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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게 하셨나니…” 고린도전서 3:1-9 (06/30/2019)

 

언젠가 소개해 드렸던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출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있습니다. 2년전에 안식월 다녀 온 후 첫 설교에서 그 분의 시를 소개해 드린 기억이 납니다. 시간까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제가 안식월을 가지면서 한국을 방문 시 그 책을 샀고, 그 후 파리를 방문했는데 파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 분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제 마음을 확 사로잡은 시가 있었는데, 그 시를 안식월후 첫 설교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시 소개해 드리면,

 

‘손’

 

우리의 손가락 다섯 개, 그 각각의 끝에 있는
스물일곱 개의 뼈,
서른다섯 개의 근육,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시집 제목이 ‘충분하다’라서 자세히 내용도 살피지 않고 단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만 접하고 샀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충분하다’라는 시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 제목으로 된 시를 찾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파리에 가서 하나씩 매일 읽어 내려 갔습니다. 어느 날 ‘손’이라는 시를 읽다가 드디어 왜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손 하나로 충분하다’라는 멧세지가 저에게 깊게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작년도 어느 집회에 갔을 때 집회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하고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한 달 전 NCKPC총회에 갔더니 그 집회에 오셨던 몇몇 분들이 집회 주제인 ‘충분하다’라는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 오셔서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제가 이런 제목으로 집회를 인도할수 있었던 이유는 쉼보르스카 시인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 분은 과연 어떤 시인이기에 제 마음을 사로잡는 시를 썼고 그로인해 제가 남들에게도 이런 멧세지를 전할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 시인이 어떤 분임을 저는 시집 뒤에 써 있는 어느 인터뷰 기록에서 느낄수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책의 독자는 남자건 여자건 간에 아무튼 인생에서 크게 성공한 상류층의 모습은 아니에요. 수영장과 분수대, 온갖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호화로운 저택에 앉아 내 시집을 읽는 독자의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가질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거든요. 반면에 내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독자의 이미지는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지만, 일단 지갑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시금 확인해봐야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돈이 많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망설이지만, 그래도 꼭 읽고 싶어 끝내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내가 상상하는 내 책의 독자들입니다.”

 

사실 쉼브로스카는 책을 많이 팔기 위해 하는 특별 프로모션이나 이벤트를 싫어한 시인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가 평범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시를 쓸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고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마음을 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둘 때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계는 시인들의 세계에만 국한될까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찾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을 어린아이 같이 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를 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한편 시기와 분쟁을 그럴싸하게 카바하고 있는 것도 지적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겉으로는 마치 깊은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나 봅니다. 아볼로편과 바울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아볼로와 바울이라는 가면을 쓴 것뿐이지 속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정치 이야기는 삼가고 있지만, 그래도 정치인들이 제일 좋은 비유가 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정치인들이 서로 서로의 이념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깊은 속을 보면 어린 아이가 되어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환히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념으로 멋지게 포장한 것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그와 같았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를 앞장 세워서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자기들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깨우쳐 줍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자기와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다툼거리를 제공할 사람들이 아닌 것을 밝힙니다.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물을 주는 동역자임을 밝힙니다. 그뿐 아니라 한 가지를 더 밝힙니다. 하나님은 자기들 둘의 사역을 완성시키는 분이심을 밝힙니다. 자기들은 심고 물을 주었는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표현을 자세히 살피면 바울의 말이 앞 귀가 안 맞는 것을 느낍니다. 어린 아이 같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고 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한심하게 보이는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대한만큼 많이 자라지 않았지만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지금쯤 꽃이 피일 때가 되었지만 그렇게는 되지 못했어도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그래도 하나 둘 눈에 들어 오게 된 것 같습니다. 하여튼 어린 아이와 같지만 그래도 얼마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자기 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도바울은 솔직히 고백합니다. 심고 물을 주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정말로 신비한 것은 자라게 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작년에 한 두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작년도에 나팔꽃 씨를 받아다가 뒷마당에 심었습니다. 그 후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물을 늘 주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심기도 하고 물도 주었습니다. 별로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나팔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제가 심기도 하였고 물도 주었지만 감히 제가 자라게 했다고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울도 저와 같은 심정으로 말씀하고 있을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심는 일과 물 주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닐까요? 심는 일과 물 주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과연 자라게 하실수 있을까요? 8절 말씀입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대단한 일이 아니면 상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아도 결과를 보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받을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대단할까요? 말씀드린대로 저는 나팔꽃을 심어도 보았고 물주기도 해 보았는데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아래로 향하는 행동입니다. 심고 물을 주려면 아래를 내려다 보아야 합니다. 아래에 온통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래로 향하는 행위를 좋아 하십니다. 아래로 향하는 행위는 간단합니다. 누구나 다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 향하는 일은 아무도 못합니다. 하나님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혼자서는 못하십니다. 누군가가 아래로 향할 때 비로서 그것을 가지고 위로 올리십니다. 신비롭게….

 

처음 말씀드린 쉼브로스카의 시들이 왜 신비스롭게 우리들 가슴에 다가 옵니까? 그는 아래로 향하는 마음으로 시는를 쓰는 분이십니다. 그 결과 신비스롭게 그의 시는 아름답게 자라는 꽃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 막 여름이 되었지만 아직도 봄의 기운이 역력하여 주변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대신 열심히 산책을 많이 하는데 평소에는 집 가까운 동산에 자주 올라가곤 하지만 요즘은 동네 산책을 많이 합니다. 이유는 정원에 피어나는 꽃들을 보기 위해서….

그 꽃들이 어떻게 피어났습니까? 누군가가 심었고 누군가가 물을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자라게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아래로 향했기에 그런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산책을 할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매한 가지가 아닐까요? 지난주 어느 교우님이 집사람에게…, “우리 교회 너무 좋아요.”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도 고린도 교회처럼 부족한 점도 많이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신비스러운 꽃향기가 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아래로 향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보이지 않게 기도하시고 수고하시는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여기 저기 손질도 하시고 쓰레기도 주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성껏 교회살림을 위해 헌금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외에 본인 만이 아는 아래로 향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러한 아래로 향하는 분들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여름성경학교로 많은 자녀들이 매일 교회에 나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귀한 일이 가능할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 향하는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수고를 통해서 자녀들을 신비스럽게 자라게 하십니다.

 

지난 주일부터 교회는 강단 스카프는 초록색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초록색은 성장의 절기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은 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록색 장식은 성령 강림 주일 후 시작합니다.

그런데 언제 성장케 하신다고요. 아래로 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성장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래를 보시고 성령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아래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도 아래로 내려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내려가는 심정으로 이웃을 섬길 때 신비스러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언젠가 인류 역사는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지구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본받아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내려 가십시다.

지금도 주님을 본받아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내려가십시다.

우리가 지구 중심까지 내려 가려고 한다면 못 만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분파도 없어집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위대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려감으로 인해 어느새 심고 물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십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또 또 내려가십시다. 삶을 다 할 때까지….

말씀을 거둡니다.

장애인 올림픽에 있었던 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승하기를 원했던 장애인이 100미터 달리기를 금메달을 따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그런데 함께 달리던 선수 하나가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는 뒤로 돌아가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와 함께 달려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장애인 올림픽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이 장애인은 물론 금메달을 향해 달렸습니다. 금메달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아래로 향하는 경주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쓰러지자 아래로 향하는 경주를 우선 달린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꼴찌가 될지라도….

 

이 이야기를 쟝 바니에라는 ‘방주’설립자 곧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크게 공헌한 분이 당신의 책에서 소개합니다. 쟝 바니에로 인해서 헨리 나우엔이 공동체에 눈을 뜨게 됩니다.

 

쟝 바니에, 헨리 나우엔, 100 미터 달리기 장애인 선수 모두 아래로 향하여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신비스러운 세계를 높이 인간 세계 안에 세우실수 있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함께 아래로 우리들의 마음을 향하십시다. 우리 보다 더 어려운 자 약한 자들을 경주를 하십시다.

물론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웃에게도 찾아 가십시다. 말씀을 심고 물을 주십시다.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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