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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DNA: 기다림” 로마서 8:18-25 (12/01/2019)

 

얼마전 저희 ECC Chapel에서 좋은 음악 연주회와 함께 문학 강연 모임이 있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외딴 곳에서 사시는 유희주 시인이 오셨는데, 본인의 살아 온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민자로서의 시인의 삶이 어떤지를 솔직담백하게 말씀하셔서 다른 강연회에서 맛 볼수 없는 특별한 시간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유 시인이 등단하게 된 첫 시집에 첫 두 시의 제목이 먼저 이민자인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수유리 1’, ‘수유리 2.’

수유리에 사셨던 것 같습니다. 매사츄세츠 외진 곳에서 살면서 수유리를 그리워하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금방 읽을수 있었습니다.

 

‘수유리 2’의 마지막 한 연만 읽어드립니다.

 

‘책장을 넘겨야 하는데

반쯤 넘어간 책장에

수유리의 어느 골목길이 구불구불 살아 있고

아직도

나는 거기 서 있다.’

 

이민 생활 오래 하신 분일수록 시인의 마음에 훔뻑 젖어 들어 가실줄 압니다. 아마 시인은 생활이 여유치 못해 가고 싶은 수유리에도 가지 못하고 그래서 그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시인은 그동안 당신의 삶에서 늘 생활고에 시달리셨고 여러가지 막일도 하면서 지내왔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쓰게 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다음의 말을 들어보면 단지 생활고가 많은 분들의 마음을 울리는 주된 요인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 매사추세츠의 한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외진 마을에 살고 있다. 참 이사를 멀리도 왔다. 이런 곳에서 시를 쓰는 일은 내 안에 촛불을 밝히는 일이다. 녹아내린 촛농이 가득하고 심지는 겨우 숨을 유지하고 있으나 지금 내 시를 읽고 있는 이가 나와 한 호흡이라도 함께한다면 그것이 계속 시를 써야 하는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시인은 비록 외진 곳에 살지만 당신 안에는 촛불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시인으로 하여금 외진 곳에서 계속 시인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강절 첫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첫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첫번째 켜진 촛불은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촛불은 잘 켜져 있습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우리 안에 있는 촛불은 관리를 하지는 못한채 매일 매일 허둥지둥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촛불이 잘 켜져 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의 촛불은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첫 절과 마지막 절을 보면 촛불을 밝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18절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기대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난 가운데서 참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촛불이 켜진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주 아이러니칼한 표현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참고 기다릴 때 어느새 촛불이 켜집니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보이는 촛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희주 시인도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사시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들이 당신의 시를 읽어줌으로 하나가 되는 축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촛불을 밝히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세상적인 부귀 영화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릴 때 촛불이 켜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릴 때 촛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난주 교단 소식지에 최근에 저희 교단 정서기께서, 정서기는 총회를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콘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소식을 읽어 보았습니다. 보통 정서기는 여기 저기 콘퍼런스에서 자주 설교를 하기에 그리 그 분의 설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설교 제목이 저의 눈을 사로 잡았습니다.

“The More things change, the more Jesus stays same.”

(세상 모든 것이 변하면 변할수록, 주님은 더욱 동일하시다.)

조금 의역을 하자면, ‘보이는 세상 것들이 변하면 변할수록 보이지 않는 주님의 동일하심은 더욱 빛난다.’

 

정서기 목사님의 설교는 대강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시기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강절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그로 인해 꺼져가던 우리들의 춧불이 다시 켜지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어쩔수 없이 보이는 것을 바라봅니다. 기다립니다. 우리는 지난 1년간 보이는 것을 늘 기다렸습니다. 보이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보이는 것들이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아니 보이는 것을 기다리던 것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만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보이는 것을 기다리다가 더 소중한 기다림,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축복을 놓치지 않았을까요?

오늘부터 4주간 우리를 기다리던 대강절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아니 변하지 않는 것을 기다리며 우리들의 촛불을 환히 밝히는 대강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이 편지를 쓰는 사도바울은 대강절이 아직 교회 달력에 들어 오기 전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우리들이 느끼는 대강절의 축복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달리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축복을 어떻게 새롭게 하곤 하였을까요? 19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들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 사도바울은 놀라운 모습을 본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모든 피조물의 공통된 DNA가 무엇인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촛불이 켜져 있는 사람들일줄 압니다.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계속 변할지라도 보이는 세상 일을 기다리는 것이 쉬울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주님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지금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스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공통된 DNA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보스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늘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곧 사도바울은 그 당시 대강절은 없을지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는 대강절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 기다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피조물을 보면서 항상 기쁘지는 않았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보이는 것만 기다릴 때 피조물이 고통을 치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날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 않고 집안에 있는 피조물들을 가꾼다면 피조물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도 그들에게 고통을 치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번 뉴스를 보니 미국 국회에서는 동물학대를 죄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물론 좋은 결정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국회 결정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런 법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모든 동물들은 계속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높은 꿈을 갖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섬기는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처럼 되기 위함이 아닙니까?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이처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동참하실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순서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이고 자기들이 다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놀라운 영광의 자유를 누릴 때 비로서 자기들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것을…. 22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결국 피조물들이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처럼 피조물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피조물들의 DNA는 기다림이고 그 기다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멋진 모습을 피조물 안에서 매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는 매일 매일이 대강절이었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 피조물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서 기다림과 아울러 아픔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과 아픔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매일 보고 느끼는 사도바울은 놀라운 결단을 하게 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을 생각하면서 더욱 자신 안에 있는 촛불을 밝힐 것을 결단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기다리는 것입니다.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몸의 속량은 언제 이루어질까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몸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종종 유리창 앞에 서서 창밖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도 비교해 본다고 합니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나무와 잔듸와 꽃들이 보입니다. 아울러 유리창에 반사되어 비치는 자신의 모습도 보입니다.

물론 이젠 겨울이 왔지만 보스톤의 겨울 경치도 아름답습니다. 유리창 밖에 보이는 기다림과 고통의 조화를 안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자연을 보시기 바랍니다. 반면 유리창에 비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대강절 기간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새로이 비쳐지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들 안에 촛불이 켜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종종 피조물을 보면서 자신 안에 켜져 있는 촛불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가꾸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처럼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세상일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될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다음의 고백을 통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누리를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 9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들의 삶 구석 구석을 놀라운 일로 장식해 주실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일안에서도 최고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 때 정말로 우리들의 촛불은 화려한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먼저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첫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알버트 슈바이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At times our own light goes out, and is rekindled by a spark from another person.”

“우리의 빛이 꺼져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빛으로 인해 다시 켜집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혼자 기다릴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서로를 도울 때 우리의 기다림은 고난 중에서도 계속 빛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혼자 지키는 절기가 아닙니다. 함께 지키는 절기입니다. 나무들이 혼자 기다리고 아파하지 않는 것처럼….

 

이번 대강절 기간 보이는 삶의 꿈과 목표를 가지고 나누던 대화를 잠시 중단하시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대화를 나눠 보십니다.

피조물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무엇 보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니 놀라셔서 더 빨리 오시지 않으실까요?

 

보이는 것으로 꽉 차인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우리들의 삶 구석 구석을 기가 막힌 축복으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축복으로 가득 메꾸실 주님을 기대하십시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밝고 화려한 촛불을 밝히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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