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빠리의 노틀담 성당 앞에 눈 먼 거지 소녀가 서 있었습니다. 소녀는 “저는 눈이 안 보이니 도와주십시오”라고 씌어진 마분지 푯말을 들고 있었지만 소녀 옆을 지나는 관광객들은 그저 힐끗 소녀를 쳐다 볼 뿐, 아무도 소녀의 발 앞에 놓인 접시에 돈을 놓고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와서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잠깐 푯말을 내게 주겠니?” 소녀가 푯말을 건네자 남자는 무엇인가를 써서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소녀의 접시에 돈을 떨구고 갔습니다. 일부러 다가와서 “힘내세요,” 인사까지 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남자가 다시 돌아오자 소녀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푯말에 무엇이라고 적으셨습니까? 무슨 마술 같은 말을 적으셨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게 돈을 주고 갈까요?”
그 남자가 답했습니다. “단지 이렇게 적었을 뿐이란다. ‘저는 당신들이 즐기는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그 남자는 프랑스의 시인 로제 까이유었습니다.
오늘은 저희 교회 비젼선언문 네번째 항목을 나눕니다. 다시 반복하면, 첫번째는 ‘삼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 두번째가 ‘세계를 향한 교회’, 세번째가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 그리고 네번째 곧 오늘의 주제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가는 교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금방 알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고난주간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주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몇일후면 십자가에 달리실텐데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전 주님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실제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곧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러면 안 된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닮지 말아야 할 7가지의 종목을 하나 하나씩 나열하시는 것입니다. 그 중 네번째가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23절을 봉독해 드리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곧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면서 더 큰 목적은 제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더 크게는 바로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일조도 드리되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함께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볼수 있습니다. 그냥 ‘십일조는 드리되’ 말씀하셔도 되는데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번째 특이한 점은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 두 가지를 차례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그냥 십일조가 아니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유는 한 마디로 이 셋 모두 식물입니다. 그것도 쌀과 밀과 같은 주식이 아니라 향과 같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역할을 하는 식물입니다.
그러면 왜 기왕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시려면 ‘쌀과 밀의 십일조는 드리되’라고 하셨어야지 향료와 같은 것을 예로 드셨을까요?
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은근히 꾸짖는 것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곡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향료와 같은 사소한 식물에 대한 십일조까지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마 자기들은 이런 것까지 드린다고 자랑했던 것 같습니다. 곧 적은 액수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교만 가운데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꾸짖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 사소한 식물에 대한 십일조는 안 내도 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십일조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더 중요한 율법의 말씀을 행하지 않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둘 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 중 더 중요한 것은 두번째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누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고요?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제자들도 쉽게 바리새인들을 닮아 갈 것을 내다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한 앞으로 주님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교회도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을 내다 보신 것이 아닐까요?
대표적인 예로 실은 중세기 때 교회는 헌금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
한편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곧 주님은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가며 십일조와 함께 최고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삶을 살 때 누리는 축복이 어떤 것일까요? 처음 소개해 드린 프랑스 시인이 누린 축복과 비슷한 축복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이웃을 새롭게 봅니다. 이웃이 들고 있는 팻말을 고쳐 줍니다.
“저는 당신들이 즐기는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동안 많은 삶의 고뇌와 세상에 대한 번민 가운데서 이런 기가막힌 사랑의 표현을 할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새롭게 닥아 옵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어찌보면 이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삶을 선택한 자들은 어느덧 시인의 눈을 소유하게 되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려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십일조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픈 생각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힙니까? 그런데 십일조도 습관이 되면 좀 쉬워집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가는 삶은 습관이 된다고 쉬워지지는 않습니다. 이는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를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저희 교회가 헌금함을 뒤에 놓고 있는데 저도 매주 헌금을 넣습니다. 그런데 혹 잊어버리면 그 다음주에 모아서 함께 넣습니다.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토요아침기도회를 마치면 교회 주변을 산책합니다. 자주 저에게 손을 내미는 걸인들을 만납니다. 멀리서 보이면 지갑에서 1불 짜리를 꺼내고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건네 줍니다. 어떤 날은 아무도 안 보입니다. 그러면 편한 마음으로 산책합니다. 그렇다고 그 다음주에 만난다고 2불을 건네지 않습니다. 쫓아가면서 찾아 헤메진 않는 제 모습을 느껴 보았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헌금은 습관으로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 7:9-12,
“…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사회정의의 문제는 사회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게 제도화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 어려움을 락스타 보노(Bono)가 토로합니다. 보노는 아프리카에서 빈민 사역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곧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 사업을 아무리 해도 사회제도가 악하면 가난을 퇴치할수 없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시에라리온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아시는 분도 많으실줄 압니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배경인 나라입니다. 다이아몬드가 많이 생산되는 나라인데 바로 다이아몬드 때문에 늘 전쟁 가운데 있는 나라입니다. 물론 요즘 많이 안정되어진 것 같습니다.
시에라리온의 어느 유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재산 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물건에서 나온 것이 많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저주가 되었다. 그것이 시에라리온에 참혹한 내전을 일으켜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을 장악하는 사람이 나라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이아몬드다.”
사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천연자원이 나오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강대국이 와서 갈취해 가기 때문에…. 곧 보노의 말을 실감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십일조는 예배 시간에 헌금함에 드리면 끝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만으로는 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말합니다.
“내 목표는, 세상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화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화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미식축구 감독이었던 Bill McCartney 감독은 그의 책에서 교회가 늘 수비만 하다가 약해진 경위를 강조하는데 곧 개인 경건과 의로운 삶에만 힘쓰고 있다고 말하며 교회가 공격을 잘 해야 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교회의 공격이란, 성경이 명하는 대로 정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좀더 효과적으로 정의를 가르치고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끌어낼 수 있다면, 공격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하면 잃어버린 자들을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정의를 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문화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화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이미 2천년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익히 아시는 분도 계실줄 압니다. 저희 교회가 속한 교단 PCUSA에서는 교단의 표어를 ‘Matthew 25’로 정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주제로 만든 것입니다. 의인들인 양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을 토대로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1. Building Congregational Vitality (활기찬 회중 만들기)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갈 때 더 교회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2. Dismantling Structural Racism (구조적 인종차별 철폐)
미국 사회 안에는 인종차별주의가 구조적으로 뿌리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흑인들이 좋아하는 마약과 백인들이 좋아하는 마약이 있는데 처벌 기준이 다르다고 합니다. 흑인들이 좋아하는 마약은 작은 양으로도 처벌 대상이 되지만 백인들이 좋아하는 마약 소지자를 처벌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고 합니다.
3. Eradicating Systemic Poverty (조직적인 빈곤 퇴치)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제도들을 개선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단이 추구하고 있는 ‘Matthew 25’인 것입니다.
총회 웹사이트에는 Matthew 25 프로젝트에 참여한 교회의 사역들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제 눈에 가장 띄인 교회는 볼티모어에 있는 흑인 교회인 Knox Presbyterian Church입니다.
팬데믹 기간 많은 교회들이 더 약해졌는데 이 교회는 Matthew 25 프로젝트를 통해서 더 활성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팬데믹 기간 담임목사님은 총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어서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이 닥칠뻔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갈 때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원래 Soup Kitchen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확대해서 Food Giveaway Program으로 바꿨습니다. 전에는 찾아 오는 사람들만 섬겼는데 팬데믹후에는 도리어 조직적으로 커뮤니티를 섬긴 것입니다. 더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필요한 음식을 배달해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여러 정보도 나누고 특히 투표 및 백신 접종에 관한 일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팀을 꾸린 것입니다. 특히 씨니어 빌딩에도 섬김의 손을 폈더니 이젠 그곳에서 이 교회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구조적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한 팀도 원래 있었는데 더욱 활성화를 시켜서 커뮤니티의 일에 협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같은 노회 소속 백인교회와 연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도 함께 드리고 성경공부도 같이 하고 다른 프로젝트도 같이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팬데믹 때 도리어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가는 교회가 되어 더욱 활성화가 된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교우 여러분,
동네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지 마십시다. 그들이 왜 늘 구제의 대상이 될수 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십시다. 사랑으로 정의를 세워 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들어주고 베풀고 챙겨 줄 수 있는 훌륭한 은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은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만일 그 은사가 전부 활용된다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남은 한 해 이 놀라운 기적의 교회가 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