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샤를 페팽은 자신의 저서 ‘자신감’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군 기지에 가서 ‘자기신뢰’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에게는 이 주제가 철학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특히 어느 두 장교들의 이야기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슬람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군인들인데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항공모함의 짧은 활주로 위로 전투기를 착륙시키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착륙신호장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야간 착륙을 할 때는 착륙 도구의 힘도 믿을 수 없을뿐더러 운 좋게 항공모함의 형태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갑판 위에 서 있는 착륙신호장교의 무전 내용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합니다.
착륙신호장교들은 조종사가 하강 속도에 맞춰 전투기를 활주로에 착륙시킬 수 있도록 구두로 지시를 내린다고 합니다. 결국 조종사들은 오로지 착륙신호장교의 지시만을 믿고 스스로는 ‘내려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뭐가 보인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감각을 믿기보다는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동료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합니다.
곧 깜깜한 밤중에 항공모함에 착륙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착륙하는 실력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함은 당연할줄 압니다. 또 하나는 관계입니다. 착륙신호장교에 대한 믿음의 관계를 뜻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에 한 장교에게 착륙할 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 믿음이 있어야 해요!”
다른 장교에게 착륙할 때 어떤 생각을 하냐고 묻자, “인샬라 (신의 뜻대로).”
제 친구 아들이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제일 원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top gun 전투기 조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top gun은 최고 성적순으로 뽑힌다고 합니다. 제 친구 아들은 top gun은 되지 못했고 다른 큰 비행기 조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top gun이 되는 군인은 학교 성적만 좋으면 되는줄 알았는데 이 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착륙신호장교의 말을 100% 믿는 믿음.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희에게 축복된 2021년도를 주셨는데 벌써 한달이 훌쩍 흘렀습니다. 1월 한 달 어떤 모습으로 지내셨습니까? Top gun처럼 지내셨습니까? 그러면 남은 한해 어떻게 신앙의 top gun처럼 지낼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을 마치고 대망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좀 야속하지 않습니까? 좀 부담이 안 가는 말씀을 해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들어가 차지 하거라.” 뭐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출애굽하자마자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1:8절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그런데 원어로 보면 이 말씀과 본문 15절 말씀이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두 귀절이 모든 “보라”로 시작합니다. 영어번역에는 모두 “See”로 시작함을 알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판에는 웬지 빠져 있습니다.
하여튼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라. 너희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조금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차이점은 처음에는 ‘사망과 화’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는 언급하십니다. 왜 광야 40년 후에는 이것을 언급하시나요?
그런데 사실 40년후에 처음 언급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을 때 모세가 보낸 12 명의 정탐꾼 중 부정적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하나님은 이들을 광야로 내쫓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선물을 허락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에 있는 29: 1절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한 번도 아닌 두 번, 언약의 말씀을 세우셨는데 한번은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포기한 직후에 곧바로 호렙산에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광야 40년을 마치면서 모압산에서…. 그리고 호렙산에서부터 이미 ‘사망과 화’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스스로 들어가길 푸기하는 이스라엘을 보며 결단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그냥 두어서는 안 들어 가겠구나.’ 결국 약속을 맺으신 것입니다.
‘언약’ 영어로는 covenant, ‘계약’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계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쌍방간의 계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으신 것은 쌍방간의 계약을 맺으신 것이고 잘 했을 때는 복을 잘 못했을 때는 ‘사망과 화’가 임하는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새끼 손가락으로 서로서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동맹국은 서로 같이 살고 죽는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약관계를 맺음으로 위험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동맹의 약속의 관계로 하나가 된채 이스라엘민족을 광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광야는 정말로 생명과 사망이 늘 교차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매일 내리는 맛나와 메추라기로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물론 잘 못했을 때는 함께 고통을 나눠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으로 인해 모세가 고통을 받았고 후에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40년이 지나 다시 가나안 땅 앞에 서 있습니다. 모압산에서 두 번째 언약을 맺습니다. 첫번째 언약과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한편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으로 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위험한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위험한 가나안 땅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결단의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곧 광야가 생명과 사망이 늘 교차하는 곳인 것처럼 가나안 땅도 매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10명의 정탐꾼의 생각이 맞습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이런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맛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하나님께서는 재차 약속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어쩌면 가나안 땅은 광야 보다 더 위험한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죽음으로 덮힌 광야에 매일 아침 생명의 양식 만나가 하얗게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는 저절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반면 한 가지 좋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때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명은 유지했지만 삶의 번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번성을 원하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번성을 위해서 세상에서는 애굽으로 향하던가 메소포타미아로 향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번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임을…,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성의 길만 놓여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이번 말씀 준비를 하면서 concordance라고 한 단어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는 사전이 있는데 한번 찾아 봤습니다. 신명기에는 과연 복과 저주가 몇 번씩 나오나…. 복이라는 단어는 8번 나옵니다. 저주는 그의 배인 16번 나옵니다.
물론 저주 베푸시기를 좋아하셔서 저주가 배나 나온다고는 생각지 않으실줄 압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곧 하나님께서는 저주 보다는 생명과 복을 주시길 원하심을 솔직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복’ 보다 ‘저주’를 배나 더 언급하시고 계신가요? 마지막 절에서 실마리를 찾을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하나님께서 ‘저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언급하시는 이유는 세상에는 위험이 가득차 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반면 그 위험도 실은 번성을 위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장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팬데믹 기간 도리어 장수의 비결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사실 ‘청종하라’ 곧 ‘들으라’라는 단어가 30장에만 4번 나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모압산에서 베푸시는 두 번째 언약의 말씀을 하시면서 네번씩이나 ‘청종하라’ 곧 ‘들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삼세대가 하나 되는 행사로 ‘쉐마의 밤’행사가 있는데 작년도 11월달에 아주 훌륭하게 치뤘습니다. ‘쉐마’의 뜻이 바로 ‘들으라’입니다.
왜 이렇게 쉐마를 강조해야 할까요? 세상은 광야입니다. 그 어디나 광야입니다. 2021도 광야입니다. 위험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순종할 때 위험은 번성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Top gun들은 착륙신호 장교들의 지시를 따라 항공모함에 착륙합니다. 한편 우리가 도착해야 하는 곳도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따라 착륙할 때 활주로가 넓어집니다. 길어집니다. 우리가 어디를 착륙하던 멋진 활주로가 생깁니다.
우리의 활주로는 그 때 그 때마다 환경에 따라 잘 변화하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 어거스틴은 멋진 말을 했습니다.
“And from that City from which we have come on pilgrimage, letters have arrived for us: these are the Scriptures.”
(우리가 순례의 길을 떠나 온 그 도시에서 우리를 위한 편지가 도착했는데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험한 순례길을 가고 있는데 이를 너무도 잘 아시고 고향에서 사랑의 편지가 매일 새롭게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맛나가 내리듯이…. 우리가 있는 곳의 특징을 잘 알고 계신 분이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위험한 장애물들을 축복의 도구로 바꾸는 지혜로운 길잡이를 매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까요?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 있을까요? 감동어린 마음으로 정성껏 읽지 않을까요?
저희 교회 오랫동안 지휘를 하셨던 NEC교수님이신 변화경 장로님께서 종종 하신 말씀이 기억에 늘 납니다.
‘Listen을 다르게 풀면 Silent이다.’ 늘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곤 하신 것 같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고요한 마음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신줄 압니다. 고요히 들을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앞에 2021이라는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손에는 고향에서 온 따뜻한 편지가 들려져 있습니다. 편지 안에는 온갖 위험한 장애물들을 번성의 도구로 바꾸는 비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청종하십시다. 말씀에 의지해서 2021이라는 항공모함을 이착륙하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다. 이착륙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이 모든 것을 즐기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40년전에 미국에 첫발을 디뎠었습니다. 뉴욕 공항으로 도착했는데 그 때 집사람 친척이 뉴욕에 살고 계셔서 저희를 픽업하러 공항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첫날을 그 댁에서 지냈습니다.
그 때는 평신도였는데 항상 손에 성경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물론 목사가 될 생각은 전혀 안 했지만….
제가 성경책을 들고 온 것을 보더니 그 친척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책 꼭 붙드세요. 그래야 미국에서 살수 있습니다.”
사실 꽤 인상 깊게 들렸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왜 목사도 아닌 사람이 성경책을 끼고 다니느냐는듯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이 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미국이 천국이 아닙니다. 말씀을 청종하는 삶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2021을 함께 천국으로 만들어 가십시다. 번성하십시다. 장수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