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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으시더라(IV): 들리심” 요한복음 12:27-36 (04/14/2019)

 

이번 사순절 기간 3번에 걸쳐서 주님의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종려 고난 주일 설교 말씀도 광야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즘도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중동지방 (곧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이스라엘의 네게브 광야 근처)에 18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베두인이라고 부릅니다. 베두인들은 집도 없이 떠돌면서 살아갑니다. 양을 치는 유목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예루살렘 근처에 베두인들을 위한 아파트를 짓고 무상으로 입주할 수 있도록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못 되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나갔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에 들어와 살려고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를 다음의 대화에서 읽어 볼수 있습니다.

 

어느 여행객이 한 베두인에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 광야에서 몇 년이나 살았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700년입니다.”

조상 대대로 700년 광야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떠 올랐습니다. ‘이들은 왜 좋은 아파트를 버리고 계속 광야에서 고생을 하나?’ 금방 제 머리에 답이 떠 올랐습니다. ‘아하, 광야에 매력이 있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광야의 매력으로 인해 좋은 아파트 시설을 버리고 다시 광야로 향한 것이 아닐까요?

 

올해 사순절도 재의 수요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3:18-19절 말씀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생의 광야에서 일평생 살다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인생의 광야에도 매력이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매력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류의 시작이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한 동안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던 성경학자들의 주장을 빌리자면 인류의 광야의 삶은 5천년이 된 것입니다. 만년 혹은 2만년으로 생각하실수도 있지만 오늘은 편의상 5천년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곧 주님은 인류 5천년 광야 역사 한 복판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광야의 역사가 지속될지는 하나님만 아실줄 압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광야 역사에 왜 찾아 오셨을까요? 이 광야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27절 말씀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괴로움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주님은 몹시 괴로운 상태에 계십니다. (물론 주님은 당신이 곧 지셔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 고백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알면 주님의 복잡한 심정을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종려주일인데 종려 주일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12:27절 부터인데, 12절부터 주님께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곧 오늘 이야기는 종려주일 내지 그 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신 후 헬라인 몇이 예수를 찾아 옵니다. 그 때 주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죠. 아마 오늘 아니면 이번 주 중 하신 셈입니다. 헬라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생각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히게 된다면 더 이상 광야는 아닙니다. 이 세상은 광야 아닌 광야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은 풍년의 축복이 가득한 광야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당신이 광야에 오신 이유는 광야에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로 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광야에 풍년 곧 보석의 풍년이 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이 광야를 매력 덩어리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번쩍 번쩍 빛나는 곳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듣고 두 제자 뿐 아니라 헬라인도 얼마나 흥분이 되었겠습니까?

사실 헬라인이 찾아 온 이유도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 나무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으니 무언가 놀라운 일이 곧 일어 날 것을 기대하고 찾아 왔을줄 압니다. 물론 제자들도 잔뜩 흥분하고 있었겠죠. 모든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는데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찬 물을 끼얹습니다. 제자들과 헬라인들이 느끼고 있는 흥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계신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동상이몽…!

사실 광야를 매력 덩어리로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 값을 치뤄야 하는데 주님께서 치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괴로움에 처해 계신가요? 어떤 괴로움이기에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매력이 넘치게 만드실까요? 저는 주님께서 처하신 고통을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하고 싶습니다. 물론 다 아시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셔야 하기에 괴로우셨습니다. 사순절 내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였습니다. 특히 육체적 고통은 너무도 잘 압니다. 가시 하나가 박혀도 아픈데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상상키 어려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두번째로는 주님은 외로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보면 모두가 흥분되어 있습니다.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주님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고통을 어느 분의 고백을 통해서 느껴 보았습니다. 약 20년 전에 Colorado에 Columbine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12명의 학생과 선생님 한 명을 살해하고 21명을 상해를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사건입니다.

최근 한 학생의 어머니가 드디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다 치룬 후 나타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당신의 아들은 아주 모범생이었고 이런 일을 한다면 제일 마지막에나 할수 있는 아이였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자녀교육이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저런 일을 하는 자녀가 되었나 손가락질 하지만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일기나 자료를 통해서 결론을 내린 것은 어머니도 모르게 자살하려는 충동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고 합니다. 자살 충동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는 Ted-Talk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혀 예측할수 없는 일이 일어 날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도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이 경험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사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절망하셨을줄 압니다. 믿고 창조하고 온 세상을 맡기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당신의 뜻을 어겼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 나름에는 완전하게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기뻐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마자 “옳거니 내가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면 되지” 금방 생각이 떠 올랐을까요? 앞이 캄캄해졌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 삶 속에 때로는 캄캄해지는 때가 있죠. 우리가 경험했던 것 보다 더 캄캄하면 캄캄했지….

저는 그 어머니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도 전혀 예측할수 없었던 일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이기에 이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낼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아담의 죄를 대신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더 거쳐야 하셨습니다. 주님은 군중에게 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문맥상으로 보면 주님의 기도가 거절 당한 것입니다. 주님은 무슨 연고인지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셨고 그런데 ‘그러나’하는 것을 보니 기도는 거절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생전 처음 쓴 잔을 마십니다. 차가운 거절! 머리로는 이해하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세포 하나 하나 난생 처음으로 느껴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거절당함!

이로서 주님은 철저히 광야를 체험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사람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곳…! 아울러 기도 응답도 없는 곳….

그런데 주님의 위대함은 바로 그 거절의 응답을 순수히 받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를 대신 지어야 하기에…. 그래서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절망 가운데 그것도 모자라서 또 거절당하기 위하여 광야에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절당한 자의 고백을 들어 볼까요? 32, 33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거절당했기에 당신은 땅에서 들려져야 할텐데 그 때 모든 사람을 이끌겠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거절당하심을 십자가에서 죽으신다고 말씀하시지 왜 땅에서 들린다고 표현하셨을까요?  그렇다면 ‘들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배경을 살펴 보면 좋을줄 압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도 주시고 메추라기도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셔도 계속 불평하고 반항합니다. 그래서 참다 못해 불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불뱀에 물려가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어쩔수 없이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 못지 않게 절망에 익숙하신 하나님, 아담 이후로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절망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는 하나님은 또 다시 자비를 베풉니다.

모세로 하여금 구리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높이 달아 올리게 합니다. 불뱀을 보는 자마다 나음을 입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장면을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주님은 비로서 불뱀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불뱀처럼 들려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외로움과 하나님의 아들의 거절 당함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외로움과 거절 당함의 고통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 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6절 말씀입니다.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제 아무리 죄를 지었을지라도 불뱀에 물렸을지라도 십자가의 주님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담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도리어 기가 막힌 경험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계획에도 없었던 당신의 아들을 세상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광야 한 가운데서 당신의 아픔과 절망을 안고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는 자들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바로 불뱀에 물린 그 곳에서 놀라운 빛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아마 하나님도 놀라셨을줄 압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던 하나님은 이번에는 말씀도 못하고 혼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실까요?

 

 일본 사람들이 깨진 도자기를 고치는 예술적 작업을 Kintsugi라고 합니다. 깨진 도자기를 광택이 나게 하는 진흙에 금 은 또는 플라티늄을 섞어서 깨진 곳을 메꾼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리어 깨지기 전 보다 더 멋진 작품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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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나 저런 멋진 작품이 될까요? 절망의 아픔을 안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보는 자들은 죄를 짓기 전 보다 더 멋진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광야는 그냥 광야가 아닙니다. 매력이 넘치는 광야입니다. 주님께서 절망 가운데서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거절을 당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적 아픔으로 깨어지고, 절망적 거절 당함으로 깨어졌기에 광야에 사는 사람들을 아름다운 보석이 되게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광야에서 높이 들리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광야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광야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은 인생의 광야에서 함께 절망하고 거부를 당합니다. 그러니 함께 위로하며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매력이 넘치는 광야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텍사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름이 안 뜨기에 광고 전화인가 생각이 들었는데 종종 지인들이 전화를 하곤 해서 받아 보았습니다. 한국사람이 전화를 걸어 온 것입니다.

그곳에 계신 목회자이신데 최근에 King James영어 성경을 당신이 친히 한글로 번역해서 영한 성경을 만들었다고 그 자신이 만든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저는 사지도 않을 것이고 관심도 없고 빨리 설교 준비를 마쳐야 하기에 보내고 싶은 자료가 있으면 이멜로 보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에도 보내셨다고 하기에 아마 정크메일이 된 것 같은데 다시 보내시면 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전화 멧시지로 보내시겠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후 계속 멧세지가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열번에 걸쳐서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 준비가 마친 후 한참 후 열어 보았습니다. 거의 같은 사진을 보내고 또 보내신 것입니다. 한 성경책을 펴 놓고는 주위에 여러 성경책을 놓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마도 한 성경책도 팔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신 사진을 찍어서 저에게 열차례 다른 사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금방 느꼈습니다. 광야에서 절망과 거부당함을 매일 겪고 있는 모습이 그냥 떠 올랐습니다.

같은 광야에 살면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생각케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모습이 광야에서 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고 아울러 하나님께도 거부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분들로 인해서 21세기의 광야도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본인의 아픔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주님께서 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 기도 거부로 인해서 오늘 보스톤의 광야도 매력이 넘치는 곳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광야에서 종종 절망에 빠지고 기도가 거부를 당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하신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주님의 깨어짐은 우리의 절망과 기도 거부 조차도 아름다운 빛으로 바꾸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광야는 매력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이 느끼는 절망과 기도 거부의 아픔에 함께 동참한며, 함께 위로한다면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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