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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와 천국” 마태복음 3:24-30 (2023.2.26)

“가라지와 천국”

마태복음 13: 24-30

                                                                                                                                     이영길 목사

얼마전 저희 교회 교우님이 지은 수필집을 선물로 받아 보았습니다. 수필집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새똥.’ 일단 ‘새똥’을 찾아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보스톤에 오시기 전에는 캘리포니아에 사셨는데 자동차를 집 앞 길거리에 파킹을 하곤 하셨습니다. 물론 집에 drive way에 주차 공간이 남아 있긴 해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시면 drive way에 던져진 신문을 픽업하러 나가시면서 늘 길거리에 주차된 차를 둘러 보셨다고 하십니다. 차는 이미 중고차라서 수리비가 차 값보다 더 많이 드는 애물단지였다고 합니다. 곧 차를 보살피러 나가 보시는 것이 아니고 새똥이 차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살펴 보신다고 합니다.

차도에 서 있는 운치나는 가로수 밑에 주차를 하기 때문에 늘 새똥들로 차는 매일 아침 세례를 받곤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계절에 따라서 새 종류가 달라지고 그래서 새똥의 양이나 모양도 달라지곤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뭉텅이로 모여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문을 집어드시곤 새똥을 닦기 위해 집 안에 들어와 페이퍼 타월을 가지고 나가시면 부인께서 왜 사서 고생하시냐는듯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바쁜 이민 생활 아침 출근길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안스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교우님은 속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새들이 우리 가까이 서식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는 행복한 느낌을 준다.”

이 수필을 읽으면서 큰 공감을 느꼈습니다. 아울러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교회밴은 얼마 동안 저희집에 파킹을 해 두었었는데 한번은 거리에 파킹을 1주일 가량해 두었었는데 새똥으로 창이 매일 화려하게 칠해져서 재빨리 다시 drive way로 옮겼습니다.

역시 그래서 저는 수필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수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 기간에도 계속해서 주님의 비유를 살펴 보면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만나 보고자 합니다. 24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지난주에도 비유는 청중이 누군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 앞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3:1, 2절 말씀을 보면,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곧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큰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10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큰 무리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는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청중인 바리새인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은 큰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들의 평생 소원은 늘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었을테니 말입니다. 자기들도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좋은 씨를 뿌리는 자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25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청중은 깜짝 놀랍니다. 좋은 일을 기대했는데 전혀 뜻밖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고 잠을 자고 있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기만 하셨지 전혀 간섭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청중은 생각합니다.

“아니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을 보셨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라도 돌봐 주셨어야지 왜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셨나…?”

한편 주님은 계속 순진한 청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6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저는 농촌에서 자라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농촌에서 자라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논에 가라지 곧 피가 많이 자라는데 처음에는 구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주님도 이를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결실할 때에 비로소 가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중들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가라지임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불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은 구분은 못해도 하나님은 구분하실수 있으셨는데 왜 그냥 방치해 두셨냐는 불만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냐고 불평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설마 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집 주인은 대답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그리고는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습니다. 침묵이 흐릅니다. 집주인이 무엇을 명령할 것을 청중은 당연히 기대합니다. 계속 청중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주님은 잠시 후 계속 말씀하십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청중은 정말로 기가 막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보고를 들었으면 이제라도 당장에 뽑으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주인은 남의 일인양 먼 산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종들이 먼저 재촉한 것입니다. 29절,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이에 대한 주인의 반응은 가관입니다. 청중은 지금 예수라는 청년은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가라지를 뽑다가 잘 못해서 벼도 뽑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지 않으면 벼 수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말하나마나입니다. 벼 몇 포기는 뽑힐지라도 결국은 수확을 크게 하려면 어쩔수 없이 가라지를 뽑아야 합니다.

청중은 생각합니다. 천국은 그러면 삐쩍마른 곡식으로 가득찬 곳이라는 말인가…?

청중의 생각에 아랑곳 없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

청중은 실망합니다. 가라지가 산더미 처럼 쌓일 것이고 곡식은 삐쩍말라 몇 가마 정도 밖에 안 될텐데…. 이것이 천국이라는 말인가…?

물론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귀 있는 자들은 주님의 비유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달리 생각합니다. 가라지로 인해서 수확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최근 비유를 해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학문 학자들의 연구 발표이긴 합니다.

“neural coupling”(뇌신경 동조화)이라는 주제가 요즘 많은 관심을 끄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구두로 소통하는 것은 쌍방간의 행동인데 최신 의학의 발달로 fMRI를 가지고 뇌파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뇌파가 서로 연결이 됨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 neural coupl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통이 실패를 하면 이 coupling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를 주님의 비유로 비교해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Coupling이 생기는 사람 안 생기는 사람. 생기는 사람은 공감을 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는 축복을 누립니다. 안 생기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요.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Coupling이 생기는 대화와 그렇지 않은 대화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를 왜 시작해…?’ ‘환자를 위해서’, 라는 대화나,

‘너희 회사는 무엇을 만들어?’ ‘가구.’ 이런 대화는 coupling이 생기지 않습니다. Coupling이 생기는 대표적인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해”

순간 이것 저것을 생각하면서 듣는 이의 뇌파는 말하는 이의 뇌파와 접속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서 듣는 이들과 neural coupling이 생기게 하시는 것임을 저는 이 자료를 읽으면서 확신케 되었습니다.

자주 말씀드린대로 모든 비유는 천국을 노래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만드신 특별한 쟝르입니다. 우리의 뇌의 구조가 우측뇌와 좌측뇌가 있는데 노래하는 뇌는 우측뇌입니다. 논리적인 뇌는 좌측뇌입니다. 많은 학문은 좌측뇌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좀 비유에 대한 개론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다시 오늘의 비유로 돌아가면…. 결론적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

주님과 coupling이 된 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며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좌측뇌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들으나마나 한 이야기라며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는 닥치는대로 가라지를 더 뽑으러 갑니다. “왜?”라는 질문을 안고….

독일 히틀러 정권은 1933년 뉘른베르크 법안을 발효합니다.

“오늘 이후,

이상적인 독일 건립에 방해되는

모든 해악 요소는 국가가 강제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히틀러가 이런 법안을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눈에 가라지로 보이는 자들과는 함께 노래를 부를수 없었습니다. 이들을 다 제거하면 노래를 부를줄 알았던 것이 아닐까요? 히틀러에게는 유대인들이 가라지였던 것입니다.

히틀러는 “왜 유대인들이 이 땅에 존재해야 되?” 하면서 뽑아 버린 것입니다.

처음 새똥 수필가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약 수필가가 새똥으로 인해 차를 자신의 driveway로 옮겨 놓으셨더라면 수 많은 새들을 만날수 있었을까요? 물론 차를 옮겨 놓으셨더라면 아침 출근길이 바쁜데 시간 허비도 안 하셨을터이고, 페이퍼 타월도 아꼈을 것이고 많은 좌측뇌적인 생각이 교우님을 한쪽으로 당겼을줄 압니다. 그러나 새들의 노래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을 것입니다.

새소리로 인해서 매일 매일 더 보람찬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요? 아니 새똥으로 인해서….

이제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가라지를 처리할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아니 이를 고민하다 보면 힛틀러처럼 될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가라지로 인해 어떤 노래를 부르지”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라지로 인해서 우리가 부를수 있는 최고의 노래가 무엇일까요?

저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과연 ‘가라지’에 대한 노래가 있나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훈아의 ‘가라지’가 떴습니다. 흥미롭다 생각하고 나훈아는 가라지에 대해 어떤 노래를 불렀나 보았습니다.

그런데 식물명사 ‘가라지’가 아니라 동사 ‘가다’에서 나오는 ‘가라지’ 곧 ‘갈테면 가라지’라는 노래 가사였습니다.

한편 재밌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가라지’가 가야 노래를 부를수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라지는 늘 귀찮게 옆에서 자신을 숨기고 끝까지 붙어 있으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시간 솔직한 고백 하나를 드립니다. 저희 교회가 ECC를 건축 완료한지 벌써 13년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요즘도 저는 ECC에 들어설 때마다 마음에 감사가 늘 있습니다.

사실2007년도에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교회이니 주님께서 최소한의 경비로 최소한의 시간 안에 완성시켜 주시겠지….’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3배 이상의 경비와 3배 가량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건축 당시 오늘의 비유를 잘 이해했더라면 이런 순진한 생각은 안 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한 해 한 해 지연될 때마다 하나님께 질문드렸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매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삼년간 붙어 다니는 가라지로 인해 저는 최고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주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요즘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신 분을 종종 찾아 가 뵙습니다. 저희 교회 교우님은 아니신데 저와 연고가 있어서 찾아 가 뵙습니다. 전신마비 환자이십니다.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습니다. 대화를 나눠 보면 믿음도 좋으십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리고 그 분을 위해 혼자 기도할 때마다 저의 기도 제목은 이렇게 마칩니다.

“Why?”

우리가 해결할수 없는 인생의 가라지 앞에서 부르는 우리의 노래입니다.

“Why?”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왜?”가 있습니다. 좌측뇌적 “왜?” 우측뇌적 “왜?” 좌측뇌적 “왜?” 는 논리입니다. 우측뇌적 “왜?”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노래에 주님께서 동참하십니다. 아니 완성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처음 고백이 바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께서는 이 고백을 통하여 우리들의 고백을 노래로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고백을 통해서 당신도 인생의 가라지 앞에서 찢기시면서 우리와 함께 노래를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아셨습니다. 한편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지 못 하셨습니다. 제 말이 모순이지만 바로 주님은 모순된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해 못하는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는 한 인간으로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Why?”

 주님도 이처럼 모르시면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요? 하루 하루 천국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 새로운 ‘Why?’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는 곳에는 항상 가라지가 기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가라지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주님의 노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Why?”

 이는 이 땅에서 천국을 소유한 자들의 공통적 노래 가사인 것입니다. 가라지가 있다는 것은 천국이 임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그동안 나태주 시인의 풀꽃 1, 2를 소개해 드렸는데 오늘은 3을 나눕니다.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꽃 피워 봐’를 ‘노래해 봐’로 바꾸겠습니다.

‘노래해 봐

참 좋아’

우리들의 노래 가사는 “Why?”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알려주신 최고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잃을 때 우리는 어느덧 힛틀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바로 이 땅에 뿌려지는 좋은 씨앗입니다. 우리들의 노래는 분명히 꽃이 필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갈 때까지 함께 이 노래를 부르십시다. 우리들의 노래는 천국을 장식하는 최고의 재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 때는 더 이상 가라지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가라지는 불태워집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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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15 “누룩과 천국” 마태복음 13:33 (03/12/2023) webmaster 2023.03.13
314 “가라지와 천국” 마태복음 3:24-30 (2023.2.26) webmaster 2023.02.28
313 “찾은 아들, 잃은 아들?”: 누가복음 15:11-32 (2023. 2. 19) webmaster 2023.02.24
312 “마지막 기회” 마태복음 20:1-16 (02/05/2023) webmaster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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