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해서 좋은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 글 배우 김동혁씨의 동영상을 얼마전 보게 되었습니다. 말도 잘 만드는 것 같습니다. ‘글 배우’라는 표현에 저도 궁금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난주부터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으니 더 귀가 솔깃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여대생들 앞에서 강의를 했는데 글 배우가 질문합니다.
“언제 행복하시겠습니까?”
대개 답은 원하는 직장 얻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것으로 평범한 대답들을 하였습니다.
글 배우는 자기의 꿈은 의류 사업을 해서 자기만의 패숀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쓰러졌습니다. 몸이 약해지고 폐 수술까지 하게 되었고, 수술 전에는 물도 마실수 없었다고 합니다. 물이 폐로 들어갈까봐….
수술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어느 분이 커피를 들고 가는데 그 향기가 그토록 좋아 보였고 맑은 공기가 바로 행복 그 자체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맑은 공기를 마셨던 것은 자신의 일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매일 행복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제 수술을 하고서야 행복을 다시금 발견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글 배우 답게 짧은 글을 소개합니다.
‘인생은 한 번이지만
행복은 셀수 없기를.’
지난 주일부터 산상수훈에 나오는 첫번째 강의하신 말씀 ‘팔복’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산상수훈은 제자도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산상수훈에 팔복이 제일 먼저 나왔으니 제자도의 본질은 ‘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김동혁 글 배우의 표현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주님의 팔복과 글 배우의 복은 같을까요?
오늘 세번째 복에 대해서 나누는데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조금 의역을 한다면,
“온유한 자들은 현재 이 시간 복됩니다. 미래에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글 배우의 복의 개념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글 배우는 말합니다. “지금 행복하니 행복합니다.”
반면 오늘 세번째 팔복에는 두 가지 시제가 함께 엮여져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미래에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6번의 주일을 뺀 40일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참회, 절제, 구제의 시간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솔직히 사순절만 오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40일인가?’
물론 잘 아실줄 압니다. 40일을 지키는 이유는 성경에 여러 군데 40일 내지 40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40일 계속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후에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는 40년 아니면 40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를 잘 아는 믿음의 선배들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40일 곧 사순절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40일을 지키게 된 이유는 한편으로는 주님의 고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회의 기도와 절제와 구제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경의 사건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한 것일줄 압니다. 노아의 홍수에 동참을 하고 모세의 광야의 삶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의 삶 마지막으로는 주님의 광야의 시험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들은 위대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40일 아니면 40년이 지난 후에는 놀라운 세계가 도래한 것입니다. 곧 사순절은 위대한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노아를 예를 들면, 노아는 40일간 홍수 가운데 방주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노아와 함께 방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서 우리는 노아와 함께 방주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노아의 축복, 모세의 축복, 이스라엘 민족의 축복 그리고 주님의 축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40일 40년의 역사들이 노아와 모세와 이스라엘을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도 사순절에 동참한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복과 글 배우가 말하는 복은 전혀 다른 복인 것입니다. 글 배우는 현재 행복하니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선배들이 사순절을 지키는 전통을 세운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이 되어 있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올해 사순절을 주님의 팔복의 말씀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세번째 복에 대해서 나누는데 노아의 방주에 갇힌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계속 살펴 보고자 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글쎄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가 사순절을 잘 지키고 나면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먼저 온유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저는 ‘온유한 사람’ 하면 다음의 두 할아버지 이야기가 늘 생각이 납니다. 악한 할아버지와 착한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악한 할아버지가 착한 할아버지의 팔을 작난 삼아 비틉니다. 착한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그러지만 부러져….” 그래도 악한 할아버지는 계속 팔을 비틀었습니다. 드디어 부러졌습니다. 착한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거봐, 부러졌잖아!”
착한 할아버지가 온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제일 좋은 방법은 성경에 온유한 자로 표현된 분들을 찾아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줄 압니다. 대표적인 분은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도 착한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도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은 것을 보면 좀 다르기도 합니다.
하여튼 주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데 우리와는 좀 비교하기가 어려우니 두 번째로 온유하다고 표현된 사람을 찾아 보겠습니다. 민수기 12: 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에 온유한 사람은 이처럼 두 사람만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과 모세의 공통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두 분 모두 사순절을 잘 지켰습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40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두 분 모두 40이라는 사순절의 고난의 시간을 겪으신 분들이십니다. 한 마디로 두 분은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아니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사실 주님은 세상에서 하루라도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시간의 성스러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온유한 자들은 시간을 성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님과 모세는 우리와는 좀 거리가 먼 분들 같습니다. 그러면 온유함과 관계된 그리고 우리와 좀 성정이 가까운 분은 없을까요? 다윗이 생각이 납니다. 다윗은 시편 37:11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이 시를 인용하셔서 세번째 팔복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은 손수 다윗의 시를 인용함으로 다윗을 온유한 사람의 대열에 올려 놓은 셈입니다.
제가 다윗의 고난에 대해서는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40년은 아니지만 10년간 사울에게 쫓겨 다닙니다. 사실 다윗은 두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언젠가 이루어질줄 믿고 나머지는 시간에 자신을 내던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사울을 죽이지 않게 한 것입니다. 아니 다윗을 꼼짝 못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죽인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을 온유한 자로 만든 것입니다.
곧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도리어 세상적으로는 때로는 맥을 못추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온유한 자들은 시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간의 성스러움에 동참합니다.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도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착한 할아버지이기 떄문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출애굽 시킬 것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언젠가 약속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주님도 온유한 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셨고 모세도 성경이 온유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유함은 외모와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와 행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이 온유한 자가 될수 있는 것은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행위가 있다면 시간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40일을 잘 지키는 것은 온유한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아니 더욱 온유한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우리가 개발해야 할 온유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입니다. 사람 앞에서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사울을 죽일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온유한 자이었고 그러기에 사람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땅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이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집사람 삼촌댁에서 아주 싼 값에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집수리는 저희가 다 담당했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수도를 고쳤는데 처음 사온 부품은 잘 못 된 것을 사와서 잘 못 사온 것은 refund를 받아야 했습니다. 상점에 가져 갔는데 비늘을 뜯었다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비닐이 뜯겼다고 리펀드를 안 해주지는 않지 않습니까? 물론 따질수도 있었겠지만 쉽게 물러 설수 있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될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나에게 리펀드를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는 축복하는 마음으로 상점을 나올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긴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땅에서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축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땅의 축복입니다. 또 하나는 하늘 나라의 땅의 축복입니다.
세상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도 온유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세상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주시길 원하시는 축복은 하늘 나라의 땅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의 땅을 차지하는 온유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온유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 봤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뜻을 굽혔습니다. 이것이 온유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신 이유는 주님은 하늘 나라의 땅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땅은 택하신 모든 백성을 위한 땅입니다. 이 약속을 믿었기에 당신의 뜻을 굽히신 것입니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주님의 온유하심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주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뜻을 내려 놓기 위함입니다.
결국 사람 앞에서 온유해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온유해 진 후 차지할 땅이 보이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 앞에서 온유해 지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땅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의 온유하심을 닮아 가십시다. 땅의 약속을 믿고 이웃에게 양보하십시다. 하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 양처럼 온유해 지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소개해 줍니다. 이사야 53: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온유하시기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들에게 부활의 축복의 땅을 허락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Lisa Lickona라는 분이 사순절 묵상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의 충고를 받들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Teach me to love cross.”
실은 처음에는 이 기도를 드리기를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 어둡고 외로운 곳으로 인도 될까봐…. 그러나 테레사 수녀를 믿고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기도를 드리고 나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절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는 더 깊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불평 없이 오늘도 나의 일을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물론 그 날도 콤퓨터를 키고 여러 가지를 보고 싶었지만 그 때 마다 어린 아이처럼 도와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루를 마쳤을 때 이상하게도 행복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혼자 하기는 정말로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충분히 해 낼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간 안에서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삶을 누린 것입니다. 행복을 누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온유한 삶입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순절 기간 함께 기도드리십시다.
“Teach me to love cross.”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