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 저에게는 새로운 즐거운 시간이 있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기도와 말씀을 읽는 시간이 지나면 사순절 묵상집을 하루 한 장씩 읽는 즐거움이 저를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글을 쓰신 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올해도 수고하신 분들과 특별히 자신의 이야기를 기쁘게 나누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지난주 월요일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분의 이야기를 다시금 나누겠습니다. 권사님의 글인데 늘 장로님과 집 앞 길을 산책하시다가 깨달은 것을 나누셨습니다. 대폭설로 인해서 저녁 식사후 매일 걷는 일상이 변화되었다고 하시면서 ‘겨울의 우리의 전신갑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셨습니다.
내외분은 겨울철 등산할때 쓰던 Microspikes를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처럼 신고, 또 해가 짧아져 오후 5시가 되면 어둑어둑해져 머리에 광부들 마냥 Headlamp Flash light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마냥 붙이고, 또 몸에는 오가는 차 Headlight에 반사되는 Reflective Vest Running Gear 를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인것”같이 입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이웃들 한집 한집을 위해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와 간구를 하며” 멋지게 걷고 계시다는 글이었습니다.
전신갑주를 입고 이웃집들을 축복하시는 멋진 부부의 모습이 제 눈 앞에 선히 그려졌습니다. 마침 장로님께서 저에게 좋은 글을 보내셨기에 감사하다고 하면서 전신갑주를 입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곧 사진을 보내 오셨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받고 곧 영의 보화를 캐내는 멋진 광부 부부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든 생각은 실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를 영의 보화를 캐내는 멋진 광부로 세우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새해를 주셨고 올해도 사순절을 허락하셨다고 믿습니다. 올해도 모두 영의 보화를 캐내는 멋진 광부가 되게 하시려고…. 그러면 영의 보화를 캐내는 멋진 광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사도바울이 그 누군가에게 명령조로 말할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실은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서가 된 것이겠죠. 주석가들은 빌레몬은 재산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집에서 골로새 교회가 모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빌레몬에게 사도바울은 한 가지 바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으로 하길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9, 10절 말씀입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명령이 아니라 간구를 한다고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간구하느냐…?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하는데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이 갇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났고 오네시모는 사도바울로 인해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감옥에서 주님을 영접한 오네시모를 위해서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무언가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간구할까요? 11,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좀 내용이 복잡해지죠. 전에는 무익했었는데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돌려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냐 하면 이미 심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심장’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좀 건너 뛰어서 16절을 보면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려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이로서 알수있는 것은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종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종인 오네시모가 감옥에 갇혔었고 감옥에서 사도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종인데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경위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사도바울을 만나 큰 변화를 받게 되었고 이제는 바울의 심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석가들은 생각하기를 갇혔던 감옥은 에베소 감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오네시모가 사도바울보다 먼저 에베소 감옥에서 석방된 것 같습니다. 이에 오네시모를 육신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다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속 마음을 말합니다. 13, 14절 말씀입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도이니 사도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참 사랑은 자의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인이 선택하는 것임을 사도바울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은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모른척 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오네시모에게 말씀을 전해도 되고 안 전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자의로 오네시모를 사랑한 것처럼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기회를….
그런데 사도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줄 잘 알았습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용서하는 것은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는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네시모로 인해 빌레몬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빚을 자신이 갚을테니 오네시모를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이 이런 간구를 하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내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이 빌레몬이 빌레몬이 되게 하기 위하여 숨어서 많은 수고를 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빌레몬을 사랑하는데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수는 없어도…. 그것을 빚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빌레몬을 빌레몬이 되게 하였고 이제 오네시모를 오네시모가 되게 하였습니다. 한 가지 남은 것은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빌레몬이 되고 오네시모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장로님 내외분이 영적 보화를 캐내는 멋진 광부라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레몬 안에 있는 멋진 영적 보화를 캐내었습니다. 후에 오네시모 안에 있는 멋진 영적 보화를 캐내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직 캐내지 못한 남은 영적 보화를 오네시모에게서 캐내라고…. 그래서 오네시모로 하여금 오네시모가 되게 할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빌레몬서는 한 장도 겨우 될까말까 하는 짧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내용도 신학적으로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어떻게 이 서신이 성경이 되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가 후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그런데 거의 확실한 전설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여러모로 유명하죠. 먼저 에베소서가 있구요. 아울러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교회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이런 교회에 감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이 사실을 그 당시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기에 빌레몬서가 성경에 들어 오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확실한 것은 서로의 영적 보화를 캐내는 광부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빌레몬서로 성경에 남아 읽혀지게 된 것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의로…. 오네시모 안에 보화를 캐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벌써 오래 전에 사도바울이 빌레몬 자신 안에 보화를 캐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연 질서 안에도 창세로부터 내재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리지’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지끼리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맞닿은 자리가 붙어 한 나무로 변하는 현상입니다. 땅 아래의 뿌리는 둘이면서 지상에 나온 부분은 그렇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바람 따위에 상처를 입어 속살이 드러났다거나, 아니면 두 줄기가 살짝 맞닿아 있다가도 그대로 붙어 버리는 연리지 된 가지는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충해를 입게 되면 한 쪽이 병들어 죽기 전에 서로 붙어 한 몸이 되어서는 혼자였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난다고 합니다. 몸집이 더 커지다 보니 뻗어 갈 수 있는 가지 수도 늘어나고 그만큼 병충해 같은 외부의 재해로부터 강해집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합쳐지지 전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워낙 흰 꽃을 피웠던 가지엔 흰 꽃이 붉은 꽃을 피웠던 가지엔 붉은 꽃이 그대로 피어납니다.
결국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가 서로 경쟁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존재 서로의 아름다운 보화를 캐내주는 동역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를 이렇게 이미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와서 이제는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 죄 가운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께서 연리지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신 것입니다. 아니 아름다운 영혼의 보화를 간직한 꽃이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이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바로 연리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전에는 원수지간이었는데….
빌레몬은 자기를 해치고 떠난 오네시모를 처음에는 무척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곳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과 연리지가 된 것입니다.
그 안에 영적 보화로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이에 빌레몬은 오네시모와 더불어 연리지의 관계를 같게 됩니다. 빌레몬으로 인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까지 된 것입니다.
Zusya라는 랍비가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모세가 되는 것이 아니다. Zusya가 되는 것이다.”
오네시모로 하여금 오네시모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연리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서 우리와 연리지 관계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받으심을 믿고 감격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 특히 우리에게 해를 준 사람과 연리지 관계를 갖게 되는 절기입니다. 서로 안에 있는 보화를 찾아 주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와 연리지가 되어서 우리들 안에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보화를 찾아 주는 광부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Robert Browning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arth’s crammed with Heaven.”
(땅은 하늘의 보화로 가득차 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우리 주위는 하늘의 보화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한 보화를 찾아 주는 광부가 된다면 우리 주위에는 하늘의 보화로 가득차지 않을까요? 서로가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된다면….
말씀을 거둡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한 연리지가 되려면 우리와 먼저 연리지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주님을 깊게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과 깊은 연리지의 관계를 가졌던 마더 테레사는 “아름다운 선물”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눈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지성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마음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들으십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 영혼에게 말을 건네십니다…나는 최선의 성심을 다해 마음의 침묵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나는 그분이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듣겠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온 마음 다해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마더테레사는 주님과 연리지의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이웃 사람들과 연리지의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모세가 아니라 마더 테레사가 된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과 연리지의 관계의 축복을 누리십시다. 아울러 우리의 이웃과 연리지의 축복을 누리십시다. 우리는 서로의 보화를 캐내는 광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