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제직 교육을 받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6개월간 12번 교육을 받는데 매번 시작할 때마다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를 하고 기도 후에는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조크 타임을 갖습니다. 올해도 벌써 3 회의 교육을 마쳤습니다.
첫번째 모임에서 조크를 맡으신 집사님은 아재개그라고 하면서 세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기름 수입할 때 며칠 걸리나?’
기름 수입할 때 며칠 걸릴 것 같습니까? 정답은 ‘오일’.
그 다음 번 교육시에는 다른 집사님 차례가 되었는데 좀 한 차원 높은 시험문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한 마디로 ‘줄긋기’ 문제였습니다. 좌 우 두 항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맞는 것 끼리 줄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따라 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의 교육을 마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이 했던 한 바탕 웃어 재끼는 유치한 조크 보다는 머리를 쓰는 시험 문제와 같은 차원 높은 조크를 좋아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세번째 조크 타임을 맡으신 분은 어느 시인의 재미있는 시로 저희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역시 차원이 높은, 머리를 좀 써야하는, 문제를 머리 속으로 풀어가야 하는 시였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얼마전 읽은 다음과 같은 글이 떠 올랐습니다. 불란서 철학자 Gabriel Marcel의 말입니다.
“Life is not a problem to be solved, but a mystery to be lived.”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말을 하신 분도 있죠. 한 동안 장애인을 도우며 살았던 헨리 나우엔 신부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Life is not problem solving but a gift.”
(삶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장애인들과 생활하다가 놀라운 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두 분의 말을 하나로 묶으면 ‘삶은 신비스러운 선물이지 결코 문제 풀이가 아니다’라고 정리해 볼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요즘 아재개그가 유행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문제 풀이에 익숙해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에 익숙하다 보니 모든 것을 문제 해결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신비스러운 선물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삶을 문제 해결로 보지 않고 신비한 선물로 보며 참 삶을 누릴수 있을까요? 삶을 신비한 선물로 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12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는 삶을 신비한 선물로 본 사람이나 할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는 말을 두번씩이나 하는데 이런 말을 할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육신의 정욕으로 늘 괴로워 하고 있었습니다. 정욕대로 살자니 율법이 늘 외칩니다.
“Don’t do it” “don’t, don’t, don’t, don’t….”
그런데 사도바울 이하 사도들이 가르칩니다.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노라고…. 주님의 보혈이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그러니 복음은 그들의 문제 해결의 열쇠였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입어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니….”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말고 몸이 요구하는대로 따라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복음을 통해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바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다시 율법 조항을 들먹이면서 “모든 것이 가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나요? 사실 복음으로 인해서 율법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지혜롭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몸이 원하는대로 따라 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놓치고 있음을 은연중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여 지난 두 주간 시간과 장소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오심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은 위대해진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 몸이 원하는대로 따라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겠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익한 삶을 살게 하심이었습니다. 유익한 삶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그러면 유익한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우리 자신이 우리 몸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몸을 주장합니다. 이것을 소위 습관의 힘이라고 표현할수도 있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유익하지 않은 일을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게 됩니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은 몸이 자기를 주관하지 못 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고 생각하고 몸을 함부러 움직이면 그 움직임이 자기를 얽매이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신비입니다. 이 몸의 신비를 고린도 교인들은 잘 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몸이 정욕의 도구가 되면 거기에 빠져 나올수 없습니다. 반면 몸을 주님을 위하는 도구가 되면 최고의 신비스러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몸을 위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몸을 위해 계시니 이처럼 신비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몸이 얼마나 신비한 선물인지를 14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우리들의 몸은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신비한 선물입니다. 얼마나 신비하냐 하면 언젠가 우리의 몸도 주님을 닮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우리의 몸을 정욕에 따라 움직이면 문제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절제의 삶을 살 때 신비한 선물이 됩니다. 주님의 보혈로 인해서 놀라운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택할수도 있고 저것을 택할수도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절제를 권장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비한 선물임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몸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정욕 때문에 신비한 선물을 잘 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보혈로 얻은 자유를 방종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15, 16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사도바울은 지금 결혼의 신비를 육신의 신비와 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된 것처럼 창녀와 합하는 자들도 바로 창녀와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신비로 인한 어쩔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수소폭탄 보다더 훨씬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더 이상 우리 몸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파괴될 때 우리가 거하는 위대한 시간과 공간도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몸이 파괴된다는 것은 우리 몸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그 분도 크게 손상을 입으신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좋거나 싫거나 주님을 믿는 자들은 성령의 전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늘 죄를 반복해 짓는 우리들의 하찮은 몸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이처럼 신비한 존재가 세상에 어디있겠습니까? 죄성이 있는 인간의 몸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셨을까요? 오고가는 세대를 위함이 아닐까요?
곧 오고 가는 세대에 육신의 정욕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또 생길줄 아셨습니다. 이런 죄의 문제 앞에 고민하는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사도바울을 통하여 큰 교훈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의 문제를 율법과 도덕으로 해결할수 없음을 일깨워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도리어 삶은 신비한 선물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위대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선물이 널려져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완성시키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제는 주님의 보혈로 팔렸으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익한 삶입니다.
어느 유명한 랍비 가정이 있었습니다. 랍비의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 오면 가방을 방에 놓고 곧바로 뒷 마당 문으로 나가 숲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며칠 아니 몇 주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30분 후에 집으로 돌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랍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쩔수 없이 아들에게 묻습니다. 숲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냐고…. 아들은 대답합니다.
“아빠 염려하지 마세요. 기도하기 위하여 숲으로 가요. 숲에서 나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수 있어요.”
“오, 근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것을 모르니…?”
“물론 알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것을…. 그런데 저는 어디에나 있지 않아요.”
자기는 숲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가 된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아들은 시간과 공간의 신비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나 몸을 갖고 사는 우리 인간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의 신비스러운 몸을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서 우리는 신비스러운 축복의 세계의 신비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도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오래 전 교회 표어를 ‘감사하는 회중’으로 정하고 일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느 분의 책에서 보았는데 당신은 의자 하나를 선정해서 ‘감사의 의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 의자에 앉으면 감사의 기도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합니다.
저도 그것을 흉내내어서 저희 집 어느 의자를 ‘감사의 의자’로 삼은적이 있습니다. 몇 달 그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했는데 감사가 늘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의자를 치울수 밖에 없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스스로 ‘이 의자가 감사의 의자야’ 생각하면서 앉지만 웬지 전처럼 자연스럽게 감사의 기도가 나오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시간과 공간안에 사는 우리 몸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으로 우리의 몸을 조정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생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시간과 공간과 몸 곧 또다른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닐까요? 우리의 몸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는 우리 머리는 기억을 못해도 몸과 시간과 공간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 신비스러운 일은 우리가 지울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생각을 넘어 신비하게 우리를 찾아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아이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방과 후 집 뒤 숲에 자기의 몸이 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곤 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맥락에서 남은 사순절 우리가 우리들의 몸을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 아니 그 때 우리라는 신비한 몸 안에 계신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사순절 기간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즐거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비스러운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은혜로운 묵상집이 편찬되어서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계실줄 압니다. 특히 올해는 Sunflower자녀들의 글을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 어린이가 썼는데 한 어린이는 사순절 기간 스타벅스나 던킨 같은 곳을 삼가하겠다고 했고 또 한 어린이는 유튜브를 삼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두 어린이들 땜에 그들의 비지니스가 타격을 입을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그러나 40일 간이라는 위대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진 이들의 움직임은 영원한 축복이 되어 이들을 늘 감싸고 다닐 것입니다.
이들은 삶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신비한 선물임을 삶 속에서 펼쳐 갈 것입니다.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된 삶을 40일간 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두번 소개한 하형록 회장님이 계십니다.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한센병 환자촌에서 어릴 때를 보내고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자수 성가한 분입니다. 물론 한 때는 심장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기적적으로 살고 이제는 큰 회사의 회장이 되셨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많은 문제 앞에서 도리어 신비한 축복의 세계를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저기 다니시면서 많은 강의를 하시고 계십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성공의 비결을 묻곤 한다고 합니다. 그 때 이렇게 대답하신다고 합니다.
“등에 천 근의 무거운 철근을 지고 가다 보면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등에 진 천 근의 철근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문제로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하 회장님에게는 문제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비한 세계로 가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나 도구로 생각하게 될까요? 시간과 공간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사람들만이 그러지 않을까요? 이들은 바로 사순절이라는 위대한 시간 속에 위대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자들일줄 압니다. 스스로 성령의 전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위대한 시간 속에서 위대한 공간을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신비한 세계는 선물로 매일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절제함으로 우리들의 몸을 위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 맡기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