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제로 알려진 차동엽 신부님께서 고해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어느 신도가 고해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몇 년 하셨죠?”
“한 30년 됩니다.”
“그러면 30년 동안 꼬박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지냈단 말입니까?”
“네, 잘 믿어지지 않아서요.”
“그건 죄가 아닙니다.”
“네? 죄가 아니라구요?”
“그럼요. 죄가 아니라 손해입니다.”
“손해요?”
“아무렴요. 30년이란 귀한 세월을 손해 본 셈이죠. 30년 동안 의심만 하느라 허송하여…,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 시작되는 기도의 도움, 평화와 행복 그리고 은총, 이렇게 좋은 것들을 못 누리셨잖아요. 그러니까 손해를 보신 거죠.”
한 마디로 의심의 삶을 30년간 사시는 바람에 30년간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신부님은 신도에게 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의심으로 인해서 온전한 축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오늘 본문 말씀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의심 가운데 손해를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수 있느냐?’라는 의심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갈라디아서를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3:6-9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곧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 신부님을 찾아 오신 신도는 30년간 믿지 않고 의심만을 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이런 좋은 축복을 다 놓쳤다는 뜻일줄 압니다.
곧 차 신부님은 신도에게 의심치 말고 믿어서 이런 좋은 축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또 어떤 말씀을 계속하셨는지 제가 읽은 책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복을 받으라’라는 말로 마쳤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들어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믿음을 강조하더니 마지막에는 서로 서로 죄를 안 짓도록 돌보자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씀으로 서신 마지막을 시작하고 있을까요?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축복은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 남은 축복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축복입니다. 서로 서로 아름답게 되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원하는 믿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줄 압니다. 박완서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한번 똑똑히 분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봉오리가 활짝 벌어질 줄 알았는데 지키고 앉았으니까 왜 그렇게 안 벌어지는지요. 나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약간 느슨해진 꽃봉오리를 손으로 펴려고 했습니다. 잘 안 되더군요.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깐 자리를 떳다 와보니 분꽃은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내가 억지로 펴려 했던 꽃봉오리만 피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지 뭡니까. 어른들한테 말씀드렸더니 손독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내 어린 손도 독이 되는데 어떤 인자한 힘이 꽃을 피웠을까? 그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내 최초의 경이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모습을 고쳐 준다고 손을 보면 도리어 손독이 오를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글입니다. 도리어 손독이 묻지 않는 꽃은 하나님의 시간에 피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은 주위를 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칫 하면 손독이 오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한다는게 도리어 망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마음이 없이 한 것은 100이면 100 손독이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손독이 오르지 않고 서로를 세워가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서로 질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들입니다.
이웃이 아름답게 꽃 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꽃잎을 안 만져줘서가 아니고 이웃에게 우리가 위해서 져야할 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짐을 서로 져 줄때 꽃은 피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두번쯤 들으셨을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갔더니 모든 사람들이 삐쩍 말라 있더라는 것입니다. 가만 보니 모든 사람들의 손이 곧 팔목이 굽혀지지 않아서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다 줄수가 없어서 모두 굶어 삐쩍 말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 천국에 갔더니 그곳에는 모든 사람들이 살이 통통 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도 팔목이 굳어져 있어서 스스로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다 줄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후에 보니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서로 서로 남을 먹여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짐을 져 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모두 죄를 지은 장애인들입니다. 혼자서는 살수 없습니다. 서로 돌보아야만 천국의 삶을 누릴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짐을 져 주는 사람들이 또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늘 남의 것만 보살펴도 안 될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사실 한국 교회가 초기에 급성장을 한 큰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Nevius Plan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선교를 실패한 Nevius선교사가 그 이유를 살피고 개선한 선교 원칙이 있습니다.
자전(Self-propagation) : 배운 것을 가르칠줄 알아야 한다.
자치(Self-government): 스스로 교회 제도를 세우고 이끌어 갈줄 알아야 한다.
자급(Self-support) :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에서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곧 한국교회에게 초창기부터 스스로 짐을 지게 하는 선교 원칙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한국 교회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선교원칙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이 선교한 곳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한편 갈라디아 교회는 이 세 가지 중 세번째 것이 제일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사실 가르치는 자들은 말씀을 받을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정성껏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져야 할 짐입니다. 반면 말씀을 받는 자는 좋은 말씀을 받을뿐 아니라 좋은 것 곧 여기서는 물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을 받고 또 좋은 물질로 섬길 때 서로 각자의 짐을 지는 것이고 아울러 서로를 위해 짐을 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곧 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받는 자나 한 팀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좋은 것을 나누는….
그런데 사도바울은 좋은 물질을 나누는 것을 한 단계 더 넓히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좋은 물질이 가르치는 자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것처럼 서로 믿음의 가정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때 서로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일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의 나눔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교회 밖에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데요?”
맞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장애인들입니다. 먼저 믿는 장애인들이 서로를 도울 때 우리는 이웃을 도울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 이웃을 섬길수가 없는 장애인인 것입니다.
반면 우리 장애인들끼리 먼저 섬기면 우리는 저절로 안 믿는 자들을 향하여 힘차게 섬김의 사역을 시작할수 있는 것입니다.
곧 믿음의 가정들에게 좋은 것을 나눌 때 공동체가 든든해집니다. 이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들이 이루어집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는 공동체가 됩니다. 이럴 때 진정 손해보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옛날 사도바울 시대와 오늘과는 큰 차잇점이 하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당시는 각 지역에는 교회가 하나만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가 있다고 해도 한 교회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면 하나 였는지 몇개가 있었는지 확인할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 지역에 있는 교회는 하나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천주교와 더 가깝다고 볼수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즘 너무 개신교는 개교회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장로교인데 장로교의 원칙은 첫번째 교회 단위가 노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현재 23개 교회가 속해 있는데 바로 23개 교회가 한 교회라고 생각하면 좋을줄 압니다.
저희 교회가 저희 노회에서는 제일 큰 교회이지만 그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교회가 아파하면 우리도 같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들에게’라는 의미는 첫번째로는 믿는 한 가정 한 가정을 말합니다. 두번째로는 믿는 가정들이 모여 있는 교회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교회의 모습은 교회 안에 있는 가정들과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고 아울러 교회 밖에 믿음의 식구들과 좋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로를 위해 사랑의 짐을 질 때 우리는 놀라운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의 세계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을 통하여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저도 미국에 와서 생활한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40년 중에 요즘이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종화합이 되지 못해서 생기는 안타까운 사태가 전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전에 하나의 미국 시민으로서 어떻게 이 일을 대처해야 하나 고민해 보았습니다. 먼저 든 생각은 ‘근본적으로 법을 바꾸어야 하나?’ 그런데 이미 흑인 대통령도 나올수 있도록 법이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타인종이 대통령이 될수 있는 길이 언제 열릴지 너무도 까마득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법과 제도는 바꿀수 있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봅니다. 결국 사람이 바뀌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바꿀수 있는 곳은 종교밖에 또 있을까요?
얼마전에도 TV를 보니 어느 목사님이 까운을 입고 시위를 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 지금 시위대는 종교단체들을 향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우리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지 못했기에 이런 일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종화합의 시작은 믿음의 식구들과 좋은 것을 나누는데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때 온 세상에 평화를 심겨주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요?
이 일을 위해서 당회원들께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다음주에 알려드릴텐데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