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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조상 아브라함” 창세기 17:1-8 (12/2/2018)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에 Sunflower주일학교 주관으로 상록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겨자씨 축제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인데, 매일 매주 겨자씨를 심었던 한 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학교 교사분들과 학부모님들의 수고를 힘입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이들은 예쁜 카드와 bookmark와 쁘로찌등을 만들어서 선물을 준비하였고 또 아름다운 음악 순서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또 다시 많은 겨자씨들이 심겨지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예쁜 카드와 bookmark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bookmark를 제가 읽고 있는 책 사이에 껴놓았습니다.

한편 저에게 인사말씀을 부탁을 해서 두서 없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올 봄에 나팔꽃 씨를 뒷마당에 심었었는데 나팔꽃 이야기로 대신했습니다. 저는 올해 여름 한 철 나팔꽃 덕분에 아주 즐겁게 보낼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은 얼마나 피었는지 살펴 보면서 “봄에 나팔꽃씨를 심지 않았더라면…,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겠지” 생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씨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니 잔듸씨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게 되었는데, 잔듸씨는 봄에도 뿌리지만 가을에 뿌려도 좋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면서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뿌리는 씨도 있을까?” 그래서 제가 오신 분들에게 질문을 드렸습니다. “겨울에 뿌리는 씨가 있습니까?”

어느 권사님이 1초도 지나기 전에 대답하셨습니다.

“보리, 밀, 마늘.”

그 대답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겨울에 눈이 오면 밀밭이나 보리밭을 밟아 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잠시 옛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시작하는데 권사님 말씀이 생각이 나면서 혹시 정말 가장 추울 때 뿌리는 씨가 무엇인가 찾아 보게 되었습니다. 눈 위에 뿌리는 씨가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눈 위에 곧 어름 위에 뿌리는 씨는 찾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땅이 얼기 전 섭씨 0도 쯤까지는 씨앗을 뿌려도 그 이하로 내려가면 뿌리는 씨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곧 꽁꽁 얼어붙은 땅에도 뿌리는 씨가 떠올랐습니다. 믿음으로 뿌리는 겨자씨! 이 씨는 꽁꽁 얼어붙은 땅에도 아니 어름 위에도 뿌려지는 것 같습니다. 어름 위에 뿌려졌지만 놀라운 결실을 맺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99세가 된 할아버지에게 너를 크게 번성케 하리라 약속을 하시는데 이를 듣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제 99세 곧 백세가 다 되었는데 나를 번성케 하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번성시키시려면 벌써 번성케 해 주셨어야죠.”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은 엎드렸고 엎드려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99세가 되어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 나쁘진 않아도 뭐 그리 신나는 일도 아닙니다. 사실 신나지 않는 다른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일 처음 나타나실 때는 아브라함이 75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99세가 되었습니다. 처음 나타나신 후 24년이 흘렀습니다. 24년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꼬박 넘어 가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게 됩니다. 당연히 이 때는 75세가 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기는 자식을 가질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후 24년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면, 24년 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기적을 믿고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 같습니다. 따라 나서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앞으로 5년 후에 아이를 낳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미 나이가 75세이니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당장 아이를 낳게 하실 거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한 달이 멀다하고 아내에게 소식이 왔나 늘 관심을 거기에 쏟고 지냈을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면 다음 달에는 다음 달에는 하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덧 1년이 지납니다. 76세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되겠지 하고 또 한 달 한 달 기다립니다. 아내에게 소식이 올 것을…. 또 다시 한 해가 흘렀습니다. 두 해 세 해 자꾸 시간은 흘러갑니다. 80이 가까옵니다.

어느덧 아브라함은 혼자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몸에서 나는 아들이 아니라 우리 집에 있는 자를 양자로 택하시려나 보다”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하겠죠.

아브라함의 생각을 아셨던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갖고 있던 생각 곧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15: 6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80이 넘은 아브라함은 그동안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며 하나님을 믿습니다.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함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를 의롭다 칭하십니다. 당연하죠. 80세가 다 되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의롭다 칭함을 받을수밖에….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면 결과가 나타나야죠? 아브라함은 당연히 기대했겠죠. 이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으니 약속을 곧 이루워주실 것을….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그 동안 관심을 끊었던 사라의 몸에 소식이 올 것을 다시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 년 삼 년…. 그런데 계속 소식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 것과 아들을 낳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봅니다. 또 다시 희망은 사라져 갑니다. 그러던 중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된 것입니다. 이 때 불현듯 하나님께서 의로운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절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24년간 기다려 왔는데 그것도 의롭다 칭함을 받고…,덤덤한 마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또 몇년을 더 기다리란 말입니까?”

 사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러했다는 것은 오늘 본문 다음 귀절에 있는 18절 말씀이 증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조건 말씀하신 셈입니다. 4절 말씀 다시 봉독해드립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지난번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축복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축복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믿는 모습보다 더 소중한 모습을 보아 오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쇄잔한 믿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다림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겨자씨 만한 보일까 말까 작은 믿음과 함께 남아 있던 기다림이었습니다. 몇 년간…? 24년간.

24년이 지나다 보니 밤하늘을 보면서 즐거워하던 모습도 거의 시들어져 갔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이스마엘을 운운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가늘어지고 가늘어졌습니다. 겨자씨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 있다면 작아지는 믿음 가운데서 끝까지 버텨 보고자 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은 24년간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변치 않은 것 하나는 기다림….

꽁꽁 얼어 붙은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힘 없이 엎드린 것뿐입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서 보신 모습은 믿음의 조상의 모습보다는 기다림의 조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때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힘없이 엎드린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보여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겨자씨 처럼 작아서 보여드릴수도 없습니다. 그냥 이름을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99세 때 곧 추운 겨울에 된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기다림의 씨앗을 뿌리는 아브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Never give up for that is just time and place that the tide will turn.)

Harriet Beecher Stowe의 글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 그 장소에서부터 조류가(밀물과 썰물) 바뀝니다.”

꽁꽁 얼은 밭에 믿음의 겨자씨를 뿌릴 때 바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저는 받아 드렸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찼을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사에 간섭하기 시작하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한번도 사람의 이름을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 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창세기 24:25, 26절 말씀을 참고로 봉독해드리면,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처럼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가면서 인간의 역사는 이어져 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역사 한 가운데로 침입해 들어 오는 역사입니다.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는 기점이 된 것입니다. Tide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꾸셨나요?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있는 1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아브라함의 기다림으로 인해 아내의 이름도 바뀌어집니다. 사라, 뜻은 만민의 어미 혹은 여주인. 아내의 이름을 바꾸시지만 아들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지어주십니다. 천하에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한편 이삭의 아들 야곱은 처음에는 형의 뒷꿈치를 쥐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 지어 줍니다. 그러나 후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하나님을 이긴 후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또 바꾸십니다. 창세기 32: 28절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시작을 이루는 삼 세대가 탄생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곧 이스라엘. 이들 모두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이름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삼 세대를 통하여 인류 역사 한 가운데 들어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찬란한 인류 구원 역사의 시작은 바로 아브라함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꽁꽁 얼어 붙은 겨울 땅에 묻혀진 기다림의 겨자씨였습니다. 그 씨로 인해서 위대한 삼 세대가 태어 났으며 하나님은 끝내 당신의 이름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바꾸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3:1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바꾸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기다림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 역사 한복판에 찾아 오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바꾸십니다.

 

오늘 대강절 첫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인간의 기다림의 위대함을 깨달은 믿음의 선조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기간을 특별히 대강절로 정하고 기다림의 소중함을 새롭게 하며 멀어져 간 기다림의 시간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올해 대강절을 통하여 다시금 기다림의 위대함을 새롭게 깨닫고 그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울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기다림의 축복을 늘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스스로를 성찰하는 축복의 시간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네 사람의 이름을 바꾸시거나 지어주셨는데 사실 예수를 믿는 자들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름을 모두 새로 지어 주셨을줄 압니다. 신앙 생활은 바로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그 이름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수밖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아기 예수가 되어서 인간 역사에 몸소 찾아 오신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아기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인간 역사에 찾아 오셨기에 만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당연히 우리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았을까요?

이번 대강절 기간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희미하게 찾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새로운 이름은 모두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기다림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 사라의 기다림, 이삭의 기다림, 야곱의 기다림이 다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더욱 찬란해 지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다림이 필요하셔서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기예수를 기다림과 함께 우리들의 삶의 기다림은 온 세상 역사를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기다림에 충실하십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기다림의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을 거둡니다.

꽃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꽃의 다양한 색상은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의 변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색소는 pH(산성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pH가 산성이면 붉은 색, 중성이면 보라색, 알칼리성이면 파란색과 노란색이 된다고 합니다.

서두에 제가 나팔꽃을 심었다고 했는데 사실 두 종류의 씨앗으로 알고 두 곳에서 나팔꽃씨를 받아 왔었습니다. 빨간색과 보라색 나팔꽃씨를 받아 와서 심었습니다. 저는 빨간색과 보라색 나팔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빨간색꽃만 피더라구요. pH가 다른 두 곳에서 씨를 받아 와서 저희 집 뒷마당에 심었더니 빨간색꽃만 피게 된 것입니다. 꽃의 색깔은 꽃의 DNA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다림의 pH에 따라서 우리들의 삶의 꽃색깔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곧 우리는 각자의 독특한 기다림의 pH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놀라운 역사 속에 각자가 독특한 꽃을 피우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pH는 다를지라도 한 가지 같은게 있습니다. 모두 온 힘을 다해서 하늘을 향하더라구요. 나팔꽃은 하늘을 향하듯이 우리들의 나팔꽃은 모두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피어 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추운 겨울에 각자 나름대로 기다림의 겨자씨를 뿌리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서 인류 역사 한 가운데 찾아 오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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