰라도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몸이 우리들의 행동을 기억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인들의 몸을 장기 이식 받으려 좇아 다닐수는 없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 구석 구석을 성인의 몸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사순절에 절제의 삶을 통하여….
어느덧 우리는 excellence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갈 것입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우리들의 신비한 몸 구석 구석에 절제의 자취를 남기십시다. 온 몸으로 부활의 그 날까지 밀고 가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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