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110319
마가복음 12장 13-17절
“가이사의 것은…”
———————————————————————————————————-
한 아들과 몸 약한 어머니의 대화입니다.
“어머니,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전보다 더 나쁘구나!”
“내일은 더 나빠지기를 빕니다.”
다음 날, “어머니 오늘은 좀 어떠세요?”
“더 나쁘구나!”
“내일은 더 나빠지기를 빕니다.”
그다음 날.
“어머니, 오늘은 어떠세요?”
“훨씬 좋구나, 다행이지 뭐냐.”
“내일은 더 좋아지기를 빕니다.”
걷잡을 수 없는 아들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안 좋다는데 더 안 좋아지라고 하더니, 훨씬 좋아졌다고 하니 이때는 더 좋아지기를 빌고 있습니다. 과연 이 아들은 어떤 아들이기에 이렇게 헷갈리는 말을 어머니께 드리고 있을까요?
사실 아일랜드가 낳은 시인 예이츠가 소개하는 한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들이 아일랜드의 성자로 알려진 콜롬킬이라는 성자입니다. 이 콜롬킬이 켈트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자는 범인들의 생각을 언제나 뛰어넘나 봅니다. 성자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사실 예이츠는 이 글 속에 있지 않은 그 무엇을 보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니 성자는 깊은 미소를 머금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내일은 더 나빠지기를 빕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의 회복을 마음속 깊이 고대하면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빠지더라도 전혀 초조해하지 말라는…, 그래야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배려 깊은 대화인 것 같습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 주일인데 왜 어머니 주일에 드릴 말씀을 설교 서두에 하시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세 어머니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로는 특히 천주교에서 많이 사용합니다만 교회가 어머니입니다. 오래전 ‘어머니 교회’에 대해서 몇 차례 설교를 드렸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또다시 드려야 할줄 압니다. 오래되었으니 반복의 의미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키프리안이라는 초대교회 교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완벽한 교회는 없죠. 모든 어머니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이처럼 흠 많고 상처투성이인 교회를 어머니로 모실 때 하나님을 떳떳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흠이 많다고 어머니로 모시지 않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 우선 두 어머니가 누구라고요? 첫 번째는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 두 번째로는 교회가 어머니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 많은 분이 어머니로 부르는 무엇이 있습니다. 영어로 더 많이 불립니다.
‘Mother Earth.’
지구 아니 땅도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들도 흙으로 만들어졌고요.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우리가 흙으로 돌아갈 텐데, 이 땅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이 세 어머니를 잘 모실 때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의 어머니, 어머니 교회, 지구라는 어머니.
그러면 오늘 청지기 주일을 맞이하여 세 번째 어머니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정의 평화 환경 주일을 지켰는데 지구 곧 자연환경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어떻게 인간 세상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곧 단지 지구만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 지구 위에 펼쳐지는 인간 세계도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단지 지구 위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 위에서 세워진 인간 세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인간 세계 없이는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인간 세계도 지구 못지않게 중요한 어머니입니다.
주님께서 2천 년 전에 이 땅에 사실 때 주님도 세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마리아라는 육신의 어머니, 유대교라는 어머니 교회, 세 번째로는 지구를 포함한 세상이라는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러면 특히 세 번째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 번째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배경을 살펴봐야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성 종교인들과 다투는 말씀이 오고 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다투는 대화가 오고 간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곧 십자가에 얼마 후 달리실 것을 예감하시고 계실 때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포도원 비유 곧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아들을 죽인 비유를 통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의 숨은 계획을 알고 있는 예수라는 청년을 어떻게 할까 고심합니다. 이제 한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의 세상을 어머니로 여길 수가 있을까요? 아니 주님은 어떻게 어머니로 모실 수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하여튼 분위기가 살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속마음이 다 드러났으니 끝으로 남은 것은 예수를 죽일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럴싸한 죄명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을 짓을 해서 죽였다는 구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이런 일에 앞장을 잘 서는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14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추켜 올립니다. 그러더니, 14절에서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나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역죄로 로마 정부에 고소할 생각임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쉽게 넘어가실 리가 없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 당시 동전인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가져 왔겠죠. 아마 그들은 데나리온을 던져 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져 왔을 것입니다. 사실 북한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있는데 이 당시 로마의 황제도 곧 가이사도 거의 신격화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격화된 가이사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인데 그 동전을 던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죠? 16절 말씀입니다.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주님께서 던지시긴커녕 당연한 것을 묻습니다.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답변을 합니다. 계속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가슴이 뜁니다. 이제 역공을 가합니다. 17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사실, 이 당시 유행한 말 하나가 있었습니다. ‘고르반’입니다. 이는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의 말입니다. 이 말로 부모님께 드려야 할 의무를 마치 다한 것처럼 많은 유대인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께서는 ‘고르반’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매한가지로 이 짧은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하고 세상에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곧 주님은 세 어머니 모두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머니 교회에만 헌금을 잘한다는 것으로 해서 청지기 사명이 끝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한편 사회에 공헌해야 합니다. 육신의 어머니 없이 우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어머니 교회가, 어머니 지구 없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어머니 지구를 함께 돌봐야 합니다. 어머니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공익을 위해서도 우리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저희 교회는 부르클라인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부르클라인 정치인들은 환경에 특히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어머니 지구를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하도록 세금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나쁜 정치인들이 많은데 어떻게 세금을 내란 말입니까? 물론 나쁜 정치인도 있고 나쁜 공무원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 큰 도움이 됩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청지기들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잘 바치는 자들이 세상을 위해 바칠 때, 그 물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기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물질의 혜택을 받는 자들은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똑같은 햇빛과 비가 아니고 은혜의 햇빛과 비가 되어서 악인과 선인에게 임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청지기의 특권인 줄 압니다. 그리고 그 햇빛과 비를 쬐거나 받은 자들의 삶 속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곧 우리가 어머니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것 못지않게 세상을 위해 사용되는 것도 귀한 축복의 물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먼저 바쳐야지요. 하나님의 것을 딱 떼어 놓아야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것이라고 딱 떼어 놓은 것이 밑 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나머지 물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던 아주 값지게 사용되지 않을까요?
곧 우리가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졌습니다. 탈세를 안 해서 평생 낙인이 찍히지 않으려고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내는 세금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어머니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야 합니다.
보스턴 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시고 보스턴에서 목회하시다가 한국의 신학교 교수로 가신 장계은 목사님이 계십니다. BNI에서도 강의를 하셨던 분입니다.
이분의 학위 논문이 고린도전서였는데, BNI공개강좌 때, 당신의 논문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 가지 제 뇌리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공공의 선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실한 청지기가 될 것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논문 내용이 좋아서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었습니다.
곧 주님도 그렇고 사도바울도 세상 속에서 충실한 청지기가 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악인들일지라도 그들에게 혜택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에 임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한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이지 않았습니까?
지난주에는 볼티모어에서 교단 소속 노회와 대회 스태프들이 모여서 큰 회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e-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마지막 회의 주제는 재정문제였습니다.
교인 수가 줄어서 총회로 들어오는 재정은 줄고, 대신 교회가 작아지는 곧 도와줄 교회 수는 더 많아져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돌려야 하고…. 이제 절대 축적된 돈은 다 썼고…. 그렇다고 per capita를 무작정 늘릴 수도 없고…. 결론 없는 회의장 모습을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니 부모님이나 사회에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하며 어머니 교회로만 몰아내면 되나요?
저는 남은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이라도 전 교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바른 청지기가 된다면 교회는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이 사회에 이바지할 때 기적의 단비가 온 세상에 내릴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많은 분이 그러시겠지만 저희 집이 Dedham인데 Dedham신문을 구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Dedham은 구독료를 냅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 내외분이 저희 집을 방문했을 때인데, 테이블 위에 Dedham신문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묻기를,
“저 신문 보세요?” 왜 보지도 않을 거면서 아깝게 구독하냐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죄송한 생각이 들지만,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예, 읽지 않죠. 그러나 타운을 위해서 구독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용도는 제가 손톱을 깎을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는 recycle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타운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축복의 이슬방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가이사와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사랑의 빗방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청지기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