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라는 영화 감독은 영화에 대해 세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영화는 무엇인가?
둘째, 영화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셋째,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답합니다.
첫번째 답,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두번째 답, 영화는 모든 것을 욕망한다고….
세번째 답, 영화는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이 감독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말씀 특히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요한 계시록은 한편의 영화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요한 계시록을 여덟개의 장면으로 나눠서 주석을 하였습니다. 곧 주석가는 요한계시록을 한편의 영화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3권의 요한계시록 주석책이 있는데 영화로 생각하고 풀이한 이 주석책을 제일 좋아합니다.
다시 감독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감독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번에 요한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인도자 성경 공부시 여러번 말씀을 나누었지만 설교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한 두 차례 있을까 말까 합니다. 장장 27년 동안….
사실 ‘영화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고 깊은 내용의 말씀을 짧은 설교 시간에 소화하기 어려웠던 점이 제일 컸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감독의 두번째 답과도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모든 것을 욕망한다고….’ 곧 영화는 종합예술이라는 의미일줄 압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신구약의 모든 성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등…. 아울러 이 당시 주변 국가 역사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곧 요한계시록도 모든 것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짧은 설교 시간에 어느 부분을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번에 요한계시록 말씀을 나눌까요? 이번에 용기를 내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나누려는 이유를 감독은 세번째 답변에서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뭔가를 할수 있다고.’ 이번 요한계시록의 씨리즈를 통해서 뭔가를 할수 있음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작은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번에는 성령의 강권함을 느껴서 감히 요한계시록의 말씀 특히 일곱 교회의 말씀을 나누는 것임을 밝혀 드립니다. 앞으로 몇 주간 8개의 영화 장면 중 첫번째 장면을 함께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9절 말씀에는 요한이 영화를 관람했던 영화관의 위치가 나옵니다.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밧모라는 섬에 유배당해 와 있었던 것입니다. 밧모섬은 그리스의 섬으로 이 당시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사랑했던 제자인 요한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만 붙잡혀서 유배지에 끌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한쪽으로는 많이 답답도 하고 지혜롭게 전파하지 못해서 이런 곳에 끌려 왔나 후회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당분간은 복음을 전파할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을줄 압니다. 큰 실망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이 날은 ‘주의 날’ 곧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날이었습니다. 주일을 맞아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혼자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성령에 감동하심이 임하더니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11절,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네가 보는 것을’로 시작하는데 이는 영화가 펼쳐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화 필림에 담지 말고 글로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수 밖에 그 때는 영화 필림도 없고 비디오도 없을 때이니 말입니다. 대신 글을 잘 써서 읽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듯이 잘 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 것을 글로 표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 하나 기록하려면 그야말로 장문의 글이 필요합니다. 장문의 글을 누가 읽겠고 읽어도 느낌이 오겠습니까?
그런데 본 것을 글로 표현하는 기가 막힌 장르가 있습니다. ‘시’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요한 계시록을 하나의 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시인’이 영어로 ‘poet’인데 이는 원어로 ‘maker’ 곧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곧 ‘시’는 무엇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사도 요한을 신학자이자 목회자 그리고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본 것을 일곱 교회에 써서 보내는데 요한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고 이를 읽는 자들도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느끼면서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시를 읽는 자들은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기록한 요한의 시를 들려 드릴텐데 새로운 세계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12절,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일곱 금촛대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물론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일곱 교회라고 생각하시면서 이 글을 읽으실줄 압니다. 요한은 아직 이것이 일곱 교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원래 구약에 나오는 촛대는 일곱 촛대가 하나의 받침에서 나와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이 일곱개의 촛대는 가운데가 뚫려 있어서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의 눈에 보인 촛대는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일곱개의 촛대인 것입니다. 당연히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후에 요한에게 편지를 받은 일곱 교회 교인들도….
“아니 왜 촛대가 연결이 안 되고 따로 따로 떨어져 있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다음 장면이 펼쳐집니다. 13-14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성소의 촛대는 일곱 촛대가 받침대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인자 곧 주님이 떨어져 있는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휘황찬란하십시다. 다윗이 고백했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처럼 선한 목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웅의 모습에서 신선의 모습까지…. 어떻게 보면 성경 곳곳에서 메시야를 표현했던 모든 모습 아니 그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모습을 본 요한은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됩니다. 이에 주님께서 오른 손을 요한에게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안수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요한에게 안수하시며 명령하십니다.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두번째로 다시 본 것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은 본 것을 기록해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금 다짐했을줄 압니다.
이제야 요한은 깨닫게 되었을줄 압니다. 요한을 밧모섬으로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잡아서 보낸 것이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다른 일은 그만 두고 밧모섬에서 당신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보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것을 글로 기록하게 하시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남은 사명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까진 좋은데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점이 남아 있습니다. 성소의 촛대는 연결되어 있는데 왜 이 촛대들은 연결되지 않고 떨어져 있는지…? 이 모든 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먼저 요한의 가슴이 뜁니다. 소아시아에 그동안 간신히 간신히 세운 일곱 교회가 있는데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본인도 붙잡혀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으니 일곱 개의 개척 교회가 어떻게 될까 늘 불안감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는 성소의 촛대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에 알리는…, 그리고 주님이 그 가운데 서 계시는 상상도 못했던 존재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일곱 교회는 자기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 없음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친히 붙들고 계십니다. 한 가지는 그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기의 본 것을 글로 써서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요한뿐일까요? 요한의 편지를 받는 모든 교회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요한이 갇혔을 때 자기들도 각자의 밧모섬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는 자라지 않을 것이고 복음은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회의감 마저 그들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곱 교회 사이에서 자기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 주님은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에 일곱 교회는 더욱 새로운 힘을 얻고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 갈 것임을 새롭게 결단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시들어 가는 현대 교회를 위한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송종록 목사님이시라고 선교 전문가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이슬람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Pew Research center는 10년 기간으로 세계 인구대비 이슬람의 성장률을 내어놓았다.
“1990:19.9%, 2000:21.6%, 2021:23.4%, 2020:24.9%, 2030:26.4%”이다. 이 속도로 나간다면 머지 않아 기독교의 전진기지였던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가 이슬람으로 변했듯 지구촌의 종교지형도도 크게 바뀌고 말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이 때 우리에게 밧모섬에 갇힌 요한의 모습이 마음에 가까이 와 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낙심해야 할까요? 말씀드린 유진 피터슨은 당신의 책에 다음의 글을 인용합니다.
“일어나는 일들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일에 흠뻑 빠지는 것입니다.”
조금 의역을 해 보았습니다.
“영화는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흠뻑 빠지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요한 계시록을 읽는 사람들에게 요한이 보여주는 영화에 흠뻑 빠져 들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앞으로 한 두 달간 함께 흠뻑 빠져 보십시다. 이 영화에 흠뻑 빠지기 위하여 올해 교회 표어를 하박국 말씀에서 정했습니다.
“주여, 주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요한의 영화는 바로 21세기에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를 위한 영화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화관의 위치는 어디이죠? 크게는 미국, 뉴잉글랜드 작게는 보스톤 내지 부르클라인입니다.
수년전에 유대인 초청 한국 문화 축제를 연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여러 유대인 그룹을 초청했는데 그중 BU학생들이 와서 유대인들의 노래와 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얼마후 한 엽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학생의 어머니가 보낸 엽서인데, 당신 자녀가 한인 교회에서 performance를 한다고 하는데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별 기대 없이 관람차 오셨다고 합니다.
히브리 단어를 소개해 주면서 이는 따뜻한 환대를 느꼈을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하며 바로 저희 교회에서 이것을 느꼈다고 엽서를 보내오셨습니다. 인종화합에 대한 잇슈가 나올 때마다 늘 이 분을 떠오르게 됩니다.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유는 이 분은 아마 구약의 일곱 촛대 곧 받침대로 연결된 일곱 촛대는 잘 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반면 이 분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일곱 촛대, 그리고 그 사이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서 계신 주님은 보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은 저희 교회가 유대인과 함께 한국문화축제를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부르클라인에 유대인이 38% 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을 마음에 두고 유대인과 합동 문화 축제를 연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B40라는 표어도 만들었었습니다. 이 지역의 40%가 주님을 믿게 되도록 함께 힘을 쓰자는 의미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의 촛대는 7개가 받침대로 연결된 촛대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새로운 촛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촛대는 떨어져 있는데 이 촛대들은 신비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주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B40! 이 목표가 수년 내에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만일 요한이 보여주는 영화에 빠져들어 있다면 말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저희 교회 국내선교위원회에서 매해 작은 액수이긴 하지만 부르클라인 타운에서 운영하는 mental health center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년전에 모임이 있다고 초청장이 와서 모임에 방문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제가 아는 사람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좀 떨어져서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데, “church”운운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듯 했습니다. 저는 이 곳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생각이 들어서 좀 가까이 가서 슬쩍 물어 봤습니다.
“방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냐고….”
답변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귀에 그렇게 들린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좀 이따가 씁쓸한 마음으로 귀가했습니다.
그 분들도 유대인일지 모릅니다. 확률적으로는 38%입니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언젠가 그들도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곱 촛대 사이에 서 계신 것을…. 그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었던 촛대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일곱 촛대이었는데 말입니다. 놀라운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시를 적어서 그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들도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으로 인해 모든 교회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광야 교회를 비롯해서 예루살렘 성전 교회 그리고 성령 강림후 2천년간 이 세상에 오고간 수많은 교회는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교회의 주인이시고 주님의 손에는 각 교회를 지키는 사자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저희 보스톤 한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의 편지는 저희 교회에게 보내어진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열어 봅시다. 그리고 읽음을 넘어 영화처럼 보십시다. 온 교회의 받침대가 되시는 주님을 보십시다. 온 교회 사이에 온 교회의 사자를 오른 손에 드시고 서 계신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이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외치십시다.
“주여 주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드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