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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23:10-12 (06/03/2018)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위해 행하는 통과의례를 ‘비젼 퀘스트’라고 부르는데 한편으로는 ‘산에 오르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때가 되면 아이는 한증막에서 향으로 몸을 정화한 뒤 산에 오릅니다. 산 정상에서 돌로 둥근 원을 만들고 아이들은 그 안에 앉아서 잠도 자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어려운 시험이고 고난을 통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첫 걸음입니다. 그 보상으로 아이는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얻습니다. 산 정상에서 오직 대자연과 마주한 아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왔고,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답을 달라고 신에게 요청합니다. 실제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비전 탐구 의식에 나선 아이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전환은 그동안 자신을 지배하던 낡은 자아와의 작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영적 탐구의 시작이며, 자신이 가진 정신적 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이 용기 있는 의식을 통해 아이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사작합니다. 독립적으로 설 수 있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비전 탐구 의식을 마친 아이는 다시 땀천막에서 정화 의식을 치르고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은 모두 이 의식을 거쳐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실 원주민들이 유롭인들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요즘 피폐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겨진 유산은 세월이 지날수록 꽃피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켄트 너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들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았다. 이들의 영혼은 바위며 숲, 강이며 산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시냇물 속에서, 나무 속에서 속살거리고 있다. 이들의 심장은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대지와 같으므로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번은 인디언의 심장을 우리가 지금 발을 디딛고 살고 있는 대지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인디언의 심장이 없다면 미국이 없다는 말로 받아드려집니다.
물론 미국은 청교도 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인디안들의 정신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공감하게 됩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는 이유는 청교도 신앙과 더불어 인디안들의 깊은 영성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청교도 신앙과 인디안들의 깊은 영성에는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떠남입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습니다. 인디안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삶에서 떠나서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산 정상에서 참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으로 돌아 오곤하였습니다. 곧 떠남입니다.

떠남이 이처럼 소중함은 기독교 신앙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떠남이 왜 그렇게 소중한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0, 11절 말씀입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안식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6년 땅을 경작하면 1년을 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년간 생산의 삶에서 떠나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7년에 한번은 가난한 자들이 마음껏 남의 밭에 들어와서 열매를 따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떠나 있는 동안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집니까? 6년 일하고 7년째 쉬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합니다. 아울러 들짐승까지 마음에 둔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멋진 삶을 이스라엘인들은 누렸을까요? 역대하 36:20, 21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하였는데 그 이유는 70번의 안식년을 안 지켰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70번 경작하던 손을 놓고 잠시 일에서 떠나야 했는데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70번의 안식년에 해당하는 70년간 포로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이처럼 귀한 안식년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를 다음 귀절에서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12 절 말씀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안식일을 잘 못 지키는 사람들이 어떻게 안식년을 잘 지키겠습니까? 1주일에 하루를 제대로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1년을 떠날수 있었겠습니까? 곧 안식일을 잘 못 지켰기에 안식년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 마디로 안식일도 떠남의 날입니다. 먼저 각자의 일에서 떠나는 날입니다. 사람만 일에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와 나귀도 떠나는 날입니다. 아울러 여종의 자식도 떠나는 날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안식일의 하이라이트는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들은 떠나온 자들입니다. 떠남의 날에 떠남의 주인공들인 나그네들이 숨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이 때 온전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하여금 숨을 돌리게 하지 않는다면 안식일에 제 아무리 거룩한 제사를 드려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나그네를 잘 섬기면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사실 나그네를 영어로는 stranger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sojourner라는 말로 바꾸려고는 하지만 그래도 stranger가 더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여름이 가까이 와서 집에서 사시는 분들은 잔듸밭을 망치는 잡초로 인해서 많이 신경을 쓰시는줄 압니다.
저희 집은 앞 뜰이 넓은 편이 아니라서 제가 8년전에 이사 오자마자 혼자 힘으로 잡초를 제거해 보겠다고 애써 보았지만 그만 잡초에게 지고 이제는 회사와 계약을 해서 잡초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잡초는 우리 잔듸밭에 stranger 곧 이상한 놈들입니다. 이상한 놈들이니 뽑아 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잡초가 우리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나그네를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를 통해서 이상한 존재들의 소중함을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계십니다.
제일 눈에 띄는 잡초가 crabgrass입니다. 저희 집 뒷 마당에도 꽤 있는데, 어느 책을 보니, crabgrass의 뿌리를 끓여서 차로 마시면 기관지염에 좋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간과 신장에도 좋다고 합니다. 비듬도 예방한다고 합니다.
Crabgrass는 잔듸밭을 가꾸는 자들에게는 원수입니다. 이상한 식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Becca Stevens라는 분이 쓴 ‘Snake Oil’이라는 책에서 읽었는데 그는 버려진 여인들을 모아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엉겅퀴로 물건을 만들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Snake oil’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독사의 독을 가지고 연고로 만들어 바르면 아픈 곳의 통증을 없앤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사의 독은 그 뿐 아니고 현대 의학에서는 심장마비에 귀하게 사용됩니다. 독사의 독을 조금 변형시켜서 심장마비 약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뉴질랜드에 가 보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곳에는 뱀이 없다고 합니다. 뱀이 없어서 좋은 것 같지만 심장병 환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줄 압니다. 우리는 삶에 stranger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나그네들은 정착민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정착민들에게 없는 것을 나그네는 갖고 있을까요? 나그네는 떠난 자들입니다. 떠난 자들은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다 보니 참 자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보물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치 원주민의 자녀들이 모든 것을 놓고 산 위로 떠나갔을 때 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사실 정착민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을 의지합니다. 세상 안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의지합니다. 세상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인조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움직이는 AI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알파고가 나오기 전에 우리는 이미 알파고처럼 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알파고를 이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착민과 알파고가 바둑을 두면 알파고가 백전백승합니다. 그러나 알파고는 나그네를 이길수 없습니다. 나그네에 대한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착민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알파고가 아닙니다.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착민들처럼 인조인간이 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새 싻들에게서 귀한 교훈을 찾아 봅니다. 씨앗이 싻이 돋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한 것을 잘 아실줄 압니다. 산소, 따뜻한 온도, 물입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싹이 납니다. 떡잎이 나옵니다. 떡잎이 나온 다음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햇빛입니다.
얼마전에 저희 조카가 좋아하는 나팔꽃을 뒷뜰에 심었습니다. 거의 매일 얼마나 자랐나 살펴 봅니다. 처음에는 떡잎이 나오는데 다른 꽃들의 떡잎과 구별하기가 쉬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쉽게 구별하겠죠.
그런데 다음으로 잎이 나오는데 나팔 꽃 특유의 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심은 것이니 나팔 꽃잎인 것을 쉽게 구분했지요. 그냥 구분하라면 못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잎이 무성해지면 언젠가 꽃이 필줄 압니다. 그 때 비로서 나팔꽃임을 알아 보게 됩니다. 한편 꽃이 피기 위해서는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잎이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곧 나팔꽃을 다른 꽃과 구분할수 있는 길은 햇빛을 많이 쬐이게 하는 길뿐입니다. 그 때 나팔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사람도 매한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많이 받을 때 자신의 최고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 누구일까요? 나그네들입니다. 떠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걸어 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정착민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삶이 정착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는 약이 됩니다. 아주 특별한 약이 됩니다. 의사와 겸한…. 무슨 뜻이냐구요?

지하철에 할머니와 손자가 타고 있었는데 꼬마의 안색은 좋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합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할머니는 대답합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나그네들은 아픈 사람들을 알아 봅니다. 더 아픈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숨을 돌리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정착민들에게 필요한 그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AI(인공지능)이 되어가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특히 보스톤은 인공지능 환자 전문 병원입니다. AI환자들의 특징은 모든게 콤퓨터화 되어서 자기와 조금만 차이가 나면 바이러스라고 “삑삑” 하며 거부합니다. 늘 자기 분양 사람 내지 자기와 어울릴수 있는 사람들과만 상대합니다. 스스로 환자인줄 모르고….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치료약이 있습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사실 실제적으로 모두가 집을 버리고 떠날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착민들이 있어야 세상은 굴러가지 않습니까? 모두가 나그네가 될 필요도 없고 될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너무도 소중한 계명입니다. 나그네를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나그네가 되지 못하는 분들은 나그네들에게 숨을 돌리게 하면 됩니다. 그 때 정착민들은 인조 인간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참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나그네를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죠. 약들이 다 쓰지 않습니까? 약이 달면 마약이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맞이하지 않는 이유가 쓰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은 쓴 약이기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쓴 약인 주님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나그네로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십시다. 나그네들은 평화를 주는 의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께서 숨을 돌리시는 날입니다. 많은 나그네들과 함께….

말씀을 거둡니다.
미네소타에 St. Cloud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이 나그네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3년전부터 시장이 한 달에 한 번 새로 그 마을로 온 이민자들을 7명씩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나눈다고 합니다. 간단한 식사를 나눈 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필요한 대화들을 나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약 120명의 이민자 곧 나그네들이 시장과 식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 결과 여러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인종을 초월한 아름다운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시청에서 여러모로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장이 기독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본인의 안식일에 나그네를 숨을 돌리게 하는 참 안식일을 지키는 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시장은 자신도 모르게 메시야를 초대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축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그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소외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소외된 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그네와 소외된 자들을 축복합니다.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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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131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27-34 (06/10/2018) webmaster 2018.06.11
130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23:10-12 (06/03/2018) webmaster 2018.06.06
129 “브니엘의 자녀들” 창세기 32:21-32 (05/27/2018) webmaster 2018.05.28
128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룻기 1:6-18 (05/20/2018) webmaster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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