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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요한복음 3:22-30 (02/09/2020)

 

중국 당나라때 노생이라는 농촌 출신의 젊은이가 길을 가다가 주막에 머물러 쉬었습니다. 거기서 도를 터득한 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젊은이는 자신의 신세를 푸념을 하게 됩니다.

“입시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데 지금의 신세는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술에 취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하고 깜빡깜빡 졸음에 끄덕이자 노인은 자루 속에서 베개를 꺼내 노생에게 주며 ‘주모가 조밥을 짓고 있으니 다 익을 때까지 한 잠 자기’를 권합니다. 잠든 노생은 베개에 뚫린 구멍속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 주막을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던 중 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마을 최고 부자의 딸과 결혼하고 재산도 늘어나 집은 고래등만해지고 과거에도 급제하여 차차 지위가 상승하여 도성의 장관이 되고, 수년 후엔 오랑캐 침입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재상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 사이 자손도 번창하여 그들 또한 모두 풍족하게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 귀향을 가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병도 얻습니다.

“아아, 고향에서 농사나 지었다면 이런 억울한 탄식을 안 할텐데…. 내 어찌 부귀영화를 탐냈던가.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입고 먹을 때가…. 아아.”

칼을 꺼내어 자결하려 할 찰나 아내의 간곡한 만류로 자결은 미수로 끝나고, 젊은이는 이제 노인이 되어 쓸쓸히 팔십 평생을 마치려는데,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몸을 흔들어 깨웁니다.

아하, 그 주막, 그 노인. 그리고 조밥은 아직 익지 않고 여전히 끓고 있습니다. 조밥을 지을 만큼의 시간보다도 더 짧은 동안 팔십 년 인생을 꿈꾼 것이었습니다. 노생은 깜짝 놀라 “아니 이게 꿈이었던가” 소리쳤습니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걸세.”

 

중국의 어느 풍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많은 축복과 더불어 어려운 일들이 있어 보이지만 모든 인생은 실은 조밥이 끓기 전에 사라지는 것과 같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것이 조밥이 끓기 전에 사라질텐데….

오늘 2020년도 2월 두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벌써 한달 하고 두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10개월 반이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 한 해도 조밥을 지을 만큼의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지나가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 짧은 남은 한 해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는 주님 스스로 당신의 제자들과 세례를 베푸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침 요한도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마음이 불편해졌나 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한 마디로 시기심이 끓어 오른 것 같습니다. 이에 요한이 어떻게 반응하죠? 27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의 삶의 기준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에서 오고 하늘에서 오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수 없음을 믿고 있는 요한이었습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요한은 제자들에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주님께 세례를 주면서 주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몸소 체험했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 말씀을 보면,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내려 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주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믿고 있었고 주님 주변에 되어지는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역사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말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제자들에게 너희가 시기심에 가득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스승이 하늘에서 오신 이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신났을까요?

그렇지 않았을줄 압니다. 시쿤둥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자기의 스승이 수많은 사람들을 세례를 주는 분인데 자기 스승에게 세례 받은 자가 감히 자기 스승보다 귀하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화는 내지 못해도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잘 이해가 되도록 요한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결혼식에 가면 들러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례요한도 스스로 미국식으로 하면 groomsmen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주례를 했는데 대개 신랑 신부는 결혼식 날 많이 긴장합니다. 도리어 즐거운 마음으로 결혼식에 임하는 사람들은 들러리들입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며 아주 들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는 이처럼 들뜬 기쁨에 가득차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듣고 제자들 더욱 혼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례를 준 자기들의 스승이 도리어 자신을 들러리라고 말하고 세례받은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하니 혼동이 될수밖에….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례 요한은 모른척하고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어떤 제자들은 이제는 배신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스승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스승의 흥망성쇠가 자신들의 흥망성쇠인데 당신은 쇠하여야 한다니 그러면 자기들도 함께 쇠하여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동안 줄을 잘못 섰다고 후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어떤 제자들은 흥분하기 보다는 침착하게 모든 것을 생각해 봅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말을 들으며 과거 몇 년 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처음 세례 요한을 만났을 때의 기억부터 새롭게 눈 앞에 어린 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진 않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과 석청을 먹었다고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그 멋진 모습에 매료되어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뒤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스로 쇠해야 한다니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 스승의 말씀 안에 해답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인데 이제 그 분이 오셨으니 물러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쇠하여야 하리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쉽긴 하지만 다르게 보면 또다시 세례요한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었을줄 압니다. 이런 말 아무나 합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스승에 대한 불만은 잠시 후 이렇게 새로운 존경의 마음으로 대치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야 했었을까…?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왜 필요했을까요?

 

확실한 것은 세례 요한은 그야말로 주님을 위한 레드 카펫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 예의로 레드 카펫을 깔아주지 않습니까? 곧 요한의 금욕적 삶이 어떻게 보면 주님을 위한 레드 카펫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를 맞이하는데 메뚜기와 석청으로 엮어진 레드 카펫이 필요했을까요?

 

얼마전 좋은 책 하나를 접해 봤습니다. 일본 사람이 지은 책인데 제목은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중 제일 첫번째를 ‘욕망’으로 꼽고 있습니다. 세상 역사는 욕망으로 인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소재는 커피와 티였습니다. 저자는 미국 독립 운동의 기점이 되는 보스톤 티 파티를 소개합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어떻게 차(티) 때문에 미국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저자는 말하기를 이 당시 영국 식민지인 미국인들이 차를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커피를 더 좋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보스톤 티 파티 이후의 일입니다.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룬 후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는에 이에 영국이 미국에서의 홍차 판매 독점권을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주고 동시에 그 차에 높은 세금을 부과합니다. 여기에 반발해 보스톤에 정박해 있는 동인도 회사 배를 습격해 차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 바로 보스톤 티 파티 사건입니다. 이 후로 차 값이 비싸져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하찮은 티가 좌우하게 한 것입니다. 이 당시 티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배를 공략합니까? 곧 사람의 미각, 입맛으로 인해 이런 역사가 펼쳐 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국 독립 보다 오래전 15세기에 유롭인들은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아시아에 건너 가게 되는데 목적이 처음부터 아시아를 점령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나는 향료였습니다.

향료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런 저런 것들이 눈에 들어 오고 끝내 향료와 여러가지 농산물이 나는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게 된 것입니다. 곧 세계사는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로 인해서 움직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저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다가 왔습니다. 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금욕을 하면서 지냈을까? 왜 그 길만이 주님을 위한 레드 카펫을 까는 길이었을까요?

세계사는 욕망으로 인해 펼쳐지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더 이상 욕망의 힘으로 세계사를 펼쳐가시는 분이 아니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이미 자기가 깔았던 레드 카펫을 밟고 오셨기에 주님께서 세례를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례 요한은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스크린의 사진을 어디에서 보신 기억이 나시는 분 계신지요? 거꾸로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니 뿌리를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 11월에 San Francisco 출장을 다녀 왔는데, 공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검색대로 들어 가면서 천정을 우연히 보았는데 거꾸로 심겨진 나무를 보았습니다. 제가 자주 거꾸로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눈에 확 띄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시면 아무도 천정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천정을 보며 사진을 찍으니 그 후 몇 분이 천정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는 자기들의 뿌리가 땅을 향했고 늘 욕망을 챙기기 위해서 땅에서부터 무엇을 뽑아내야 하니 땅만 바라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롭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땅을 식민지로 삼은 이유도 매한 가지입니다. 땅을 차지해서 커피 나무를 심어 열매를 맺기 위해 땅을 차지하길 좋아했습니다. 그들도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향료 나무들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땅을 보지 않고 거꾸로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내려 오시는 이를 기다렸습니다. 세례를 주고 있는데 하늘에서 부터 성령께서 내려 오셔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분이 하늘에서 내려 오신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외친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더 이상 세례 요한의 레드 카펫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늘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를 통해 끊임 없이 생명의 떡이 세상에 공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요한복음 6:51절 말씀에 하늘에서 오신 이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첫번째로는 주님을 위해서…, 곧 하늘에서 오신 이는 더 이상 욕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두번째로는 사람들을 위해서…, 땅만을 내려다 바라보며 땅에서 자라는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도리어 하늘을 바라 보며 하늘에서 부터 오시는 이를 사모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부터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사모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 거꾸로 자라는 나무의 모습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피에르 세락 신부라고 평생을 인도의 카스트 제도 중 가장 낮은 신분인 달리트 계층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프랑스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섬겼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작은 책을 펴냈습니다.

책 제목은 ‘거꾸로 자라는 나무.’ 주님께서 거꾸로 자란 나무였고 자신이 그랬고 아울러 그곳 가난한 주민들이 바로 거꾸로 자라는 나무였음을 노래하는 글로 가득찬 책입니다. 책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글로 마칩니다.

 

“끝으로 나의 마지막 말은 역시나 ‘내 마음이 사랑하는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항상 그분만을 찾았고 아직도 그분만을 찾고 있다.

 

“제 영혼은 살아 계신 주님을 목말라합니다.

제가 언제 그분을 대면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이러한 고백과 함께 하늘의 열매로 쓰여지는 영원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평생 이러한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남은 한 해 같은 고백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제 영혼은 살아 계신 주님을 목말라합니다.

제가 언제 그분을 대면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영어로 된 책으로 읽어서 그대로 먼저 읽어 드립니다.

“I love two J’s and no third; one is Jesus and the other is Japan.”

독실한 크리스챤이자 독실한 애국자입니다. 먼저가 Jesus입니다. 그리고 Japan. 이것이 거꾸로 사는 삶이 아닐까요?

거꾸로 사는 삶은 땅의 일을 전혀 무시하며 사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 오신 분을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으로는 땅의 것을 사랑한다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Japan의 자리에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 아무거나 넣어도 좋다고 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 오신 주님을 자랑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올해 우리가 사는 보스톤의 삶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 오신 주님을 자랑하는 삶을 사십시다. 사회생활을 하던 가정 생활을 하던 교회 생활을 하던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 오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거꾸로 자라는 나무가 되어 가십시다. 그 때 우리가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맺는 열매들도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 오는 열매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으로 쓰여지는 세계사가 아니라 하늘의 열매로 쓰여지는 영원한 세계사의 주인공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짧은 인생 안에서….

 

이를 위해 우리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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