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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편 136:1-26 (01/01/2023)

도로에서 달리던 차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되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한 자동차 회사가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발명가들과 기업가들, 자동차 관련 회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상금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반면 비행 자동차를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개발에 성공한 기업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보스톤에 위치한 회사입니다. 언젠가는 완성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 회사는 어떻게 거의 만들수 있는데까지 이르렀을까요?

 

보스톤에 있는 회사는 접근 방법을 완전히 달리했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자동차’를 가져다 놓고 연구할 때, 이 회사는 ‘비행기’를 가져다 놓고, 어떻게 도로 위를 달릴 수 있게 만들까를 고민한 것입니다.

활주로가 아닌 도로 위를 달리는 비행기, 큰 날개를 접을 수 있는 비행기, 일반 주유소에서 연료를 넣을 수 있는 비행기, 개인 차고에 들어갈 만큼 작은 비행기를 만든다면 바로 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 됩니다.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묵은 해를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를 학처럼 날기를 원하며 축복의 새해에 첫 발을 내디딘 우리들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올 한 해 전보다 더 높게 날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맞이했을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늘을 나는 멋진 신앙인의 삶은 어떤 삶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교 학자들은 오늘의 시편을 ‘the Great Hallel’ (the Great Psalm of Praise: 위대한 찬양시)라고 부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 올리는 최고의 찬양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신년예배를 맞이하여 이 위대한 시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위대한 시로 불리워지는만큼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을 나는 지혜를 얻게 되지 않을까요?

 

우선 몇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면 이 시는 교독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도자가 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회중이 답합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것이 1절입니다. 모든 절이 이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절(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총 절수가 26절인데 26번 이를 반복합니다.

한편 첫 절과 마지막 절을 보면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는 신앙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26절은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임을 고백함으로 시를 마칩니다. 곧 이 시를 고백하면서 어느덧 이스라엘인들은 독수리 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들을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한편 ‘하늘에 계신 하나님’하니 무엇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니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마 주님도 136편을 아주 좋아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다시 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의 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로 시작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하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죠. 이런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이 ‘단군’ 하면 느끼는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뭔가 포근하면서 위용찬 모습이 연상되곤 합니다.

마찬 가지로 이스라엘인들도 ‘여호와’ 하면 느끼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 ‘여호와’를 처음 알리신 때는 광야에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실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도 제일 볼품 없는 미천한 나무입니다. 아마도 눈에 전혀 들지 않았던 나무였을 것입니다. ‘단군’하면 한국인들은 ‘곰’이 생각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 하면 떨기나무가 생각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스스로 여호와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은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위대한 찬양시’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여호와 하나님을 계속 찬양합니다. 2절에는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3절에는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곧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미천한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은 세상 어떤 신이나 어떤 주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분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 되심을 감사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감사의 제목이 이어집니다. 4절,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9절까지가 한 문단인데 여호와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그가 하신 기이한 일은 세상을 창조하신 일입니다. 그중 7절까지는 공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 9절은 시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곧 미천한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떨기나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세상을 창조하시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임을 확신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에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역사라는 놀이터를 만드신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들을 위해서 역사라는 놀이터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위대한 놀이터에서는 어떤 위대한 사건이 일어날까요? 10절,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인은 가장 위대한 일을 출애굽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10절에서 22절까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2절,

“곧 그 중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는 왜 이 이야기가 가장 위대한 사건인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민족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었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긴 역사가 흘렀는데 그 시간은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나? 특히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였는데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의 엑스트라들이었나?’

 

사실 하나님은 역사라는 놀이터를 만들어 놓으시고 늘 떨기나무에 나타나셨습니다. 놀이터의 찬란한 곳은 인간들에게 양보해 놓고 미천한 떨기나무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특히 이 당시에는 애굽과 바로에게 위대한 창조 세계를 양보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떨기나무에 불로 임하신 것입니다. 미천한 모습으로….

실은 미천한 떨기나무를 통해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은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는 동안에도 늘 떨기나무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힘세고 강한 바로는 볼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떨기나무를 볼수 없습니다. 떨기나무 가까이 갈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로서 당신께서는 늘 떨기나무 사이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계셨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곧 시인에게 있어서는 400년 종살이와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 정착은 한 위대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를 “여호와께 감사하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과 더불어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자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생각되는 기나긴 400년이라는 기간에도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지나간 역사를 생각하며 감사할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지난주 어느날 저녁에 TV 뉴우스 채널을 보고 있었습니다. 요즘 뉴우스 채널을 보면 보수 진보 양편이 나와서 늘 현재 되어지는 것을 각자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면서 토론을 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무엇을 가지고 열을 올리면서 토론하겠나’ 생각하면서 켰는데, 의외로 연말이라서 그런지 80년대 90년대의 각자의 삶은 어떠했는지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서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 이야기는 이처럼 갈라진 이념을 넘어서는구나…!’

그런데 과거 이야기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뒤돌아 본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길까요?

 

사실 시인은 과거를 감사하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3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절을 교독하면서 회중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주어가 갑자기 바뀝니다. 22절까지는 주어가 ‘그들’입니다. 곧 출애굽을 했던 조상들입니다. 21절을 보면,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반면 23절부터는 ‘우리’입니다.

 

시인은 23절을 염두에 두고 22절까지의 긴 교독문을 이어왔던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오늘의 시는 바벨론 포로후 다시 고향에 돌아온 시인이 쓴 시라고 생각합니다. 24절을 보면 더 잘 알수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인은 포로후 가나안 땅에 돌아 왔지만 아무런 꿈도 없이 지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꿈이 없는 것은 그래도 좋은데 늘 서로를 비난하고 과거 역사를 분석만 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분석하면 할수록 더욱 서로를 향한 비난만 커 가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반면 시인은 과거를 감사하는 자들만이 새로운 꿈을 꾸고 미래를 가꿀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조상들의 감사의 제목을 나눈 것입니다. 이에 조상들의 이야기를 감사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 자들에게 자신들의 감사의 이야기로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기들은 조상들에 비해 비천한 백성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자기들에게도 조상들에 임했던 축복이 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통해서도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가 펼쳐 졌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보다 한 발 더 나아갑니다. 25절,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현재 자기 민족을 위한 감사는 어느덧 온 인류를 향한 감사로 발전합니다. 아니 온 인류를 넘어 모든 동식물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조상들은 약속이 이루어져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했지만 이들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늘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발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시인의 공동체가 누린 축복은 모세 공동체가 누렸던 축복보다 한 단계 엎그레이드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늘 새롭게 엎그레이드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구요?

“감사하라!”

결국 시인은 결론을 내립니다.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드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도 덩달아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날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그토록 밟고 싶어했던 2023년도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겠습니까? 시인은 말씀합니다.

“감사하라!”

 

올해 저희 교회는 뜻 깊은 해입니다. 모든 해가 중요합니다만 실은 올해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저희 교회가 70주년을 맞이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들에게 독수리의 신앙의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래서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정했습니다. 땅 위에서 되어진 역사를 감사하는 것이 곧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어집니다. 70년의 역사를 함께 감사할 때 우리는 최고의 공동체가 되어 함께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 자신으로 인한 감사는 한 발자국 더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감사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감사하는 우리들은 독수리가 되어서 훨훨 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큰 소리로 감사할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는 그 어느 때에도 누리지 못했던 최고의 축복의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설교에도 소개해 드린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이일선 목사님의 기도문입니다.

 

“주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높은 이상을 주옵소서!

주여! 모든 인간의 손에 동정이 있게 하옵소서!

주여! 모든 인간이 있는 곳에 참과 선과 평화가 있게 하옵소서!

주여!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아름다운 천국이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

 

이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하실수 있었던 것은 다음 이 목사님의 삶의 모습에서 엿볼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자신의 삶을 짧게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등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입에는 노래가 있다.”

그가 끝까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을수 있었던 힘은 바로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감사의 노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새해를 감사의 노래로 시작하십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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