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보스톤 코리아에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되어졌습니다. 어느 시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7월 중순 부모님을 만나러 플로리다행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옆자리 승객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 자신이 1학년 담임이며 자기 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저소득층 자녀이거나 일부는 노숙인의 자녀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도 인정하는 수다쟁이 버뮤데즈씨는 학생들은 굶고 학교를 등교하고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 이민자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조달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 학교의 교사들과 교무교사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학생들의 생필품, 학용품 등을 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옆자리 승객은 그녀의 열성적인 말에 자신의 회사에서 그 초등학교에 기부를 하고 싶다고 밝혔고 그녀는 기뻐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에 아이를 앉힌 낯선 승객은 $100짜리 지폐가 맨위에 놓인 돈을 건넸습니다. 그녀는 사람 앞에서 돈을 세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에 돈을 받고 감사하다고만 했습니다.
비행기가 잭슨빌에 도착했을 때 복도 건너편에 있던 승객도 엿들었다고 하면서 $20을 건넸고, 그녀의 앞에 있던 승객도 $10을 건넸습니다.
버뮤데즈씨는 이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고 최초엔 약 1천명이 ‘좋아요’를, 800명이 이야기를 공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스토리를 워싱톤포스트가 보도하고, NBC등 각 언론이 보도한 이후 무려 5만 1천명이 ‘좋아요’를, 공유 1만 7천회를 눌렀습니다.
버뮤데즈씨는 기부금으로 학생들을 위해 책을 구입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또한 학생들의 백팩과 다른 학용품도 구입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스토리가 전국을 흔드는 가운데서도 무려 500달러 돈을 건넸던 남자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버뮤데즈 씨는 그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는 단지 놀라운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낯선 사람에 대한 선생님의 반응일줄 압니다.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는 단지 놀라운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면 이 세상은 바로 천국과 같지 않을까요? 그럼 이런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시험코자 했습니다. 주님은 이를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는 신났을 것입니다.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는데 예수가 걸려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당하게 답변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제 그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을 정도입니다. 자기가 펼쳐 놓은 덫에 예수는 걸려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챤스다 생각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당연히 자기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있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는 율법 교사의 질문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답하기 위해 당신의 특유의 화법으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다섯 명의 등장 인물이 나옵니다. 먼저 강도들과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강도들은 한 사람으로 간주하겠습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표현에 많은 무게를 줍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중이 아니라 여리고로 내려 가던 중에 만난 것입니다. 거룩한 도시에서 속세의 도시로 내려 가던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번째 인물인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빨리 제사 업무를 보아야 하니 조급하게 올라갔을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급한 용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일 중요한 제사 업무는 아닌게 확실합니다. 율법 교사의 머리는 복잡해 집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주님은 이번에는 올라가는 길이었는지 내려가는 길이었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마 앞에 두 사람 다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같은 맥락에서 내려간다고 표현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 때 이 말씀을 듣는 율법 교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급한 업무도 아닌데 피하여 지나 갔습니다. 사실 이 당시 율법교사의 눈에 보이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모습은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들의 특권만 누리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폐단만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조상탓에 특권을 누리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레위지파로 태어나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이기에 그 특권을 누리던 자들입니다. 자기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율법 교사가 된 것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희망은 바로 율법 교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갑자기 예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자기들과 견해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궁지에 몰아 넣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는 속으로 다음으로 나올 인물은 율법교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율법 교사만이 참 선행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원어 성경으로 보면 ‘Samaritan’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교사는 깜짝 놀랍니다. “율법 교사가 아니라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긴다고…?” 율법 교사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마리아인이…?”
사마리아라는 말은 귀에도 담기 싫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사마리아인이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예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뜻밖입니다.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이에 계속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바쁜 업무도 없는데 바쁜 척하고 자리를 피하여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정 반대입니다. 아주 여유가 있습니다. 시간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붓습니다. 사실 요즘도 기름으로 약을 대신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당시는 당연히 기름을 사용했을줄 압니다. 포도주는 아마도 마취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뿐 아니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까지 데리고 갑니다. 그냥 데리고 간게 아니라 데리고 가서 계속 돌보아 줍니다. 아마 밤새껏 돌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할수가 없습니다.
율법 교사는 귀를 막고 싶었을 것입니다. “고만, 고만….” 아니 율법교사 대신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도 못 마땅한데 사마리아인은 최고의 선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교사는 기가 막혀 하고 있는데 주님은 계속 하십니다. 35절 말씀입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율법 교사는 뒤로 넘어 갈 지경입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일한 값입니다. 그러니 이틀 수고비를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족하면 더 주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오겠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털어 섬기겠다는 마음이 역력합니다.
예수를 시험하러 왔다가 완전히 역시험에 걸렸습니다. 눈 앞이 깜깜해져 있는데 주님께서 질문하십니다. 36절 말씀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처음에 예수님께 뭐라고 질문하였죠?
글자 그대로는 좋은 질문 같지만 그 의도는 자신을 자랑하려는 질문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교사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율법 교사의 질문을 바꾸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바로 그 질문을 하십니다. 세기적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두 질문이 얼뜻 보기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중심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이 율법 교사의 질문을 바꾸십니다. 중심을 강도 만난 자로 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모습을 해부하듯 적나라하게 보시면서 하시는 주님의 깊은 의도를 질문에서 느낍니다. 자기의 질문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기가막힌 주님의 질문에 어쩔수 없이 답을 합니다. 뭐라고 답을 하죠?
“사마리아인입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끝까지 이방인 보다도 못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조차 입에 담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대답에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렇게 입에 담기 싫어한 이름을 말할수 있었겠습니까? 주님도 잘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오가 가는 세대를 위해서는 제대로 답변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주님은 사실 이 기회를 잡아서 온 인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잘난척하면서 질문합니다.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
이에 주님은 우리들의 이 질문에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일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사실 주님이 이 답변을 듣고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를 거부하는 율법교사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실은 사마리아인이 되지 않고는 결코 자비를 베풀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만이 자비를 베풀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사마리아인 처럼 되어야지만 자비를 베풀수 있음을 주님은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비를 베푼 자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내 세운 것입니다.
그럴수 밖에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이웃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된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생님 뒷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승객은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불쌍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저 학생들의 이웃은 누구일까?”
어느덧 그의 손은 지갑을 털고 있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사실 여기서 꼭 집고 넘어 가고 싶은 것은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길인지 아니면 어디로 가는 길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여정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로서 추정할수 있는 것은 그의 여정은 예루살렘과 관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럴수밖에 예루살렘 근처에 가면 조롱과 멸시가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로 가던가 거기에서 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속세의 도시에서 속세의 도시로 여행하던 사람입니다. 곧 주님은 그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처음 이야기에 나온 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는 단지 놀라운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이런 승객과 같은 사람이 곳곳에 있다면 이 세상은 천국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질문을 바꾸면 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일까?”에서 “ 저 사람의 이웃은 누구일까?”로 바꾸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여학생들이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의 남편은 존경받는 장로가 될 사람이면 좋겠다.” 여학생들의 생각이 그러니 당연히 남학생들은 “나는 존경받는 장로가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도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러니 속마음으로는 존경받는 장로가 되고 싶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존경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잘 따르면 존경받는 자가 되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성경 말씀 어디에도 존경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존경받게 되는 것은 부수적인 결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경받는 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바로 율법 교사가 되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에 보면 “피차 먼저 존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2:10 말씀을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베드로전서 2:17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황제를 존경하십시오” 말씀하십니다.
존경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어디로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보이게 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려 오던가 올라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존경을 받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반면 존경을 하려고 하는 자들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존경을 표시하고는 사라집니다. 사마리아인 처럼…. 처음 소개해 드린 승객처럼….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곳을 천국 처럼 되는 길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존경을 받고자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존경을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경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중심이 자기 자신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입니다.
반면 존경하는 사람들은 중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저 분의 이웃은 누구인가?”입니다. 어느덧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어 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천국은 가까이 온 것이 아닐까요? 이웃을 먼저 존경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축복의 길이 펼쳐 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류시화 시인이 배우 김혜자 씨와 함께 네팔을 여행하였다고 합니다. 카트만두 외곽의 유적지에 갔다가 길에 장신구들을 펼쳐 놓고 파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이름난 관광지라서 노점상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혜자씨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싸구려 장신구들 위로 번졌습니다. 놀라운 일은 김혜자씨도 역시 그녀 옆에 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말도 없이 여인의 한 손을 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네팔 여인의 눈물은 옆에 앉은 김혜자씨를 보며 웃음 섞인 울음으로 바뀌어 갔으며 이내 밝은 미소로 번졌습니다. 헤어지면서 김혜자씨는 팔찌 하나를 고른 후 노점상 여인의 손에 300달러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거금이었습니다. 여인은 놀라서 자기 손에 들린 돈과 김혜자씨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왜 그런 큰 돈을 주었느냐고 묻자 김혜자씨는 류 시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잖아요.”
후에 다시 류 시인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김혜자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와 나는 아무 차이가 없어요. 그녀도 나처럼 행복하기를 원하고, 작은 기적들을 원하고, 잠시라도 위안받기를 원하잖아요. 우리는 다 같아요.”
김혜자씨는 존경받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작은 기적을 기다리며 참고 견디는 위대한 사람들이기에 모든 사람을 존경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웃에 대한 존경은 결국 자신의 이웃을 찾기 보다는 그 여인의 이웃이 누구인가 찾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그 여인 옆에서 울고 있었고 300불을 건네 준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도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묻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찾아와 기가 막힌 반문을 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