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도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님께서 보내 주신 책 내용을 소개해드렸는데 오늘도 허 목사님의 이야기 하나를 먼저 나눕니다.
허 목사님께서 미국 첫 목회는 텍사스 주의 외딴 소도시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제 그 교회를 떠나고 뉴져지에 있는 찬양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새로운 임지에 가게 되었는데 조언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
“이단이 되어라.”
허 목사님은 액면 그대로 받지를 않고 이렇게 받아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을 이단적으로 되라는 말로 받았다. 자칫 이단 소리를 들을 만큼 과격하게 개성적인 교회가 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허 목사님이 그후 목회를 잘 하셨습니다. 종종 연장 교육시 만나서 말씀을 들으면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혁신적인 아니 이단적으로 목회를 하시는 것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를 거두었구요.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목사님들은 ‘아무나 저렇게 하지 못하지, 허 목사니깐 하지…’라는 멘트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단적으로 목회를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기독교의 시작은 이단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이 당시로는 혁신적이고 이단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는 늘 이단적으로 보이는 목회가 참 목회일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한 마디로 조언을 하셨다면 아마 허 목사님이 받은 조언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이단적으로 하라.”
이는 오늘 본문 말씀 첫번째 말씀을 통해도 재확인이 됩니다.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다시 떠오르게 하십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상기시키십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 당시로는 이단적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메시야로 여기는 것이 이단적입니다. 아울러 더 이단적인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이 당시 믿는 자들에게는 촛대하면 일곱 촛대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성소의 촛대였습니다. 이 성소의 촛대는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져 있고 그 구멍을 통해서 기름이 공급이 되어서 모든 일곱개의 촛대가 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새로운 촛대를 보여 주십니다. 일곱 촛대가 떨어져 있습니다. 연결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지난번에 이미 나누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는 것을….
유대교적으로는 이는 상상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 당시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회당를 마치 하나의 촛대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회당이 교회 보다 훨씬 자리를 잡고 건재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 교회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곱 교회가 일곱 촛대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회당이 촛대라고 해도 이단적인데 교회가 촛대라니…!
그러면 일곱 교회는 어떤 대단한 교회들이기에 주님께서 촛대로 삼으시고 멧세지를 전해 주시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제일 먼저 촛대 중에 하나인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2, 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 정말로 촛대가 될만한 교회임을 금방 느낄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당시 에베소는 상업뿐 아니라 학문도 앞서 갔던 곳으로 유명한 두란노 서원이라는 도서관도 있었던 곳입니다.
물론 유명한 아데미 신전이 있는 우상을 아주 제대로 섬겼던 도시입니다.
이런 곳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신앙 생활을 해서 주님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로 촛대가 될만한 교회임을 재삼 확인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 회당보다는 못한 가정 교회라고 할지라도 촛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에베소 교인들은 스스로 자기네들은 촛대가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은근히 자부심도 생겼을줄 압니다. 첫번째 촛대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큰 기대를 안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청천벽력입니다. 아니 자기들을 성소의 첫번째 촛대로 비유하실 때는 언제이고 갑자기 책망을 하십니다. 급소를 찌르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잊은 교회라고…. 교회에게 주는 가장 아픈 비난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는 교회라는 비판 아닙니까? 큰 혼동이 옵니다.
‘어떻게 촛대라고 하시더니 이런 책망을 하실까? 그리고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촛대가 될수 있는가?’
사실 에베소 교인들은 자기들의 행위 때문에 촛대가 되었었다고 잠시라도 자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첫 사랑을 잃은 자들입니다. 이런 혼동 가운데 있는데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제 문득 놀라운 깨달음이 옵니다. 첫 사랑을 잃어 버린 교회를 주님께서는 계속 촛대로 삼고 계신 것임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촛대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해서 자기들이 촛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촛대로 삼으셨는데 잘못 하나로 촛대를 쉽게 옮기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잘못이라도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십니다. 그 이유는 촛대가 되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있다면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뿐일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는 것이 제일 합당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니 얼마전 본 북한에서 내려 온 탈북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북한 공안부 요원들이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한 가지 묘책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특징은 물건을 이웃에게 잘 나누는 사람들임은 공안부 요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늘 자기의 것을 이웃과 나누곤 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안부 직원이 찾아 왔습니다. 이에 할아버지가 답했다고 합니다.
“왜 이제 왔습니까?”
아마도 에베소 교인들도 이런 사랑의 공동체였는데 언제 부터는 이런 사랑을 나누는 습관이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 중 하나가 6절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의 특징은 그들은 이단이고 이들의 신학은 영적인 세계가 중요하고, 보이는 육적인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육신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은 교회사 가운데 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신학적으로는 뚜렷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하였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을 미워했습니다. 이런 통찰력은 뛰어났지만 어느덧 잃어 버린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학적인 통찰력이 뛰어날수록 어느덧 사랑을 잃어 버리게 되어 있을까요? 교회는 신학적인 통찰력도 뛰어나야 하고 이웃 사랑도 항상 넘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으로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참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언제 이 둘의 조화가 깨지기 시작할까요? 저는 마지막 7절에서 실마리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마지막 절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모든 멧세지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작은 동일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곧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이 말씀은 실은 모든 교회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여섯 교회 교인들도 함께 들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여섯 교회에 주시는 말씀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곧 일곱 교회는 일곱 교회이자 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니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일곱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잊을 때 아무리 신학적 통찰력이 깊어도 첫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계시록을 강해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곱 교회에 대한 주석도 많이 다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일곱 교회는 앞으로 오는 세대의 교회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주님만 아신다고 답할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한편 저는 지난번 언급해 드린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관점으로 일곱 교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님은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일곱 교회의 문제를 차례로 다룬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저도 그 분의 생각에 공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위치를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힌다고 생각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로 이어지는 일곱 교회의 위치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 가면서 위치하고 있습니다.
곧 요한은 에베소를 기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한 교회 씩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교회의 현 주소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요한이 일곱 교회의 위치 순서로 멧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요한은 이 편지를 모든 일곱 교회 교인들이 읽고 일곱 교회 교인들이 서로의 모습을 알고 서로가 이미 하나의 교회임을 고백하길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곧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에는 자기 교회뿐 아니라 나머지 여섯 교회도 하나의 교회로 믿고 서로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본주의에 물들면서 어느덧 자기 교회밖에 모르는 교회 내지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오늘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허봉기 목사님에게 충고하신 분이 “이단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늘날 이단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오래전 교회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당신 교회를 소개하는 소책자가 보내왔습니다. 메일을 열어 보니 큰 글자가 아직도 눈에 선명합니다.
‘바로 그 교회.’
내용인즉슨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로 그 교회가 되는 것이 참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귀 교회의 목회 방침을 소개한 책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소책자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아마 조금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일곱 교회.’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왜 에베소 교회를 제일 먼저 쓰셨나? 에베소 교회는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전통도 그렇고 신학적 견해도 그렇고 그리고 한 동안 일곱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일곱 교회가 한 교회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지나며 자기 교회 중심이 되어 갔습니다. 이웃 교회를 위한 사역이 멈췄습니다. 첫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책망하며 그것도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에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교회론을 정리합니다.
“The only way from Christ to heaven and the battles against sin is through the church. And not just one church, but seven!”
(그리스도에서 천국으로, 또한 죄와의 승리로 가는 길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 교회가 아니라 일곱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아니라 ‘바로 그 일곱 교회.’
요즘 많은 교회들이 ‘바로 그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일곱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당연한데 어느덧 이를 추구하는 교회는 이단적 교회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일곱 교회는 2000년 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눈에 띄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곱 교회’에 속한 한 교회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한울타리에 소개한 이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유희주 시인이 쓴 ‘새로 들어선 길목’이란 글의 한 문장을 다시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오십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 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 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시인은 그동안의 인생 여정에서 4 번 공동체를 떠나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항상 새로운 공동체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몇 번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보스톤 한인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신앙 생활할 때와 모든 것은 같습니다. 한 교회에 속한 교인입니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곱 교회가 바뀐 것입니다. 타주에서 오신 분들도 모든 것은 같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일곱 교회가 바뀐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일곱 공동체 안에 있는 한 공동체임을 인정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일곱 공동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히 나누게 될 것입니다. 저희 보스톤 한인 교회는 일곱 공동체 안에 있는 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이 놀라운 공동체를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통찰력과 함께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 주님의 촛대가 되어 세상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