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주기도문II: 나라가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5-10a (04/25/2021)

70이 넘은 나이에 남가주에서 계속 의사로 일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3일간의 바보’라는 글을 쓰셨습니다. 가끔 병원에서 무료로 코비드 테스트를 하는데 본인은 공짜를 좋아하기에 그냥 받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코로나가 자기를 피해 가겠지 생각하면서 치료에 열중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4일 후 전화가 왔습니다.

“Dr. Ahn, your test is positive.” 그러면서 당장 일을 그만 두고 자가 격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주마등 처럼 여러 생각이 지나 갑니다.

“What? me?”에서부터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 사이 먼저 세상을 떠난 동기생들 얼굴이 문득 하나둘씩 떠오르고….

허겁지겁 일을 마감하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 주위에 있는 Urgent Care Center에 2nd test를 예약해 놓고 차에 앉아서 긴 명상에 잠겼다고 합니다. 혼잡스러운 Urgent Care Center에서 다시 테스트를 하고 기나긴 기다림 후에 간호원이 쪽지를 전해 주는데…, “NEGATIVE.”

좋기는 커녕 혼잡해 졌다고 합니다. 일단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숙소를 잡아 자가격리가 해제될 때까지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3일 가량 지나니 혼자 자가격리하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한편 근무하는 병원에 코비드 전문의사가 떠 올라서 현 상황을 알려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증상이 없다고 하니 처음 테스트가 결함이 있었거나 아니면 얼마전에 무증상으로 앓았을거라고 하면서 이제는 옛 이야기라고…. 결국 테스트가 자기를 3일간의 바보로 만들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글로 쓰셨습니다.

 

이 글을 읽자마자 바로 오늘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현재로는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의 길은 정부의 지침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지침대로 따른다고 해도 먼 훗날 코로나로 고생한 시간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요?

“겨우 살아 남기는 했지만 바보처럼 지냈네….” 하지는 않을까요? 매일 매일을 코로나를 피해가려는 목적으로만 산다면 우리는 훗날에 이런 비슷한 고백을 하지 않을까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간을 땅 위에 계십니다. 곧 오늘 부활후 세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바로 우리들 중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지난주간 어느 교우분과 교회 일로 이멜을 주고 받았습니다. 불현듯 다음과 같은 글로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제 이름 석자가 그렇게 엄청나다는 것에 무섭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말씀을 나눴는데 아주 설교 말씀을 꼭집어서 이해하시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린 것은 이웃의 이름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 안에 이웃의 이름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귀한 은혜를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을 엽니다. 어떤 분들은 환기를 위해서 창문도 여실줄 압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에 7개의 창문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7가지가 나옵니다.

지난주에는 첫번째 창문을 여는 기도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첫번째 창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창문입니다. 시편 8: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문을 열면 세상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보며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감격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여호와의 이름을 보며 감격합니다.

 

오늘은 두번째 창문을 함께 열어 보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사실 원어에는 ‘당신의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 번역에서는 편의상 ‘당신의’가 빠진 것입니다. 하여튼 주님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 두번째 창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첫번째 창문을 열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의 아름다움으로 온 세계가 꽃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세상사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를 드리며 두번째 창문을 열 것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는 사회적으로 곧 정치 종교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최근 인도자 교육시 강조하고 또 강조해드렸습니다.

요약해 말씀드리면 이 당시 헤롯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오시기 50년전 쯤부터 다스리기 시작해서 주님 오신 후 100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거의 150년간 다스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왕조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원수지간인 에돔 사람입니다. 에서의 자손인 것입니다. 로마 정권에 기대서 왕권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제사장들도 가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참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나스라는 대제사장은 가야바라는 사위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위에게 물려줄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보면 깜깜할수 밖에 없습니다. 깜깜함을 보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한편 오늘 우리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코로나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으셨을줄 압니다. 물가와 집값이 뛰는 것을 보면 자료를 안 찾아 봐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생활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한 때 WHO(세계 보건 기구)에서 공식 발표하는 소식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가 코로나로 인해서 lockdown을 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더 힘들어진다는 보도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lockdown할수 밖에 없는데 부자 나라들이 lockdown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더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자 나라들에게 lockdown하지 말라고 할수 있을까요? 이럴수록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두번째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런데 코로나뿐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가득차 있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는데 되어지는 일들은 기가 막힌 일들이 지금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요즘 아틀란타 사건 이후 부쩍 아시안 아메리칸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일수도 있고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나름대로 이번 잇슈에 대해서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많은 자료들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되어진 사건들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간단히 소개해 드리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하와이 Pearl Harbor를 공습하지 않습니까?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명령을 내려서 일본인들을 가두게 합니다. internment라고 하는데 1942-1945년까지 3년간 12만명을 수용소에 가둡니다. 미국 시민권자들이지만 심한 인권 유린을 당합니다.

일본인 후손들이 목소리를 내어서 드디어 레이건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인들에게 배상을 해 줍니다. 일본인 후손 10만명에게 2만불씩 배상을 해 준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대통령이 사과를 한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편 1930년대 쏘련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약 17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합니다. 중앙아시아로 가는 도중 약 2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탈린이 왜 잘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겠습니까?

일제 강점기 때 가난과 억압을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민 갔었습니다.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입장에서는 고려인들을 이용해 일본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련을 공략할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 것입니다. 이들은 1930년대 곧 일제 강점기가 최고조로 달하고 있을 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쏘련이나 일본으로부터 어떤 배상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위안부와 정신대 이야기는 그만 두더라도….

 

곧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뻐졋이 미국으로부터 인권 유린 당한 것에 보상도 사과도 받았지만, 일본은 조선 내지 고려인들에게 행한 것을 제대로 인정도 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은 Asian American들에 대한 폭력이 눈에 띄게 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두번째 창문을 여는 것이 아닐까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물론 필요할 때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은 두번째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번째 창문을 열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들어 보십시다. 저는 응답을 받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 같이 기도드리고 응답을 들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제가 받는 응답은 한결 같습니다.

“……….” 침묵.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응답하시는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세상 모든 문제가 쓸데 없는 말로 인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존경받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왜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가두었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원수 나라인 일본제국을 도와줄까봐…. 그야말로 요즘 식으로 하면 음모론입니다. 각료들끼리 서로 그런 결론을 내렸을줄 압니다.

스탈린도 매한 가지 입니다. 고려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제국이 소련을 공략할까봐…. 이것도 음모론입니다. 쓸데 없는 말들로 인해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쓸데없는 말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지 않을까요? 침묵, 하나님의 침묵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는 인간들의 잘 못 사용된 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침묵하실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줄 압니다.

 

Barbara Brown Taylor라는 신학자가 ‘When God is silent’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고대 유대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담긴 문장은 절대로 그냥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geniza라는 지하 창고에 잘 보관해 넣었다고 합니다. 카이로 회당에서 이런 창고가 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잘 정리되어 있는 창고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담긴 문서가 잘 보관되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는 반면, 요즘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이 너무도 쉽게 사용되고 사용된 후 제멋대로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신문조각처럼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못박았지만 이제는 말씀을, 주님의 이름이 담긴 말씀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테일러 박사는 안타깝게 말하고 있습니다.

 

곧 지금 세상은 사람들의 음모론으로 가득차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마저 abuse당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실수 밖에….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아침 하나님의 침묵을 기대하며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만 들을수 밖에 없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움직이는 소리는 너무나 거대해서 우리가 들을수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성찰했는지 최근 전세계 문학계를 뒤흔들어 놓은 이민진 작가는 빠찡코라는 책의 첫 문장을 이처럼 시작합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세상의 수많은 말들로 인해서 이루어진 세상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상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창문을 열수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렇다면 결코 코로나 속에 지나는 시간도 바보처럼 지나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경신고등학교 교목으로 섬기셨던 김종희 목사님께서 한국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이셨던 황광은 목사님과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새문안 교회 고등부를 황 목사님께서 지도하셨고 김 목사님은 학생이었습니다. 월요일마다 방과후 교회를 임원들은 들르곤 했는데 어느 날은 일주일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라는 과제를 내 주셨다고 합니다. 일주일간 아무 말도 안하고 다음주 월요일에 방과후 교회에 갔었습니다.

아무 말씀 안하시더니 이번에는 손에 피 한 방울씩 종이에 묻혀서 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한 방울을 흘려서 교회에 갔습니다.

황 목사님은 보시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바로 사순절 마지막 두 주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목사님은 하나님의 침묵을 몸소 체험케 하신 것이 아닐까요?

 

한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침묵 가운데서 우리를 늘 찾아 오시지 않을까요? 이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말씀을 거둡니다.

바실레아 슐링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 침묵은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의 완성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키고 완성시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와 같이 모든 것이 절정에 이를 때 하나님은 침묵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매일 코로나 가운데서도 코로나 후에도 제2의 창문을 여십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45 “주기도문V: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2 (05/23/21) webmaster 2021.05.27
244 “주기도문I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1(05/16/21) webmaster 2021.05.27
243 “주기도문III: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5-10 (05/02/2021) webmaster 2021.05.04
242 “주기도문II: 나라가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5-10a (04/25/2021) webmaster 2021.04.27
241 “주기도문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마태복음 6:5-10 (04/18/2021) webmaster 2021.04.19
240 “이 모든 것을 보라VI: 부활의 사람들” 빌립보서 3:7-12 (04/04/2021) webmaster 2021.04.06
239 “이 모든 것을 보라V: 큰 대제사장” 히브리서 4:14-15, 5:7-10 (03/28/2021) webmaster 2021.03.29
238 “이 모든 것을 보라IV: 기쁨” 룻 4:13-17 (03/21/2021) webmaster 2021.03.22
237 “이 모든 일을 보라III: 오네시모” 빌레몬서 1:8-22 (03/07/2021) webmaster 2021.03.08
236 “이 모든 것을 보라II: 새 하늘과 새 땅” 베드로후서 3:8-13 (02/28/2021) webmaster 2021.03.01
< Prev ... 1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