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찜질방에 간 것 같습니다. 욕탕에 물바가지가 그 날 따라 동이난 것 같습니다. 둘러 보니 한 아줌마가 두 개의 바가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였습니다. 조심스럽게 가서 하나를 써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야단을 치면서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게 눈에 안 보이냐고 역정을 내었다고 합니다. 어쩔수 없이 물바가지 없이 목욕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잠시 후 그 아줌마도 나와서 갈 준비를 하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무서운 아줌마의 눈에 안 띄일려고 구석에서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순간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아줌마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권사님, 산기도 갔었다고 들었어요. 어땠어요.”
“말도 마세요. 하늘에서 은혜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 권사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분노를 참지 못하시고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치시며 저주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며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3절은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을 말하고 있는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여기에서는 여고니야 왕으로 표기되었습니다만 이는 유대왕 여호야긴 왕과 동일인물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 갔고 예루살렘에는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가 꼭두각시 왕이 되었을 때입니다.
한편 얼마전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심기를 건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에서 느브갓네살 왕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전에 잘 못 한 것에 대한 사과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곧 그 편에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마 바벨론 포로들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풍문에 곧 해방될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부푼 마음으로 바벨론 포로들은 스크롤을 엽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이스라엘인들은 전혀 기대 밖에 글을 접합니다. 그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 잘 참고 견디면 해방의 기쁨이 올 것을 기대했었는데….
2, 3년 대충 잘 견디다가 해방이 되면 전에 빼앗긴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가지고 돌아 오라는 멧시지를 기대했는데 웬 걸 장기전을 펼치라는 것입니다. 안 읽음만 못합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습니다.
제가 2, 3년이라고 했는데 전혀 근거 없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인들의 귀에 그럴싸한 예언을 자꾸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예언을 했었습니다. 28:3절 말씀입니다.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몇 년? 2년.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굳게 먹고 희망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향에 좋은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2년만 지나면 다시 얼마 전 지은 집에서 편안히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하면서 손꼽아 2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갈 생각을 말고 여기서 집을 다시 지으라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많은 것을 고향에 남겨 놓고 온 사람들은 어름장처럼 되었을줄 압니다.
그들은 황당해 하면서 생각합니다. 그러면 집을 짓고 무슨 의미로 살라는 말인가? 아무런 목적 없이 막연히 기다리며 산다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고향집을 더 이상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고향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고향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불러온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포로들은 혼동이 됩니다. 소문을 타고 달려온 하나냐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시드기야의 사신이 들고 온 예레미야의 말을 믿어야 하나…? 특히 고향에 집을 두고 온 자들은 마음으로는 자꾸 하나냐 선지자 말을 믿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8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쪽집게입니다. 자기에게 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어쩔수 없이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일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계속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70년….
포로들은 아연실색합니다. 선지자 하냐나는 2년이라고 그랬는데…. 10년도 긴데 20년도 아니고 70년. 누구의 말을 믿고 싶을까요?
거짓 선지자에 미혹되지 말라고 하셔서 잠시 예레미야의 말씀을 믿으려고 했는데 70년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닫힙니다.
이에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줄 압니다. 전에는 처음에 말씀드린 그 권사님과 같이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사람들과 잘 챙기지 못한 두 그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70년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새로운 두 그룹이 생기는데 한 그룹은 70년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누구를 믿습니까? 거짓 선지자 하냐나를 믿습니다. 2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수 있냐구요?
한국 역사가 증명합니다. 선조 왕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선조는 두 사람을 일본에 보내서 정탐케 합니다. 과연 일본이 쳐 들어 올지 두 사람이 다른 보고를 합니다. “쳐 들어 온다.” 다른 사람은 “안 쳐들어 온다.”
선조는 누구의 말을 선택했겠습니까? “안 쳐들어 온다.” 그게 편하니깐….
이들도 당연히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70년을 믿는 사람들과 하나냐의 2년을 믿는 사람들로….
당연히 하나냐를 믿는 사람들은 자리를 떠납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믿는 사람들은 곰곰히 생각합니다.
앞으로 70년이 지나면 자기의 자녀들 나이가 100 세가 됩니다. 자기들의 나이는 100세를 훨씬 뛰어 넘고요. 곧 자녀의 자녀의 자녀들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얌체 권사님처럼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70년이 지나기 전에 귀향할수도 없습니다. 아니 자녀들조차도 귀향할수 없습니다. 3세대 4세대에 가서야….
결국 그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똑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동안 의롭게 산 사람들은 그 권사님과 같은 사람들을 멸시했는데 죄송한 마음도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애 처음 이상한 느낌을 갖습니다. 평생에 한번도 70년 후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생애 처음 70년 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늘 뭔가 쫓겨서 짧은 미래만 생각하고 살아 왔던 것을 느낍니다.
70년을 생각했더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삶에 대해서 새로운 그 무엇을 느끼게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레미야는 계속 말씀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70년이라는 미래를 생각하면 아무리 포로생활일지라도 신비스럽게도 세상사가 달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녀들의 자녀들의 자녀들로 인해 펼쳐질 놀라운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인이시니 말입니다.
그리고는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동안은 눈 앞에 닥친 미래만을 생각하면서 지내왔던 것을…. 평생 70년을 내다 보고 지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사탄은 거짓 선지자 하나냐를 통해서 2년만 참으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늘 2년 앞만 내다보며 살고 있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2년을 내다 보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며 사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지난주 NCKPC희년 준비 위원들이 줌으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발제자는 미국에 온지 오래 되신 분인데 처음에 학교에 가니 교수님들이 소개를 하는데, 이분은 어느 교회 장로, 저분은 어느 교회 집사, 또 다음 분도… 거의 모든 분들이 교회 직분자이고 학교에서 교회직분을 자기 소개에 넣는 것을 보고 미국에 잘 정착하려면 교회를 다녀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기를 오래 전에는 미국 시민들이 정치 이야기는 거의 안 했다고 합니다. 가정 이야기 아니면 스포츠 등…. 그런데 요즘은 정치 이야기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한탄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국 선거는 2년에 한번 열립니다. 물론 대통령선거는 4년만에 열리지만, 선거가 끝나면 2년후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전 시민이 어떤 사람은 빨간 공화당, 어떤 사람은 파란 민주당 깃발을 들고…. 하냐나 선지자가 좋아하지 않을까요? 하나냐가 만든 제도는 아닐지…?
이런 와중에 코로나가 창궐했는데, 우리도 계속 2년을 내다봐야 할까요? 우리들에게 70년을 내다보는 안목을 주시기 위하여 코로나를 보내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므로 70년은 재앙이 아니라 미래요 희망인 것입니다. 70년을 내다 보며 사는 사람들은 신비스러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도 70년을 내다 보셨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2년후만 생각하며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뉴욕 퀸즈 장로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성국 목사님이 계십니다. 김 목사님의 아버님은 장로님이셨는데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유형의 유산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님의 노트였다고 합니다. 그 노트는 아버님이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를 받아 적어 놓으신 노트였다고 합니다. 그 것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부요해 짐을 고백하면서 한 가지 노트를 그대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72. 3/3 이성헌 목사 신앙의 바른 자세 본문, 눅 18:6-8, 1. 신앙은 열심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진실하냐이다. 2 내가 선하냐 악하냐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가 문제이다. 3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느냐가 문제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느냐가 문제이다. 주님만 바로보고 사는 생활. 4. 환경이 얼마나 이로우냐 해로우냐 문제가 이니라 이해를 타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인자가 올 때 신앙을 보겠느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나도 아버님의 낡은 노트가 나의 오늘을 살피고 나의 미래를 밝힐 빛도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마 장로님이신 아버님은 70년을 내다 보시며 사신 분이 아닐까요? 아버님 장로님도 어떻게 보면 역사적으로 소용돌이 가운데 사신 분일줄 압니다. 일제시대와 6/25, 그리고 군사독재등…. 그 모든 시간들이 아버님에게는 미래와 희망의 시간들이었을줄 압니다. 70년을 내다 보셨기에…. 그 결과 아드님이 그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처음에 말씀드린 그 권사님처럼 살았어도 상관없습니다. 코로나 폭풍 가운데 70년을 내다 보며 역사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교회에서 사랑의 겨자씨 헌금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성껏 헌금하여 주셔서 저희가 예상한 것 보다 많이 모아졌습니다. 정확히 11,000불의 헌금이 모아졌습니다. 저희 교우님 가정을 위해서도 사용되었고 얼마전 집사회와 청년회가 자선음악회를 하여 도왔던 케냐 이민 교회인 Gateway교회와 저희가 최근 단기 선교를 다녔던 N.M.원주민 선교 쎈타를 위해서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헌금은 보스톤 노회와 매사추세츠 교회 협의회(MCC)에 보냈습니다. 특히 이 두 곳에 많이 보낸 이유는, 물론 저희 교회 이름으로 다른 곳에 보낼수도 있지만, 앞으로 저희 자녀들이 이곳에서 이 곳 주민들과 함께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한인 교회가 이 지역 사회와 가까이 지낼 때 저희 자녀들도 앞으로 이곳에서 더욱 복의 근원이 되어 살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이러한 섬김이 자녀들을 위한 희망과 사랑의 씨앗이 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희망과 사랑의 집을 자녀들을 위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저희 자녀들도 이와 비슷한 글을 적게 되길 바랍니다.
“나도 아버님의 낡은 노트가 나의 오늘을 살피고 나의 미래를 밝힐 빛도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코로나의 폭풍 가운데서 70년을 내다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