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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태복음 5:1-7(3/27/2022)

춘추시대 진나라에 유백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초나라 사람으로 거문고의 달인이었습니다. 한번은 조국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추석 무렵이라 그는 휘영청 밝은 달을 배경으로 구성지게 거문고를 뜯었습니다.

그때 몰래 그의 연주를 엿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름한 차림의 젊은 나무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 음악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백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산의 웅장한 모습과 격류의 우렁찬 기상을 표현하자 나무꾼은 산의 웅장함을 표현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정확하게 맞히었습니다. 백아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 소리를 아는 분 곧 지음(知音)이시군요.”

그는 종자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헤어졌습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서…. 그런데 이듬해 백아가 종자기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종자기의 묘를 찾은 백아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최후의 한 곡을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거문고 줄을 끊고 산산조각 냈습니다. 종자기 같은 지음(知音)이 없으니 더 이상 거문고를 연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제가 집주위를 산책을 자주 합니다. 요즘은 낮이 길어져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주위를 산책을 하는데 어느 집 가까이 가면 어떻게 알아챘는지 강아지가 멍멍 짓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이상한 사람이라서 짓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자주 산책을 하니 반갑게 짓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느낀다고 할까요?

그런데 제가 보이지도 않고 아직 나무에 가려 있는데 제 발걸음 소리를 듣고 짓습니다. 물론 강아지는 집 안에 있구요.

그때마다 감탄합니다. ‘귀가 얼마나 좋으면 멀리서 나는 나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멍멍 짓나?’ 강아지 짓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생각해 봅니다.

‘나는 과연 저 강아지 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는가?’

이번 사순절을 통해 2000년전에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이 우리들 심령 깊숙히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최고의 사순절을 지낸 셈이 될줄 압니다. 사순절이 지난 후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의 종자기들이 되어 있을줄 압니다.

그러면 먼저 그 동안 나누었던 주님의 팔복을 다시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팔복의 말씀을 가슴 속 깊게 새기고 새기다 보면 우리는 잃어버린 말씀의 종자기를 되찾게 되지 않을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들의 별 볼일 없는 삶을 주님 앞에서 겸손한 밭으로 여길 때 놀랍게도 천국은 우리들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들의 행위의 죄, 생각의 죄, 마음의 죄를 애통해 할 때 평강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무능한 자가 될 때 주님께서 대신 일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애쓰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에 취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다섯번째 팔복의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원어 성경에 맞게 의역을 하면,

“복되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몇 주석가들은 여기에 나오는 긍휼은 구약에 나오는 ‘헤세드’, 히브리어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주님은 조건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순절은 조건 없는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조건없는 사랑의 궁극적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기독교 진리에 가장 중요한 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조건 없는 사랑은 받기는 쉬워도 베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건 없는 사랑은 베풀지는 않고 받는 것으로 스포일되어 있는 우리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결국 아주 이상한 인격이 되어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구하고 남에게는 조건 있는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곧 괴물 인격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래 전 체스터톤은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챤이 되지 않는 이유를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크리스챤.”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에 가장 큰 방해라는 것입니다. 괴물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얼마전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리서치에서 주요 종교에 대한 호감도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호감도 조사는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신교 호감도는 32점, 천주교는 51점, 불교는 50점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불교에 무려 20점 뒤지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뒤지고 있을까요? 어느덧 우리 크리스챤들은 괴물 인격체가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무조건적인 사랑은 받기를 원합니다. 베풀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젠가 공생애를 마치면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완성하실텐데,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산상수훈을 통해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종자기들에게….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여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번 사순절 기간 팔복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데 한두번 언급해 드렸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산에서 마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베푸시며 시작하셨고 갈보리 산에서 마치셨습니다.

곧 산상수훈의 말씀 특히 팔복의 말씀은 갈보리 산과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갈보리 십자가가 팔복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3년 후 갈보리 산에서 ‘긍휼을 베푸는 삶’의 완성을 보여주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여….”

그래도 이런 질문은 가능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수 있습니까? 아주 합당한 질문입니다. 이런 고민 가운데 있을줄 알고 주님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대로 행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할수 없는 말씀을 자비하신 주님께서 생각 없이 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향하여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의역할수 있다고 봅니다.

“복되어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본받으려는 자여…”

주님의 긍휼하심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복을 선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하심은 무조건적인 긍휼 무조건적인 자비를 뜻합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주님의 긍휼하심을 향하여 가는 자가 되어 가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더욱 긍휼함을 받게 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신의 긍휼하심을 생각하시면서 긍휼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의 긍휼하심은 우리들 안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긍휼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흉내를 내는 것뿐입니다. 흉내를 내는 자들 안에 주님의 긍휼의 열매는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우리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늘 땅 끝까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선교의 사명을 되새기곤 했는데 김 목사님은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땅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로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을 베푸는 삶인 것을 설파하시고 계셨습니다.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요즘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모습을 늘 동영상으로 대하게 됩니다. 이번에 저희가 자선 기금도 모금을 하고 이를 위해 자선음악회도 엽니다. 이는 모두 땅 끝에 서 있는 난민들을 위한 땅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땅끝에 선 자들을 염두에 두고 유대인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비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난 앞에서 모른 채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6.25를 겪은 우리들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사항 같습니다.

한편 저는 얼마 전 말씀을 읽다가 새로운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늘 이런 땅 끝에 서 계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던 중 시편 말씀을 읽다가 제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 119: 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저에게 큰 찔림을 준 이유는 나는 과연 이런 눈물을 흘릴고 있는가 장성케 되었습니다. 땅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중 우리가 결코 간과할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임을 다윗은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다윗에게는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다윗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긍휼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삶은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의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임을, 언제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자들임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울러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자들도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임을 알고 그들을 위해 땅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해 땅이 되어주는 삶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 외에 무엇이 나올 수 없거니….”

아주 멋진 말씀입니다. 정말로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해 멋진 땅이 쑥쑥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멋진 땅이 쑥쑥 올라오다 못해 든든한 산성이 생기는듯 합니다. 이러한 산성이 생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갈보리 산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갈보리산은 주님의 땅끝이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땅 끝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긍휼하심을 헷세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헷세드의 땅이 새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언젠가 갈보리 산이라는 땅 끝에서 헷세드를 완성시킬 것을 생각하시면서 공생애 시작과 더불어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자여….”

그리고 이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을 완성시키시려고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실 십자가는 온 우주의 땅 끝입니다. 땅 끝에서 떨어지심으로 주님은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한 땅이 된 것입니다. 떨어지시면서 일곱 마디를 남기신 것입니다. 땅 끝에 있는 자들만이 땅 끝에 있는 자들의 땅이 될수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만큼 벼랑에 선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땅 끝에서 굶주리고 아파하는 자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도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자신도 늘 땅 끝에 서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4: 9-13,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지꺼기 같이 되었도다.”

사도바울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땅 끝에 서서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주님의 긍휼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자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땅 끝에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땅 끝에 있는 자들의 땅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복되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말씀을 거둡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난 치유자’ 책에 메시야상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다쳤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에 상처 부위를 잠시 붕대로 감싸고는 아픈 사람을 찾아 갑니다. 그후 다시 와서 붕대를 풀고 자신의 상처를 계속 치료합니다.

이 모습이 긍휼을 베푸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 모습이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남은 사순절 종자기가 되십시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십시다. 긍휼하심을 받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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